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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당신의 인문학공부가 실패하는 이유

by 격암(강국진) 2020. 4. 27.

당신의 인문학공부가 실패하는 이유



세상에는 인문학강좌가 많습니다. 그리고 공부가 어렵다고 하는 분들도 많죠. 그런데 요즘의 인문학 공부는 종종 한가지 이유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의 인문학공부가 실패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성공이나 실패를 말했으니 우선적으로 인문학공부의 목적이라는 부분을 분명히 해봅시다. 제가 말하는 인문학 공부란 퀴즈대회나 상식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하는 공부는 아닙니다. 남에게 잘난 척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도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남에게 무식하게 보이는 것도 싫죠. 하지만 그런 인문학 공부는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고 종종 자기에게 해롭습니다.


인문학 공부란 일반적으로 두가지 이유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보다 합리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는게 싫고 어리석게 사는 게 싫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의 행복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불행하고 우울한 마음이 싫어서 인문학 공부에서 지혜를 찾습니다. 


목적이 이렇게 거창하고 대단하니까 당연히 공부가 어려울 것같아 보입니다. 물론 공부란 어려운 것이지만 사람들의 공부가 실패하는 이유는 반드시 공부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기 시작하자마자 한가지를 오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건 바로 사람들이 인문학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입시공부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학생이건 이미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했건 그렇습니다. 사실 한국 사람의 대부분은 오래동안 입시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익숙한대로 하는 거죠. 하지만 인문학공부를 입시공부처럼 하는 순간 여러분의 인문학 공부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입시공부도 역할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공부를 입시공부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입시공부가 뭘까요? 입시공부는 남의 질문에 대해 객관적인 정답을 말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시험문제는 다른 사람이 내는 것이고 그 시험의 정답은 당연히 객관적 답이니까요. 


인문학 공부는 그런게 아닙니다. 인문학 공부는 자기의 질문에 자기의 답을 하기 위한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질문이나 자기의 문제는 자기가 남과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러니까 객관이나 보편의 힘이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에만 빠지면 정작 그런 공부는 우리 자신의 문제에는 도움이 안되는 겁니다. 내 문제가 거식증이라면 다이어트 비법은 도움이 안됩니다. 내 문제는 솜털처럼 가볍고 사소한 것이지만 유한하고 찌질한 내가 그걸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런데 무한히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세상을 사는 성인군자의 이야기에만 너무 빠지면 내게 도움되는 것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물리학 수업을 들으면서 연애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문학 공부가 입시공부와 달라야 하는 이유는 적어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인문학 공부는 우리 자신의 감각과 감성을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감각을 키운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를 책으로만 배우려고 하면 안되죠. 똑같은 길에서 똑같이 패달을 밟아도 남을 흉내내기만 하면 그 자전거는 넘어집니다. 자신의 균형감각을 키워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어떤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했으니 나도 최대한 똑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입시공부방식으로 객관적 답을 외우는 인문학공부란 이런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똑같은 상황이란 단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의 방법을 최대한 똑같이 따라해도 우리의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문제가 똑같이 따라하지 못한 자기자신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인문학 공부는 우리를 누군가의 노예로 만듭니다. 이해도 안되는 걸 똑같이 따라하려고만 하니까요. 그래서 입시공부방식으로 하는 인문학 공부가 위험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합리적으로 살 게되거나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비합리적이 되고 불행해지죠. 자신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니까요. 


