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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고전 읽기

젠 앤드 더 아트 오브 모터사이클 메인테넌스

by 격암(강국진) 2009. 7. 9.

선과 모터사이클 메인테넌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중의 하나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책이라고 불리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는 책이다. 이책은 로버트 프리지그가 1974년에 출판하였으며 한 남자가 아들과 그리고 친구부부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여행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소설이다. 소설은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기본적인 사실이 모두 진실인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이 책은 소설적 구조안에 철학적 논의를 담은 것으로 개인적으로 후반부의 시카고 대학철학과에 대한 부분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책을 부분부분 아주 여러번 다시 읽고는 했는데 소설부분과 철학적 묘사부분을 선택해서 읽었다.


이 소설의 이야기 부분은 정신적 안정감을 주는 묘한 효과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여행 그것도 오토바이 여행이라는 것이 주는 정서적 효과일거라고 생각된다. 지평선이 보일만큼의 광대한 땅을 자유롭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간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나는 꿈을 꾸게 된다. 내가 미국에 있을때 미국 횡단여행을 꼭해보고 싶었던 것도 이 소설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매우 다양하게 읽을수가 있다. 일단은 왜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소외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그것은 합리주의, 과학주의의 발전으로 인해 각 인간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합리주의에 항거하여 그들은 오토바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도 할수가 있다. 이것은 1960년대의 히피의 이미지를 그리게 만든다. 목적지에 대한 의무감없이 자유롭게 공기를 느끼며 떠나는 여행은 합리화와 계획과 목표따위에 지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토바이 정비에 대한 설명에 그의 친구는 질색을 하고 만다. 바로 그가 도망치려고 하는 기계, 합리주의 과학주의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오토바이 여행을 하는 주인공은 합리적 정신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터싸이클 정비를 설명하면서 논리적 추론과 구조적 해체의 방식에 대해 그리고 그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또하나의 차원인 낭만적 차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세계는 고전적 차원내지 이성적 기계적 차원 그리고 낭만적 차원내지 예술적, 감정적 차원의 두가지 차원으로 구분되어 이야기 되는 것이다. 목적의식없는 모터싸이클 여행은 바로 낭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행동이다. 회화나 음악이 낭만이다. 


이런 구분은 유럽 철학전통의 두가지 역사적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계몽주의고 또하나는 낭만주의다. 계몽주의는 17-8세기 유럽의 지적운동이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인간의 이성의 힘에 의존하여 세상을 개혁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당연히 뉴턴의 자연에 대한 수학적 묘사에 크게 영향받았으며 신과 인간,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에 있어 크게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 이전에 유럽사회가 인간사회를 신의 창조물로서 보았던 것에 비해 계몽주의는 이기적이고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상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서로 계약한 집단으로서 사회를 묘사했다. 이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에 대한 사상을 불러오고 프랑스와 미국에서 혁명을 불러 일으키는 근본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이상화와 합리성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에 의해 대체되고 만다, 낭만주의는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추구했다. 이는 이상화나 표준화로 잡을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있으며 인간의 구원과 위안등을 계몽주의가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사회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프리지그가 이책을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은 그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계몽주의나 낭만주의 시대의 인간들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리주의에 철저하지 못하고 계몽주의를 극복할수 없고 그 계몽주의를 넘어서 도달한 낭만주의가 아니라면 낭만주의도 철저한 것이 아닐것이다. 정신적 수준이나 깨달음은 결론만 비슷하게 들리면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고전적 측면과 낭만적 측면을 넘어 그가 도달한 것은 퀄리티 즉 지극한 선쯤으로 설명해야 하는 어떤 철학적 존재다. 그는 스스로 퀄리티가 뭔지는 정의할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자를 읽으며 퀄리티가 노자의 도와 완전히 합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의 할수 없는 퀄리티란 도가도 비상도 즉 도라할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는 이야기 였던 셈이다.


이 책의 부제는 가치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책은 한 인간이 세상의 일의 가치를 논하는데 있어서 그 기준을 탐구하는 지적 여행을 나서는 것의 기록이다. 그 가운데에 그의 개인사와 동서양의 철학이 깊이 있게 들리는 교훈적인 일화들과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여행기와 함께 등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지적인 무중력상태를 부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수도 있다. 동서양 모두에서 확실하게 생각되었던 현실이라는 것은 과학과 철학의 발전에 따라 분해되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들은 그것을 고의로 혹은 지적인 게으름으로 무시하고 있거나 무지한채 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이 보여주는 세계관이나 우주관은 아주 기괴한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논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논리는 허공에 뜬 것이다. 아직 인간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있는 윤리적 이론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영영 그런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뇌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인간의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은 기본부터 흔들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인간이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유전적 요인이라면 우리가 찬양하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의 의미란 어떤 것일까. 


박이문교수는 한 글에서 자신은 자신의 철학을 찾아 평생을 헤맸다고 말한다. 김형효교수도 철학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철학적 이력을 말하면서 자신 찾아헤맨 철학을 말한다. 공통점은 그들이 철학이라는 분야만을 전공했음에도 그들은 그런 목적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쉽고 당연한 질문앞에서 좌절하기 쉬운 시대를 살고 있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을 진지하고 치열하게 탐구하는 사람은 전부다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 질문의 답을 찾다가 한평생을 허비하게 된다. 삶을 살기위해 필요한 답을 위해 한평생이 허비되는 것이 인생의 허무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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