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11
이 세상에 한순간이라도 존재했던 것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삶의 불확실성이다. 우리는 결국 불확실성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뭐하나 확실한 것을 찾아내고자 위험을 회피하고자 확실한 것을 찾아헤매지만 이것 역시 모순적 위험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는 생명이란 결국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속되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확실성때문에 생명은 죽지만 불확실성때문에 생명은 태어나고 존재를 유지한다.
인력거를 끄는 남자가 손님을 태운 인력거를 끄는게 힘들었다. 획기적으로 손님 혼자서 조종하는 자동차가 개발된다면 이사람은 기뻐해야 할까. 자동차는 인력거 끄는 사람이라는 직업을 없애버린다. 그는 이제 실직자가 된다.
생명이란 여러가지 형태로 삶의 불확실성과 싸운다. 지렁이는 지렁이의 방식이 있고 게는 게의 방식이 있으며 인간은 인간의 방식이 있다. 우리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또하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때문에 그것을 지워버리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때로 우리 자신의 존재 이유자체를 지우고 우리 자신을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사랑이니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것도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만 생각해 봐도 이것을 알수가 있다. 온세상의 돈을 다가지고 있어도 자유가 없다면 그가 돈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돈이 그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작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 사람은 겉으로 어떤 것처럼 보이든 삶은 아주 비참하게만 지속되는 것일수 있다.
인간의 길
간디는 아프리카에서 인권문제로 투쟁하다가 인도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서 자리를 잡고 뭔가 더 크게 시작해 보려고 하는 순간 그는 그가 준비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야만 했다. 돌아오면서 약속하기를 아프리카에서 부르면 언제든 바로 아프리카로 귀국하겠노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귀국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삶으로 뛰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우선 그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것, 또하나 자신은 불확실한 삶에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정도의 문제이기는 하겠으나 인간의 길이란 결국 더 많이 느끼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큰 뜻과 더 큰 질서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길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지구반대편에서 죽은 한 아이의 삶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런 것이 인간의 길이랄까.
사실 좁디 좁은 작은 마을에 태어나서 그 마을을 전부로 알고 바깥 세상에서 누가 죽던 말던 내알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에 어떤 잘못은 없다. 내 아들만 내딸만 배부르게 산다면 그걸로 좋으며 내 자식의 손톱끝에 상처를 내느니 다른 사람 수백 수천명이 죽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사는 것도 어떤 문맥에서는 잘못은 없다. 지금도 정도문제로 우리는 그러고 있다. 부자나라사람들이 쓰는 많은 상품들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피땀이 서린 것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의 결과를 감수해야할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감각하다면 다른 사람도 내 아픔에 무감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냐 이전에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냐하는 것이 먼저다. 인간의 기질을 가진 존재는 결국 자기 합리화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 마음밑의 어떤 소리때문에 행복하지가 않다. 숨겨진 기억이 그 사람을 비틀리고 불행한 인간으로 만든다. 뭔가를 숨겨놓고 만들어 낸 세상은 항상 붕괴하겠다고 삐걱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나는 내 자식빼고는 이세상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자식들은 어떨까. 자식들도 세상과 연결점이 없이 살수 있을까? 그런 사랑이 자식들을 행복하게 할까. 결국 누구도 완전히 닫힌 생태계를 만들어 그안의 왕으로 영원히 살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좀더 오래 살고 어떤 사람들은 당장 파국을 맞는다. 더구나 그안에서 행복하냐 하는 것은 또 완전히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다. 세상의 누구보다 돈이 많고 그걸로 거대한 자기 세계를 꾸민다고 한들 불행한 남편이요 불행한 아버지인 사람이 되는 것을 피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반면에 스스로가 만든 세계가 스스로의 감옥이 되기는 쉬운 일이다.
