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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자유주의는 왜 마음주의가 아닌가.

by 격암(강국진) 2011. 1. 17.

11.11.7

인기도 없는 주제라 쓰기가 좀 껄끄럽습니다만 그래도 중요한 주제라 다시 몇 자 씁니다. 저는 결코 이름도 촌스럽게 들리는 마음주의라는 것을 내밀고 이것이 만병통치약이며 신기한 신무기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무슨 무슨 주의란 결국 이데올로기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강조하고 추구하는 시스템이 됩니다. 시스템은 그것이 어떤 것이던간에 그것 만으로는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주의라는것이 뭐든지간에 사실은 시작부터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마음주의 하나로 낙원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마음주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는가. 그것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자유주의가 낡고 오래되어 이제 덕지 덕지 관습, 관행, 선입견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부관계라고 하면 그저 시어머니와 며느리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고부간의 갈등을 그리는 드라마가 세상에서 계속 반복되면 늘상 고부간의 관계란 본래 이렇다는 식의 선입견이 생깁니다. 계모는 항상 전처의 소생들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도 그런일을 하지요. 

 

우리가 만약 자유의 소중함을 말하는 자유주의에서 시작하여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래서 자유주의의 기본적 논리를 초극하고 자유주의적 논의를 그저 하나의 도구로 써먹을 수 있다면 마음주의따위는 필요없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는 마음주의 역시 과연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서 초극되어져야 하는 고정된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자유에 대한 선입견이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자유의 효용성, 자유의 윤리성,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그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웅성웅성거립니다.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자유주의의 초극같은 이야기를 하면 턱없는 이야기로 들리거나 초극할 것이 없다고 들리거나 어떤 소중한 것을 파괴하는 신성모독적 행위로 들립니다. 뭐뭐뭐는 당연한 것아냐?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빵주의는 이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빵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물주의는 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란 자유의 윤리성, 자유의 가치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결국 더 많은 자유를 획득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자유롭게 살 때 이상적인 사회가 온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중세적 신학적 압제속에서 중요하고 좋은 것은 신에 의해서 정해져 있다는 분위기를 깨고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자유가 있으며 자유가 많은 쪽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으로 나갔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물이없어 목말라죽어가는 사람에게 물이 가장 소중하다, 물을 어떻게 구해야 할 것인가를 논하는 물주의가 가장 설득력있게 들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세적 질서가 고착화되었던 시기에 자유를 갈망하던 서양사람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가장 설득력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연원도 중요합니다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주의가 어떤 질문을 우리게 던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주의는 왜 우리는 물이 없는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유주의는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마음주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은 일정정도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너무 오래 던질때 당신은 오히려 그 질문에 속박당합니다. 

 

우리는 왜 자유롭지 못한가라는 질문은 본래 우리는 자유로웠고 자유로워야 마땅하다는 가정을 자연스레 도입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경제적 사회적 자유를 논하게 됩니다. 인종차별을 깨고 사회적 계급차별을 깨고 나이로 인한 차별, 돈으로 인한 차별을 깨고 평등을 논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나하나의 자유를 막는 속박에 집중하면서 하나하나 더 많은 관행과 가정이 쌓여갑니다. 

 

경제적 자유에 집중하다보면 사회적 자유에 집중하다보면 그런 질문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제적 자유에 집중하면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평등한 부의 분배가 가장 핵심적 문제라는 생각에 빠집니다. 성적억압으로부터의 자유에 집중하면 남자와 여자간의 차이는 어떤 것이든 인정할 수 없으며 여성이 남성과 똑같아 지는 것이 이상적 상태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게 아니라고하는 사람이 있으면 벌컥화를 내기 쉬워집니다. 애초에 남자와 똑같은 여자가 될 의사가 없던 여자가 화를 내고 애초에 남이 많이 가진 돈따위 별 소용도 없게 느끼던 사람이 똑같이 나누는 일에 몰두하고 싸움이 납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피와 희생으로 이룩한 성과가 쌓여갈수록 오히려 집착은 강해지고 본래의 단순한 질문 즉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오히려 퇴색됩니다. 이제 자유란 말은 너무 낡은 말이 되버리고 만 것입니다. 

 

자유라는 말에 취해서 이 단어를 보고있으면 이 단어가 절대적 진리인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물론 많은 다른 아름다운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이나 공동체라는 말도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말들은 말들로서 다 한계가 있으며 어느정도 상호 모순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장 자유로운 인간의 사랑이란 도대체 무슨말일까요?  자유주의에 심취해서 가정을 자유의 이상으로 채운 집은 정말 사랑으로 넘쳐날수 있을까요?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부모의 소중한 자유를 없애는 것이 아닐까요? 가사일을 하는 것은 비록 그 일이 실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 기쁘게 할 수 있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유를 빼앗아간다는 측면에서 동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의 직업을 존중하고 사회생활을 가질 수 있는 자유를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어떤 부부는 자유를 사랑한 나머지 각자 휴가도 따로 가고 경제적으로도 둘로 나뉘어 각자 돈을 각자씁니다. 아이에게 조언을 하는 것도 아이의 자유를 빼앗은 일로 생각되어 실질적으로는 아이를 방치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게 이상적 인 것일까요? 가사일을 동등하게 분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를 가지지 않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에 매몰되어 뭔가가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되고 싶어서 이 나라에서는 대통령이란 화장실청소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고 해도 기꺼이 대통령이 되고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남들이 자기를 대통령이라고 부를 때마다 기뻐하는 그런 바보 꼴이 되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주의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도대체 뭐였던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왜 어떤 것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서로 최대한 서로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도록 서로 돕는것이 윤리적이란 주장을 합니다. 우리가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 때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란 주장을 합니다. 자유를 극대화하는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을,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것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마음주의역시 시간에 따라 고정되고 관습화되어 낡아져갈것입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만큼은 아닙니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마음주의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주의는 자유주의가 낳은 가장 큰 해독중 하나인 무한경쟁의 사회를 어느 정도 해소합니다. 만약 법관이 되고 싶은 사람이 많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도대체 왜 법관이 되고 싶은지. 돈을 잘 벌기때문이라면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법률서비스를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기뻐서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사람들이 법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고의 경쟁구도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골라내는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이 법관으로 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 그래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노력하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마음주의의 현실적 적용은 따로 총론이 아닌 각론에서 고민해야 할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적어도 자유주의에 관한한 진정한 발전은 각론이 아니라 총론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유주의적 기본 아이디어를 긍정하면서 여러 문제를 바라보는한 각론에서 아무리 발전을 기도해도 별 득도 안되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복지의 수준이 어디가 적절한가하는 논의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본적 가치를 확고히 하지 못한채 복지를 논하면 결국 OECD평균이 어떻다는둥 유럽의 나라는 어떻고 미국이나 일본은 어떻다는 둥 하는 남의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남의 이야기는 항상 남의 이야기입니다. 역사 경제 사회적 차이가 존재하므로 항상 말싸움만 할뿐입니다. 주체적으로 자기가치판단이 없는데 무슨 결단이 날것이며 공감대가 확산되겠습니까. 항상 반대자들은 어떤 다른 통계, 어떤 다른예들을 가지고 와서 논의를 진흙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한국이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치적 자기기준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이 한 축으로 중요한 것은 애초에 서양에 연원을 둔 자유주의적 사고에 대한 깊이 있는 극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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