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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AI 시대의 진짜 교육

by 격암(강국진) 2023. 9. 17.

23.9.17

AI 시대의 교육은 지금과 뭐가 달라야 할까? 나는 전에도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답한바 있지만 이제는 꽤 답이 더 구체적으로 변한듯하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다.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AI 시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대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백년뒤의 교육은 지금과는 전혀 다를 거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반드시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를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적으로 교육은 몇백년전이나 지금이나 원리적으로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 조차 지금과 백년전의 교육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때는 이미 한국이 서구화된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백년전과는 전혀 다르다. 그때는 조선에서 유학교육을 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때 있던 서당이며 서원은 이후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근대적 학교가 세워지고 운영되는 일이 생겼다. 우리는 교육에 대한 근본적 생각 자체를 다 버려야 했고, 지식이상으로 새로운 문화를 배워야했다. 

 

몇십년안에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즉 지금의 학교는 거의 다가 사라지고 새로운 교육기관이 세워지는 것이다. 그 새로운 교육기관은 지금의 학교가 포용할 수 없는 지식과 문화를 전할 것이다. 과도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라고 해도 이런 가능성을 무시하고 AI 시대의 교육을 고민한다는 것은 유학교육이라는 틀을 그대로 두고서 과학기술 교육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럴 때 원하는 것과 노력의 결과가 정반대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당의 틀을 유지하면서 과학교육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고해도 매우 어려워서 이런 노력이 오히려 교육을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봉건 질서를 당연시 하면서 좋은 왕을 뽑아서 좋은 나라를 세우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상상해 보자. 이 사람은 완전히 새로운 공화정의 나라를 세우려는 생각을 억압해서 오히려 미래를 오지 못하게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기본적 사고의 전환이 없이는 학교를 더 좋게 하고, 더 좋은 교육을 제공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미래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사고의 전환이 어떤 것인가를 간단히 설명하기 위해 지금의 학교를 이렇게 말해 보자. 지금의 학교는 문자 패러다임과 과학 패러다임을 가르치고 그 결과물들을 가르쳐서 학생들의 지능을 향상시키는 곳이다. 문자 패러다임과 과학 패러다임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말한다. 문자 패러다임은 문자를 써서 만들어 낸 작은 지식들을 합치고 변형해서 더 쓸모 있는 지식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과학패러다임도 거의 같고 문자 패러다임의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지만 과학패러다임은 그렇게 만들어 낸 지식이 정확한 법칙에 기반한 것이어서 실험과 관찰에 의해 반증가능할 것을 요구한다. 두 개의 패러다임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 즉 지식과 과학이론들은 모두 어떤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준다. 빵을 만드는 레시피는 빵만드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고, 우주선의 설계도는 우주선을 만드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살필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자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문자 지능을 주고, 과학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과학 지능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학교란 이렇게 만들어진 지식들을 학생들에게 주입할 뿐만 아니라 그런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방법 즉 패러다임을 훈련시킨다. 그래서 학생들은 더 많은 지식들을 만들어 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학교 역시 하나의 지식에 기초해 있다. 즉 학교란 현대 사회가 만들어 낸 하나의 공장, 하나의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것이 가르치는 패러다임에 기초해서 설계되어서 지식을 최대한 빠르게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이렇게 지금의 학교 자체가 AI 시대 이전의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이 학교는 결코 '개혁되어' AI 시대의 교육기관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교회나 절이 스스로 개혁의 주체가 되어 종교와는 독립되어져 있는 학교가 되겠다는 것과 같다. 종교시설이 자기 자신의 존재의 근원에 있는 종교적 믿음을 포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학교도 지식이나 지능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개혁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교육은 어떻게 다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AI 패러다임과 그것에 따라서 만들어진 새로운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구체적인 AI 프로그램들의 사용법을 가르칠 것이다. 과학이론이 하나의 지식이듯 하나의 AI 프로그램은 AI 패러다임이 만든 새로운 지식이고 문제를 해결한다. 이 AI 패러다임의 핵심은 문제와 질문에 주목하고 환경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리고 데이터 얻기와 최적화가 중요하다. 아래에 쓰겠지만 이것은 지금의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지식 패러다임과 전혀 다르다. 

 

지금의 교육은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모든 학생들이 정확히 같은 지식을 배운다. 그러는 가운데 문제나 환경은 망각된다. 왜냐면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에서 보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이 지식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권과 개인적 차이에 상관없이 옳다는 것이다. 지식의 보편성은 학교 교육의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학교안에서 의심받는 순간 학교의 시스템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늘날의 학교교육이 전세계적으로 엉망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도 주로 이때문이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 학교안에 퍼지는 순간 그것은 학교 시스템의 근본과 부딪히고 결국은 사회로 부터 분리되어 사법적 질서도 없는 학교는 일종의 폐쇄된 지옥이 되는 것이다. 보편도 없고 그렇다고 특수를 인정할 수도 없다. 지금의 학교교육은 애초에 특수성을 다를 기초가 없다. 모두가 같은 교과서를 들고 공부한다는 기본 자체가 이것에 어긋난다. 모두가 문제가 뭔지도 모르고 기계의 부속품같은, 언제 쓸지도 모를 지식을 외우고 있다는 학교 시스템의 기본 자체가 이것에 어긋난다. 