지식인의 고민
인간의 길과 비슷한 것이 지식인의 길이다. 지식인은 때때로 쓸데없는 것을 잔뜩 알아서 고민만 많은 사람이 되기 쉽다. 특히 그저 부스러기 지식을 끌어모아 자랑하기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진정한 지식인은 그렇다. 이 세상 전부에 비교하면 자신은 그야말로 한방울의 물같은 작은 존재인데 이 세상 고민이란 고민은 혼자서 다하고 있는 사람이 행복하기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는게 병이라고 하지 않던가. 무식한 부모들은 자식들을 거칠게 키우면서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부모는 노력하면서도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선택한 자녀교육의 방식과 적용에 대해 미안해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데 보다 더 높이서 보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의 눈에는 너무도 많은 불확실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아이를 사랑하는 일도 쉽지 않은데 어떤 인간이 감히 전국민을 사랑한다던가 전세계 인류를 사랑한다던가 온세계의 모든 생명과 존재를 다 사랑하겠다고 나서면 불쌍하기 짝이 없는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럼 그렇게 골치 아프게 살지 말고 보다 작게 보다 눈앞에 있는것만 보고 살면되지 않는가라고 말할수 있다. 그말도 일정부분 옳다. 그렇지만 그말은 결국 틀리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다. 삶의 방식은 골치아프고 힘들다고 버리고 할수 있는게 아니다. 자신의 존재의미, 삶의 의미가 그안에 있으며 고통도 그렇지만 행복도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인간에게 뭐하러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불안하게 사나 나처럼 땅에 머리박고 살면 되지. 이 세상 자기들 맘대로 흘러가게 나두고 나와함께 변하지 않고 안락한 곳에서 흙이나 파면서 단순하게 살자고한다고 해서 인간이 당장 지렁이의 삶으로 뛰어들수 있는게 아니다. 사랑하는 연인의 일때문에 희노애락을 겪는 사람에게 뭐하러 그렇게 고민하나 다 잊어버리고 혼자살아라고 한다고 해서 그래 혼자살자라고 하는게 답이 될수 있을까? 그럼 행복할까. 사슴은 내일 총에 맞아 죽어도 숲에서 뛰면서 사는게 행복하지 동물원에서 갇혀있는게 행복하지 않을수 있다. 힘들고 불안하고 삶의 불확실성이 지긋지긋해도 우리는 쉽사리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지 못하는데 그것은 게으르고 보수적인 기질때문일수도 있지만 분명 어떤 경우는 스스로 마음 깊숙히에서 그렇게 했을때 결국 행복하지 못할것을 알기 때문인 것이다. 미친짓이고 어리석은 짓이라도 그렇게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더 단순해 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때 인간의 길, 지식인의 길에서 택할수 있는 것은 더 앞으로 전진해서 스스로가 할수 있는 만큼 더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일 것이다. 그 모든 혼란한 지식을 한개의 생각으로 꽤뚫는 것일 것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것은 천명이고 삶의 의미고 종교이며 이데올로기다.
빅터 플란클은 그의 로고세라피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가 존재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내부적 공허감과 존재적 진공상태에 의해 고통당한다. 그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소화하지 못하고 거기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가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빅터 플란클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방법중에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인생의 행복을 찾기 위한 재료다. 즉 우리는 우리의 고통의 이유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 고통도 없다면 우리의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기 쉽다.
인간의 길, 지식인의 길은 이것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란 천명이고 자신이 응당행해야 하는 일이며 내면의 목소리이다. 공자는 적들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자 하늘이 나를 죽게 할리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는 자기가 행해야할 천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지속하는 방식이란 결국 자신과 이어진 천명과의 끈을 놓치지 않는 것일 것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을 책임지는 길일 것이다.
맺는 말
쓰다보니 거창해졌다. 본래 거창한 문제라서 그렇다. 그러나 작은 일들도 사실은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게 사실은 내 자식하나 잘 키우는 일일수도 있고 동네에 꽃밭을 잘가꾸는 일일수도 있으며 글하나 책하나 쓰는 것일수 있다. 그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잘하고 따뜻한 얼굴을 보여주는 일일수도 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우리 중의 극소수만 왕으로 태어나 왕의 역할을 한다. 광대나 거지의 역할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것을 하찮은 것으로만 여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자신이 해야한다고 느끼는 것을 하는 것이지 누구에게 뻐기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세상의 빛을 받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이렇다할 역사의 한페이지로 기록되거나 주목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변하고 지탱되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복한 삶을 지속할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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