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15
신문도 그렇고 트위터도 그렇고 보면 참 시끄럽고 미움과 원망과 걱정이 넘쳐납니다. 귀를 막고 싶어질때가 많습니다. 그런가운데 누가 옳은가 누가 틀린가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는 문제는 누가 옳은가 누가 틀린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날마다 듭니다.
한국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누가 옳은가 틀린가가 아닙니다. 더 큰문제는 옳고 그른걸 구분할 기준도 없고 그 기준에 대한 고민도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두사람이 바둑판위에서 싸우고 있다고 해봅시다. 한사람은 오목을 두고 있고 한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몇수 안가서 반칙이 나옵니다. 바둑의 규칙으로 하자면 이게 반칙이고 오목의 규칙으로 하자면 저게 반칙이고 그런 것이죠.
이런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묻게 됩니다. 야 우리 지금 바둑두냐 오목두냐. 그러나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고 그런 질문을 고민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습관대로 삽니다. 그래서 옳은건 당연하다고들 보통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 그 습관이란게 자신을 강력히 위협하지 않는 경우에만 그렇죠. 어떤 관습이 자신의 삶을 위협한다싶으면 이건 말도 안된다면서 항의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또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생길수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하고 나태하게 습관대로 관습대로 삽니다.
그런가운데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하는 많은 주장이 나오고 그런 주장들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채 미움만 양산합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일을 설명하는 제일 쉬운 방법중의 하나가 세상을 둘로 갈라서 저쪽인간들은 인간같지 않은 것들이라 반칙을 일삼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이 이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불편과 원망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따지고 여러가지 잡음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며 어떻게 고칠수가 없는 것이라는 지적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맞습니다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글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제가 지적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정의가 뭔지, 옳고 그른것이 뭔지, 공평한게 뭔지, 윤리가 뭔지 하는 것은 어떤 공동체를 정의하는 테두리를 인식하지 않으면 결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직장나가는 사람과 일 안하는 사람 모두 똑같은 월급을 받는다고 하면 공평하다고 할 사람이 없겠죠. 여기서도 일하는 사람과 일 안하는 사람이라는 테두리를 치는 겁니다. 그 테두리를 치면 각각의 영역에서 차이가 발생해도 공평한게 되는 것이죠. 서로 다르니까 같으면 오히려 불공평하다는 것이죠.
한국 사회에서 인권문제 복지문제등 생각할수 있는 모든 문제는 전부 이 테두리의 문제로 환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지문제도 결국은 한국 사람과 한국 사람이 아닌 사람이라는 테두리 즉 한국사회라는 공동체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 없으면 답이 안나옵니다.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이 굶어죽어도 내버려두고 자기만 과식하고 비만에 걸리는 아버지가 있다고 해봅시다. 그럼 사람들은 그 아버지를 죽일놈이라고 야단하겠죠. 그런데 이디오피아나 우간다에서 아이가 굶어죽어가는데 한국 사람중에 비만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그런 한국사람은 죽일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습니까.
권한과 의무는 전부 공동체라는 테두리를 어떻게 치는가에 따라 발생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당연히 아버지와 같은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들이 이러저러한 의무를 진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아버지도 아들에게 이러저러한 의무와 권한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기 굶어죽어가는 한국 사람이 있습니다. 그사람이 죽던 말던 우리가 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합니까. 이 지구에는 굶어죽어가는 사람 어차피 무수히 많고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를 똑같이 돕겠다고 한다면 결국 누가 죽는거 내가 무슨 책임이냐고 말하게 됩니다.
국가적 차원의 복지란 결국 한국 사회, 한국문화권의 사람들이 서로 운명적 공동체로서 한몸이라고 느끼는, 그런 테두리를 인식할때만이 정당화 됩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올만한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이런 지극히 당연한 인식처럼 한국 사회에서 흐려져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기본은 망각하고 전부 응용문제의 답만 달달 외운것 같은 상황이랄까요.
요즘 시위하는 여성들 경찰이 브래지어 벗겼다고 사람들이 흥분하는데 그것도 결국은 테두리의 문제인겁니다. 흥분하는 사람들은 그 여성들을 그냥 일반시민으로 인식합니다. 그들을 흉악범이나 정신이상자와 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무신경한 경찰들은 세상을 둘로 보는 겁니다. 재소자와 비 재소자. 재소자중에는 유치장에서 브래지어로 목매달아 자살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브래지어를 재소자로 부터 압수하는것은 옳다. 이런 논리인겁니다. 재소자에게서 브래지어를 압수해야 되는가 마는가를 가지고 논리를 펴는 것은 이미 늦은 겁니다. 문제는 사람들을 흑백처럼 재소자와 비재소자로 단순히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문제로 돌아가면 결국 한국 사회에서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테두리와 구분을 너무 무신경하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때로는 어떤 윤리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어떤 테두리, 구분을 하는 것을 무력화 시키는 논리를 사방에서 가져와서 고의적으로 그 테두리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주로 단순한 배운거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테두리, 공동체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은 그 테두리를 문란하게 만드는 방법을 쓰는 경향이 있지만 실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지 몰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방법들을 통해 결국 무신경하고 이기적이게 삽니다.
