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질문 강국진입니다. 저는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10년을 살면서 한 연구소에서 근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경험을 돌아보면서 한가지 질문을 준비해 봤습니다. 그 질문이란 바로 일본인은 위험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제 답은 그렇다는 겁니다. 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일본과 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은 다릅니다. 일본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도 일본제국주의의 잔재가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면서 오늘의 녹음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자.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일본인은 왜 위험한 사람들일까요? 오늘 제가 말씀드릴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일본은 그 본질이 군대와 같다는 겁니다. 둘째로 가까이에서 본 일본과 멀리에서 본 일본은 그 문화적 다양성 때문에 착시를 불러 일으킨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일본과 한국의 차이는 1392년에 있었던 조선의 건국과 1867년에 있었던 메이지 유신의 시간차이를 생각하면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먼저 일본이 군대와 같다는 것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한 나라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은 그 나라의 교육입니다.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인간은 태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만들어 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대개 초중고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 집니다.
제 아이들은 일본에서 초중고 과정을 모두 어느 정도 경험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일본의 학교에 대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일본은 모든 것이 군대 처럼 메뉴얼화되어 있고 규격화되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본이 군대같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일본의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똑같은 실내화를 신고, 똑같은 연필을 쓰고, 똑같은 조각도를 쓰며 똑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심지어 창의력교실이라는 제목을 단 수업에서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보고 그대로 따라합니다.
단 똑같다는 것은 같은 학교의 아이들이 그렇다는 겁니다. 학교와 학교를 비교하면 서로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학교 안에서는 한국에서보다 일본에서 획일화가 훨씬 더 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일본의 초등학교 즉 소학교에서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란도셀 가방입니다. 교칙에 란도셀가방만 들고 다니라고 되어있지 않지만 일본의 아이들은 모두 란도셀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교육도 군대같습니다. 소학교 아이들은 극기훈련이라도 하듯이 추운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고 다닐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맨발로 흙바닥 운동장을 달리면서 운동회에서 보여줄 체조연습을 합니다. 저는 처음 그 장면을 보면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직전에 살았던 뉴욕에서와는 학교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죠. 저는 이것이 부유한 일본의 교육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운동회 준비는 일본 소학교 교육의 상당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해마다 소학생들은 몇개월이고 운동회 연습을 합니다.
저에게 인상깊었던 또 하나의 사실은 일본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덕목이 무엇인가하는 것이 일본의 학교에서 아주 명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자, 동료를 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가 수업참관을 하러 소학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는 학교의 교육 목표, 학년의 교육 목표, 학급의 교육목표를 각각 세 개씩 써서 액자로 벽에 걸어 두었더군요. 그런데 그 모든 액자에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자가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것은 이렇게 세번이나 반복되어 말해질 정도로 중요한 교육 목표인 것입니다.
집단따돌림 즉 이지메의 원조인 나라가 일본입니다. 그런 일본에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자는것이 이렇게 강조되는 것에 놀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실은 이지메가 바로 우리는 하나라는 집단주의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집단주의는 낙오하는 것이 분명해지는 사람은 종종 반대로 강하게 배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럴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착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입만 열면 가문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어떤 때는 같은 집안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해 집니다. 가족을 학대하는 것을 말리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내 가족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집단주의적 정서는 소학교만 그런게 아닙니다. 일본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엄청나게 강조되는 것은 수업 그 자체보다 바로 집단적 부활동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일본의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부활동을 하다가 틈틈이 시간이 나면 공부도 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야자하면서 국영수 공부에 바쁘지만 일본의 중고등학생들은 대다수가 매일 방과후에 부활동을 하느라 바쁩니다. 방학중에도 계속 부활동에 관련된 연습을 합니다. 예를 들어 수영부라면 방학때도 날마다 가서 수영부 활동을 하는 겁니다.
그 부활동도 바로 군대처럼 집단을 강조하고, 서열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토록 바쁘게 부활동에 가지만 저학년때는 가서 응원이나 하고 선배들 시중이나 들고 청소나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철저히 조직의 사람으로, 공동체의 일부로 키워집니다.
시간상 예를 들지는 않겠지만 일본의 만화나 드라마나 영화를 봐도 공동체 정신을 강조하는 예는 많습니다. 동료를 배신하지 말라, 동료와 사이좋게 지내자. 이게 가장 중요한 일본의 정서입니다. 결국 일본인은 이렇게 키워지고 이렇게 재교육됩니다.
강력한 공동체 윤리는 평등을 강조하게 됩니다. 동료란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경쟁은 나쁜 것이다. 모두가 같은 물건을 쓰면 빈부차가 나타나지 않아서 좋다. 똑똑해도 똑똑한 티를 내면 안된다. 이런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결국 그 안에서 획일화되고 어떤 집단의 일부일뿐인 인간이 만들어 지는 겁니다.
군인이 되는 것이죠. 전쟁이란 끔직한 것이기 때문에 군인들은 평소에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 자기 자아를 없애는 훈련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군대는 폭도보다도 위험합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감정적인 망설임도 없습니다. 군대 훈련이란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은 멀리서 보면 군대같지가 않습니다. 심지어 일본 사람들도 자신들이 군인같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일본의 군대문화를 꼼꼼함이나 보수성으로 포장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우리는 군대같고 기계같다라고 하는 말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수적이고 전통을 존중한다라고 말하거나 우리는 대충대충하는 것을 싫어하고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장인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들립니다.