입시공부가 아닌 인문학 공부의 핵심에는 ‘체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맛집 리스트를 아무리 외워도 그것은 당연히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경험과는 다릅니다. 체험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전국의 맛집을 다 아는 것보다 맛있는 음식 한 그릇을 먹어 본 경험이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문학공부를 입시공부하듯이 하기 시작하면 이 당연한 사실이 망각됩니다. 객관적 답을 외우는 입시공부는 맛집리스트를 외우는 겁니다. 거기에는 체험이 없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질문에 객관적 정답을 쓰는 게 입시공부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삼계탕집은 어디어디라고 외우면 되는 겁니다. 실제로 그 삼계탕을 먹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명쾌한 설명에 너무 열광해서는 안됩니다. 학원에는 쪽집게 강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인문학 공부에서도 사람들은 어떤 두꺼운 책을 한줄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선생님을 만나면 지나치게 열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공부하는 재미를 보여주는 선생님들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명쾌한 한줄설명이 뭔지에 대해서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대장금같은 드라마를 설명한다고 해 봅시다. 이 드라마는 장금이라는 소녀가 궁에 들어가서 온갖 고생을 한 끝에 성공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어떤 선생님이 설명해 줍니다.  대장금은 56부작이나 됩니다. 그걸 다 안보고 이렇게 한 줄로 대장금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우리는 어디가서 대장금에 대해 아는 척할 수 있고 그걸 이렇게 정리해준 사람이 고마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정말 대장금을 1회나 2회정도라도 본 사람보다 대장금에 대해 더 많이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장금을 만든 사람이 대장금의 내용이 그렇게 한 줄로 설명가능한 것이라면 애초에 왜 그렇게 길게 만들었을까요? 입시공부는 인문학 공부로서는 최악입니다. 입시공부는 헛똑똑이를 만듭니다. 간결한 설명은 아무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이 뭘 많이 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우리는 조금 읽고 많이 생각했지만 아직 그걸 남에게 잘 설명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사람을 종종 바보취급합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실은 나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인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명쾌한 답을 안다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열광합니다. 


이제까지의 말을 정리해 보자면 인문학 공부는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나를 키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 답을 외우는 입시공부를 하듯이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입시공부는 시험답을 외우는 것이기 때문에 체험을 빼먹게 됩니다. 


그렇다면 입시공부가 아닌 인문학 공부는 어떤 걸까요. 어떤 공부가 체험을 주게 될까요.  저는 두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가지는 반복과 창작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철학을 한번 공부해 볼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첫번째 벽은 철학자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단 한명의 책도 어렵고 단 한명의 철학자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더 많이 읽고 새로운 책을 자꾸 읽어라. 


내 글을 쓰기보다는 남의 글을 읽어라. 


그런데 이렇게 하면 할 수록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가 바보가 되는 것같이 느끼게 되고 우울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이따금씩 처음으로 돌아가서 공부를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읽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진도만 많이 나가는 게 아니라 이따금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이 그렇습니다. 뭘배웠든 얼마나 읽었든 우리는 그걸 자꾸 반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책들은 천천히 생각하고 자꾸 되씹어야 거기서 체험이 우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한번 읽는 것도 어려웠다고 해서 한번 읽고 던져버려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다 읽지 않고 앞의 몇장만 여러번 읽은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의 것에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작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글쓰기는 독서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기 글을 쓰면서 자기를 배우게 됩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구나,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자기의 질문을 명확히 알 수록 우리가 뭘 공부해야 하는지는 명확해 집니다. 


또 창작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창작을 다르게 보게 됩니다. 요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요리를 먹을 때 훨씬 더 다양한 질문을 하게 되죠. 그냥 맛있다가 아니라 어떤 재료나 어떤 처리가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를 보게 됩니다. 왜 이 요리는 이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독서와 글쓰기는 서로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글을 써 본 사람이 하는 독서는 다른 체험을 줍니다. 왜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을까에 대해서 그냥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더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적으로 등수를 매기고 다른 사람의 질문에 객관적 답을 쓰는 입시공부는 올바른 인문학 공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삶을 대신 살 수 없습니다. 누가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문학 공부는 자기 질문에 대한 공부입니다. 그래서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재미있게 하면 됩니다. 내 삶이고 내 공부니까요. 인문학공부에서는 반복과 창작이 중요합니다. 인문학 공부는 반복과 창작으로 뼈에서 국물을 우려내듯 체험을 우려내야 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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