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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보편과 진보

by 격암(강국진) 2019. 12. 18.

보편과 진보 이 두단어는 때로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보편을 자연스레 진보로 여기는 사람들은 일종의 서구 문명 중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서구 문명은 그리스 문명이래 보편을 추구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과학, 하나의 법, 하나의 신 이런게 서구 문명의 특징이고 본질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주자학도 이런 보편을 추구하여 도교나 불교를 억누르고 홀로 세상을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가 있으니 이걸 반드시 서구의 특징만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같은 극동지방의 나라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 보편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 같은 법을 적용하는 것의 가치를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현실이 비록 그를 따라가지 못해도 말이다. 법앞에 평등을 이룩하는 것이 진보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한국 사람은 대부분 그에 동의할 것이다. 이러니 보편이 진보라고 진보가 보편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자칭 타칭 진보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계몽주의자들이다. 계몽적인 것도 종류가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깨우치는 자각을 촉구하기 보다는 지식과 사상을 남의 머리에 퍼부으려는 계몽주의자다. 그들은 이것저것 척척 보편적 법칙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관계도 교육문제도 경제문제도 가족문제도 통계와 법칙으로 다시 말해서 전인류적인 보편적 시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한 국가나 한 문화 단위정도의 보편적 배경을 두고 데이터에서 찾은 법칙으로 이야기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노동자니 사업가니 남자니 여자니 하는 보편적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국가란 무엇인가 뭐 이런 식으로 뭐뭐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를 아주 자주한다.

 

그럼 나는 그들과 뭐가 다른가. 나도 같은 거 아니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 법하다. 이 글부터가 계몽주의적인 것이 아니냐고. 물론 어느 정도는 그렇다. 우리는 보편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 없으니 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다만 나는 내가 무지의 벽이라고 부르는 그 보편의 범위 너머를 잊지 말자고 자주 이야기하는 편이다. 우리는 거기를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얼마전에는 유튜브에서 노동아카데미 교수라는 분이 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영 그런 강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강의는 감동적이었지만 한편으로 그 강의는 보편에 매달리면서 지극히 세뇌적이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는 모두 노동자다라는 식으로 강조하면서 노동자가 자기 몫을 받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을 노동자라는 말 하나로 싸잡아서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자고? 모두가 노동자니까 모두가 자기몫을 받는 세상? 그런 논리라면 우리는 모두가 인간이니 인류 전체의 평등을 위해 모두가 같은 생활수준을 달성하도록 하자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것도 감동적인 이야기고 올바른 목표겠지만 공허하다. 왜냐면 그길은 워낙 멀다. 한반도 평화공존도 달성못해서 애태우는데 인류평등 이야기하다가 굶어죽고 전쟁나서 죽을 것같다. 인류평등을 위해서 못사는 나라사람들에게 국경을 개방하자고 하면 몇퍼센트의 사람들이 찬성할 것인가. 게다가 왜 인류에서 멈추나. 우리는 모두 지구위의 생태계의 일부가 아닌가?

 

그 교수가 외국의 사례를 든 최초의 예가 노르웨이였다. 인구는 5백만이 겨우 넘고 국민소득이 8만불이 넘어서 세계 3등이며 천연자원이 넘쳐나며 안보문제가 없는 유럽에 있는 나라의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살까요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양심적인 지식인의 태도일까? 특히 노르웨이에 대한 이런 간단한 소개도 없이 말이다. 게다가 심지어 그 노르웨이 사람들도 한국에 와서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문화적 깊이에 감탄할 때가 있다. 5백만이 우리나라보다 더 넓은 땅에 흩어져 사는 것과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노르웨이처럼 만들 수도 없겠지만 우리가 노르웨이를 부러워하는 것은 초원의 사자가 집에 사는 고양이를 부러워 하는 꼴이 아닐까? 한국은 발전하고 있고 이미 국력이 세계 10위안에 든다고 말해지며 이대로 발전해서 통일까지 된다면 그 국력이 세계 5위안에도 들지 모를 정도의 나라다. 우리가 노르웨이를 부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또다른 예를 들어 보자. 최근에는 4차산업혁명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중에도 이 보편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 즉 사회 전체를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만 보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국민 모두가 스마트폰을 쓰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노인이나 기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세상에서 불편해 하면 시대에 뒤쳐지지 말라고 하고, 좋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전국의 택시는 전부 없어지거나 혹은 전국의 택시는 모두 남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지적하듯이 이런 사람들은 좋은 기술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다. 상황은 지역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우리에게 편하고, 우리가 살고 싶은대로 살 수 있어야 한다. 농사는 대단위로 농사를 짓는 농사꾼의 일이 되는 것이 언뜻 생각하면 합리적이고 도시에 사는 사람이 소규모로 농사를 지어 도시농부가 되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마치 2G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듯이 그들을 별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좋다. 기술이 사람을 도와야지 사람이 기술에 종속되어서는 안된다. 지로용지로 공과금을 내는 시스템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스마트폰 자동이체따위의 개념이 불편하기만 하다는 사람에게 그걸 강요하는 것은 항상 바람직한 변화는 아니다. 좋은 기술은 살고 싶은대로 살게 한다. 좋은 예는 도시 농부다. 옥상이나 베란다나 작은 화단에서 농사를 짓자면 비료나 종자에서부터 나름의 기술이 필요하다. 좋은 기술은 종종 이렇게 마치 거기에 신기술이 없는 것같아 보인다. 

 

보편은 폭력을 행사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대중적인 압력을 받아 본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결혼은 언제하는지, 대학은 가야 하는지, 옷은 어떤 걸 입어야 하며, 어떤 직장을 가지고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차를 타야 하는지에 대해 한국인들은 때로 지독스럽다고 할 정도로 서로에게 압력을 가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는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공포가 둘 다 강하게 병존하는 것같다. 서로 서로 벽을 치고 되도록 모르는 척 살려고 하면서도 어쩌다가 알게 되고 소통하게 되면 이젠 우리가 남이가 식으로 운명공동체처럼 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남과는 다르게 살자라던가, 다양성이 중요하다 뭐 이런 말이 이 글의 결론인가? 그렇게 쓸 수도 있지만 그것은 옳은 말이면서도 다시 공허할 수 있다. 그 같은 말조차도 그것이 보편적 언사로 반복될 때 또다른 보편성의 함정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이 글의 결론은 그래서 조금 더 천천히 보고 조금 더 깊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보고, 남을 보고, 우리를 보는 것이다. 남과 다르게 살려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안 다른 것도 있다. 그러면 안다르게 사는 것이 옳다. 서둘러 이런 저런 개념으로 척척 결론을 내고 나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피해야 한다. 그건 자기에게건 타인에게건 종종 폭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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