 

AI 패러다임이 문제와 환경을 가장 먼저 말하는 이유는 AI 해결책은 언제나 데이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문제이고 환경이다. 이 공장에서 비누를 생산하는 지능적인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이 공장이 어떤 곳인지, 그 비누가 어떤 것인지에 당연히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뭘 원하는가에도 달려 있다. 그런 문제와 환경적 특성이 데이터를 결정한다. 그리고 데이터가 AI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를 보지 않고, 환경을 보지 않고 AI를 사용해서 뭘 할 수가 없다. 요즘 자율주행에 대한 논의가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가 환경을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잊고 보편적으로만 자율주행 AI를 토론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학교는 세상을 잊고, 너를 잊고, 주변을 잊으라고 말한다. 진리는 모두가 읽고 있는 교과서 안에 있다. AI 패러다임은 답은 문제자체에, 질문 자체에, 환경 자체에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질문을 약간 바꾸고, 환경을 약간 바꾸는 것이 해결의 품질을 엄청나게 바꿀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보고, 자기를 보고, 주변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 지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AI 패러다임은 지금의 학교와는 달리 논리적으로 이해가능한 시스템을 만들고 외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영감을 신성시 하면서 세상이 가진 문제를 외면하지도 않는다. AI는 데이터로 문제를 해결한다. 알파고가 인간보다 더 바둑을 잘 두듯이 문제를 풀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걸 논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알파고가 바둑을 둬서 인간을 이기는지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최적화과정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는 AI가 만들어 진다는 것을 알 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의 지식인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지금의 학교는 어떤 진리나 원칙을 알고 모든 일에 왜를 묻고 조심스럽게 단계를 밟아서 성장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시스템만 남고 우리는 질문을 잊어버린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은 잊혀지고 학생들은 그저 똑똑한 누군가가 던진 질문의 답을 외운다. 풀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므로 억압된다. 그런데 어린 학생에게는 거의 모든 일이 풀 수 없는 질문이다. 

 

AI 패러다임에서는 경계를 넘어 이러면 왜 안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질문이 그럴듯하면 AI가 발달한 사회에서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최적화를 통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창출하는 것은 사회적 시스템이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AI가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멍청한 질문에는 흐릿한 답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훨씬 더 문제를 지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AI가 주는 답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그걸 써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다. 

 

이미 이런 일은 거대언어모델인 챗GPT같은 AI를 쓰면서 나타나고 있다. 챗GPT를 사용하는 방법의 첫번째는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질문이 나쁘면 결과가 나쁘다. AI가 그림을 그려준다고 해도 인간은 이러저러한 그림을 그려달라는 요청을 할 필요가 있다. 그 요청이 그럴듯할 때 결과물도 더 좋은 것이다. 우리가 충분히 좋은 질문을 던진다면 인공지능은 가장 훌룡한 예술작품이나 철학 에세이를 그럴듯하게 쓸 수 있다. 심지어 질문자가 그 답을 이해하지 못해도 말이다. 

 

학교의 파괴는 일어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미 철학자 듀이가 백년전에 근대학교의 문제점을 논했다. 하지만 대안이 이제까지는 없었다. 이제 AI가 발달함에 따라 구체적 대안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AI의 시대가 정말 1-20년안에 온다면 그것은 지금의 학교가 마치 종교시설이나 서원같은 옛날 유학교육 시설처럼 보이게 될 날도 그만큼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금 태어나고 있는 아이들은 과학의 시대에 천자문만 열심히 외우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미 대학에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다. 지식을 더 만드는 비용이 상승하므로 대학 등록금은 점차로 비싸져 왔다. 좋은 연구를 하는 좋은 교수는 인건비도 연구비도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학이 그런 비용을 합리화 할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냐고 하면 그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사실 지식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무한정으로 흘러다니고 있다. 그리고 AI의 발달은 그것을 폭발적으로 가속화 할 것이다. 

 

혼란스런 시대다. 그리고 그런 혼란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계몽주의의 이상에 따라 더 많은 진리와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잘 되지 않고 있어서가 아니라 계몽주의 자체가 망하고 있어서다. 진리와 지능과 합리성이 무엇인지 자체가 지금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시대였던 17세기이전에 종교인들이 하던 소리는 지금 불합리하게 들린다. 지금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여겨지는 말들도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좁아서 지극히 어리석은 이야기로 여겨지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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