일본사람들은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감정적이고 자신들은 차분한 사람들이라는 말도 많이 합니다. 스스로가 감정이 억눌려진 군인같이 키워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말하는 문맥으로 접근하면 창의성과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그들의 문화는 때로 아름다워 보이기 까지 할 수도 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장인정신과 전통을 존중하는 일본의 문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런게 아닙니다. 일본의 문화는 개인의 자아를 말살하는 위험한 군대문화일뿐이죠.
일본이 언뜻 보면 군대같지 않아 보이는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일본이 이렇게 하나의 학교, 하나의 회사, 하나의 마을만 보면 한국보다 훨씬 더 억압이 심하고 획일화가 심한 사회인데도 일본 전체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착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군대처럼 제약이 많은 나라지만 학교와 학교, 회사와 회사, 마을과 마을은 서로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매우 자유로운 국가라는 착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게 아닙니다. 일본의 종교인 신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신을 모십니다. 기독교나 불교같이 보편적 진리나 신을 가지지 않습니다. 결국 일본사람은 그저 보편적 질서에 대한 감수성이나 경험이 작은 겁니다.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을 추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진 가장 큰 차이입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1392년에 있었던 조선의 건국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1867년에 있었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죠. 이 두개의 사건은 거의 5백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조선에는 양반이 있었습니다.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의 줄임말인데 결국 국가고시인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1392년에 건국한 조선은 이미 중앙에서 관리를 뽑아서 각지로 파견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본다는 뜻은 단순히 왕에게 사랑받으면 출세하는게 아니라 왕을 넘어서는 보편적 질서, 보편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원칙적으로 말해서 조선은 가장 천한 백정도 왕에게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항의를 할 수 있었고 왕도 유교적 질서와 논리를 무시할 수 없던 나라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런 질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최소한 6백년을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건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입니다. 1867년에 있었던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은 쇼군이라는 우두머리가 있긴 했지만 전국을 번이라는 단위로 나눠서 번의 주인이 산적두목처럼 지배하는 봉건국가였습니다. 왕이 아니라 산적두목이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아는 조선의 왕은 실상 유교적 사상의 지배를 받는 부자유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조직논리는 그런게 아닙니다. 조폭논리처럼 그저 힘이고 충성일 뿐입니다. 번주는 물론 쇼군에게 충성하지만 일반 사람들의 기본적 의무는 국가단위의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번주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은혜를 입으면 갚아야 한다는 윤리가 있을 뿐 무슨 성인의 말씀을 따른다는 식의 보편 질서가 있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번주가 명백한 잘못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걸 백성이 번주보다 더 높은 쇼군에게 고발합니다. 그러면 번주가 잘못한 것이 맞아도 그걸 쇼군에게 고발한 백성은 죽어야 합니다. 충성의 의무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는 춘향전같은 이야기가 성립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사또에게 충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입니다.
그런데 흑선으로 상징되는 외세가 나타납니다. 그러자 각각의 번이 이렇게 독립적이면 외세에게 각개격파될 것같았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납니다. 메이지 유신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보편질서를 만든 겁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을 하나로 뭉치고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전국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한 나라를 만듭니다. 지금도 일본을 지배하는 자민당의 뿌리는 일본제국주의자를 거쳐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집니다.
일본은 조선보다 거의 5백년을 뒤져서야 이런 시스템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있고 겨우 78년후인 1945년 일본은 전쟁으로 패망합니다. 물론 일본은 전쟁에 지고나서 미국에 의해 강제로 근대국가의 헌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고 조선에 비하면 시간도 형편없이 짧습니다.
정리하자면 한국인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질서와 법에 따라 살았던 기간이 일본인들보다 훨씬 길다는 겁니다. 문화는 천천히 변합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문화는 봉건적인 경향이 아직도 강합니다. 아베총리를 비롯해서 일본의 많은 정치인들은 대개 가업으로 정치를 합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에 비하면 훨씬 세상에 대한 관심사가 나 자신과 우리 동네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사상에 관심이 많고 보편논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동료를 배신하지 말고, 우리끼리 화합하고 잘 살면 모든 것이 다 잘된다는 거죠. 동료를 배신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 도덕이니까요.
2001년에 취객을 구하려고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많이 놀랐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때까지 떨어진 사람을 보고 몸을 던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나 동료를 아끼라는 말을 듣는 일본이지만 그들이 동료라고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직접 대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지역을 넘고 심지어 국가도 넘어 범인류적 차원에서 윤리적이 되려고 하는 한국인을 이해하기 힘든 겁니다.
일본은 위험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자아가 없어지도록 키워졌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그렇다는 비판을 스스로 종종하지만 일본에 비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제국의 침략과 전쟁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래 패전은 해봤지만 민주혁명을 성공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본질은 일제때나 메이지유신 이전에 나라가 번으로 쪼개져 있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이 큰 곤란에 처하고 위협을 받으면 일본은 다시 한번 뭉칠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국민이 단합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아가 없는 군인같은 사람들이 모두 한쪽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들은 영혼없는 군대처럼 됩니다. 게다가 지금의 정치주류는 일본제국주의의 후예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민주화 세력을 응원하는 일이 한국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진짜로 민주화되는 날까지 일본의 본질이 군대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때가 오기전까지는 일본은 위험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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