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18
엔진이 없으면 차가 달릴 수 없지만 바퀴가 없어도 마찬가지이듯이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수많은 것들이 모두 필요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경제와 사회를 주도하게 만들어 주는 보다 희귀한 자원은 존재해 왔다. 다른 것들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더 쉽기 때문에 가장 크게 생산성을 제약하는 요인이 되는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시대마다 달랐는데 예를 들어 직업의 종말을 쓴 테일러 피어슨은 시대별로 그 희귀자원들은 다음과 같았다고 말한다.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기술이나 서비스를 올바르게 결합하고 대중화시키는 능력이 중요해 졌다. 그리고 그 대중화를 위한 비전을 테일러 피터슨은 창업가 정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토지나 자본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이제까지 경제와 사회를 주도했다면 기술의 대중화를 위한 비전이 즉 미래 비전이 이제는 정말로 귀한 시대다. 예를 들어 애플의 CEO 였던 스티브 잡스는 1998년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당신이 뭔가를 보여주기 전까진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른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디자이너도 엔지니어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믿어지던 사업가였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들의 발달로 미래에는 지금과는 매우 다르게 살게 될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한가지 추세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래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이 가지는 영향력이, 우리의 내적 변화와 생활방식의 변화에서 나오는 영향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생각과 기술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지만 점차 무게중심이 기술에서 생각으로 변해가는 시기를 우리는 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식과 기술이 귀한 자원이며 세상의 진보를 이끄는 시대를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왔다면 앞으로 세상의 변화의 속력을 결정하게 될 것은 주로 생각, 철학, 문화일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내적 변화가 오늘날 각별히 주목받아야만 하는 이유다.
21세기의 인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오늘날에는 기술변화의 주기가 인간의 수명보다 짧아지고 있다. 20세기이전까지는 농업중심의 사회가 공업중심의 사회로 바뀌는 것과 같은 개혁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대개 농부가 공장이나 회사로 가서 취직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개 부모는 농사를 지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도시로 가서 공장에서 일하고 회사에서 일한다는 뜻이었다. 농부가 회사원이 되는 변화, 그에 딸린 내적 변화와 생활방식의 변화는 대개 한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의 시간 스케일이 인간의 수명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농부로 태어나는 사람은 농부로 살다가 죽었고, 회사에 취직한 사람은 은퇴할 때까지 회사원으로 살다가 죽는 게 20세기까지의 인간의 삶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는 내적 변화의 중요성을 논할 필요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삶은 왜 사라졌는가? 이걸 생각해 보자. 1705년 영국의 발명가 토마스 뉴커먼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산업혁명을 18세기 후반에 만드는데에는 거의 백년이 걸렸다.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발전소를 처음 만든 것은 1882년의 일이지만 전기는 20세기 초반이나 되어서야 일반가정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에는 증기기관이나 철도나 전기가 다른 나라보다 20년쯤 늦게 보급된다는 것이 치명적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증기기관이나 철도나 전기에 반대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늙어서 죽고 그 자식부터 그것을 쓴다고 해도 기술의 보급속력을 생각했을 때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만든 가치관으로 평생을 살다가 죽을 수 있었다. 15세기나 10세기같은 더 옛날로 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20세기에 인터넷의 보급이 다른 나라보다 20년이 뒤졌다면 그것이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을까? 월드와이드웹 기술이 1980년대 후반에 나왔으니까 이 말은 그런 나라에서는 최근에 들어서야 홈페이지같은 것을 제대로 쓰기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나라보다 10년 인터넷의 대중화가 빨랐던 나라는 그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같은 미래의 기술들이 발달하는 지금부터의 21세기는 어떨까? 인공지능의 대중화가 20년이 아니라 10년만 뒤져도 그것이 만들어 내는 차이가 어느 정도일까?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그건 생산성이 100배쯤 차이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프로그래밍을 인공지능이 하는 나라와 여전히 인간이 하는 나라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22세기에는 그럼 어떤 세상이 될까? 이런 변화들을 지금의 인간이 감내할 수 있을까?
오늘날은 문화적 충격이 일상적이다. 오늘날에는 창의적이고 그런 문화적 개혁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대중이 절실하다. 그런 대중이 없을 때 기술은 대중화되지 못할 것이고 개혁은 보수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한없이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개혁을 감당한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그에 따른 내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도구의 사용은 사상적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주로 그것이 기술적으로 언제 가능해 질까라던가 완전한 자율주행이란 어떤 것인가에 신경을 쓰지만 그것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법규와 관행을 바꾸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기술적 발전보다 사회적 관행의 변화가 더 느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회적 합의가 자율주행 자동차가 언제 대중화될 것인가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무한히 완벽한 자율주행이란 불가능하고 결국은 그것을 사람들이 포용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자율주행 자동차라는게 대중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율주행자동차가 있어도 그 안에서 잠을 자는 운전자가 신고당하고 체포될 것이다.
자율주행이 보편화된다는 말은 택시운전사나 트럭운전사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이제는 4-50년의 주기로 오는게 아니라 20년정도의 주기로 온다. 사람들의 수명은 점점 늘어가는데 20년간 택시운전을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다른 훈련을 받아서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이런 일이 특정한 한두개의 직종에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의 속력과 폭이 20세기 이전과는 다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20년간 교육과정을 거친 후 10년정도 직업을 유지하는 세상에 살게 될까? 그 다음에는 완전히 새로운 걸 공부해야 하고? 그건 참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일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이런 변화내지 도전에 대한 생각 없이 그래도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는 점점 빨리 일어날거 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결국 사회적 진보의 속력을 제한하는 것이 기술개발쪽이 아니라 인간의 적응속력쪽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의 목적을 점검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데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무엇을 논하든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그것의 정의나 본질을 논하는 일은 필요한 것이고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출발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인공지능이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지, 인공지능이 가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지금 아무 문제가 없어서 이대로 살아도 좋고 인공지능 기술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에 대한 불필요한 위협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여긴다면 인공지능은 그런 기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기술이라는 것이 어떤 새로운 사회와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기술이며 우리가 그런 미래로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은 그런 미래로 가는 수단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래는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지 저절로 생겨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내부 세계 그 자체다. 새로운 시대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요구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유연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런 변화가 없이는 기술적 발전은 금새 한계에 도달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공부할 것을 그리고 더 창의적이 될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도구의 사용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해서 인공지능은 우리의 내적 세계에 2중으로 관여하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인이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어야한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수렵채집 생활을 버리고 문명사회를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숲에서 낡은 생활방식을 유지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있다. 수렵채집을 선택한 사람들은 결코 문명을 알 수 없다. 문명은 문자의 사용과 그로 인한 추상적 개념의 발달속에서 건설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도구를 쓰기를 거부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문명화의 길을 이미 걸은 사람들은 수렵채집인의 삶을 차차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물론 자신들의 외적인 변화는 알 수도 있고 제거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언어나 문명은 이미 깊게 내면화되어 있으므로 문명없는 상태의 자신이 누구인지를 문명인은 상상할 수 없다. 마치 언어를 잊어버린 내가 어떤 상태일까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미래는 기술적 발전이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인공지능은 도구이면서 도구가 아니다. 인공지능은 우리 내면의 일부가 될 것이다. 발달된 인공지능의 대중화는 커다란 내적인 변화를 요구하기에 반대로 말하면 인간의 내면을 바꾸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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