무신경하고 이기적이며 사람들마다 자기 멋대로 사는데 싸움이 나지 않을리 없고 원망과 미움이 없을리가 없지요. 이건 교통법규가 없는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동차가 우측통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좌측통행하는게 당연하다고 맘대로 주장하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금 같은 테두리를 같은 정도로 인식하면서 대화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하지 않으면 금방 욕나오는 상황이 나옵니다. 한쪽 사람은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강하게 인식해서 그안에서 의무와 권한을 강하게 느끼는데 다른 사람은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느끼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그런 두사람이 대화를 하면 금방 욕지거리가 나오고 싸움이 납니다. 부모가 뭔데. 뭐 나한테 해준거 있어 이런 언사를 들으면 가족적 질서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심각한 윤리적 위협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죠.
나는 여기서 어떤 테두리가 절대적이고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 정의를 이야기하자면 먼저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를 인식하는 것을 먼저 시작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당연한 점을 다시 지적해야 겠습니다. 그러자면 그것은 한국사회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로 나가지만 그런 이야기는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는 것같습니다.
사회적 정의를 이야기하자면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백번쯤 외우고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입니다. 신뢰는 논리로 이뤄지는게 아닙니다. 공동체로 서로를 인식하는 것이죠. 미움과 원망은 신뢰를 깹니다. 그렇게 해서 논리적으로 누가 옳은지 틀린지 따져 누가 이긴다고 한들 사회적 신뢰가 사라지면 그 사회는 그냥 망하는겁니다. 신뢰가 없다는 것은 공동체로 인식안한다는 것이고 공동체라는 테두리가 없다는 것은 윤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윤리가 없는데 옳고그른게 어디있습니까. 논리로 옳고 그른걸 결정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지금 소위 좌던 우던 이런 저런 돈쓰는 이야기 많이 합니다. 그런데 그 자원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어떻게 그돈을 갚을건지 주인의식을 가지고 고민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것같습니다.
빚내면 나중에 미래세대가 갚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이 아닙니다. 우파가 50조쯤 막 쓰는데 우리도 많이 안쓰고 10조만 쓰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주인정신이 아닙니다. 환경을 파괴해서 돈을 벌면 지금 당장은 어쩔지 몰라도 나중에는 특히 미래세대가 고생할텐데 그러던 말던 내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이 아니죠.
등록금 받아서 떼돈벌면 좋지만 그덕에 젊은 사람들이 빚에 시달려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공동체 정신이 아닌것이죠. 거기다가 물론 일본등록금이 얼마니 미국등록금이 얼마니 하는 비교를 할수도 있지만 사실 그런 숫자는 부차적인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절은 세대전체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건 해결방법이 나올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이쪽을 막으면 저쪽이 뚫리는 식으로 결국 젊은 세대는 수탈당하고 말것입니다. 논리와 숫자는 어차피 한계가 명확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사회적 융합력, 사회적 정체성의 문제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정말 거의 거의 들리지 않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지금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음 대선에서 누가 이기는가가 정의를 이뤄낼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문제가 훨씬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문제를 강조하는 목소리는 진보, 보수 양쪽 모두에서 듣기 힘듭니다. 진보 보수 전부다라고는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이 모두 테두리를 없애는 쪽에 진력합니다. 테두리는 분명 억압의 근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윤리의 기초인것입니다. 테두리를 다없애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고 나면 남는 것은 남생각은 전혀 안하는 이기주의자들이 넘쳐나는 지옥이기 쉽상입니다.
이문제는 워낙 많은 예를 들수 있습니다만 부동산 문제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조치를 취하거나 저런 조치를 취하면 부동산 문제 쉽게 해결할수 있다고 말합니다. 뭐 이렇게 하면 등록금이 반값이 될수 있을텐데 안한다. 안하는 사람은 역시 나쁜 자본의 하수인 뭐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비판도 경우에 따라 일정부분 옳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결국 어떤 법이나 조치로 부동산을 잡을수 있다는 것은
환상입니다. 너무 강력한 법은 결국 어떤 다른곳에서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불공평을 가져옵니다.
신자유주의를 욕하는 진보주의자가 어떤 법이나 조치로 좋은 사회가 올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앞뒤가 안맞는 것입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길게 말하는 것은 결국 어떤 규칙을 정하면 좋은 세상이 저절로 이뤄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자유시장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규칙이 전혀 안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그 규칙이상으로 사람들의 공동체정신, 윤리적 행동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중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규칙을 바꾸면 저절로 세상이 좋아진다고 말하고 윤리와 공동체정신의 부분을 너무나 간단하고 쉽고 부차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실은 반대입니다. 그것이 가장어렵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말싸움을 잔뜩 벌이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그결과 싸움이 미움을 만들고 결국 다 썩을 놈밖에 없는데 나혼자 착하게 살아봐야 손해다는 식의 불신만 퍼뜨립니다.
윤리나 옳고 그른것은 절대 당연한게 아닙니다. 사회적 정의를 논하고 싶으면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이 모두 깨어있는 철학자수준의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면 한국사회라는 테두리를 소중히하고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게임의 법칙, 옳고 틀린 기준이 서기 시작하고 답이 도출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둑두고 있는데 체스판에서 보고 배운걸로 훈수두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혼란만 생기는 것이죠.
오늘도 트위터며 신문방송에는 분란과 미움의 전도사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누굴 비판한다고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과연 얼마나 옳고 그른것의 근본에 대해 고민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싸구려 이데올로기로 확신에 차있는 사람들이 절대 세상 좋게 못만듭니다. 우리 동네에 주인의식과 애착을 가지고 휴지 한장 줍는 사람이 우리 사회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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