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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3. 8. 23.

2013.8.23.
나는 누구인가라던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이 결국 자기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할 것이고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 할것이고 학자면 학자로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며 한 가족의 일원이면 그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 정체성이란게 일반적으로 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은 하나의 인식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누구인지를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한 끝에 우리가 세상에서 찾아낸 어떤 것입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란 우리의 선택과 존재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하나의 객관적 사실 아니라 우리가 찾아내려는 노력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역사를 예로 들어봅시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요즘 거의 없습니다. 역사가 허구고 소설인 것은 아니지만 무수히 존재하는 사실들을 어떤 역사를 보는 눈 즉 사관과 입장에 근거해서 연관짓고 나열하는 작업이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선시대를 말할 때 조선시대의 왕의 생활에 대해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징기스칸의 영화에 사실만을 담아도 징기스칸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면 우리는 징기스칸의 입장에서만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징기스칸 시대에 몽고병에게 침략당했던 나라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 때 그 이야기는 다르게 들립니다. 역시 사실만을 나열해도 그렇습니다. 결국 사실의 양은 무한합니다. 게다가 사실은 사실 그대로 재현 불가능합니다. 같은 징기스칸 영화라도 주연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징기스칸은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과거의 일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일을 관찰하는 우리가 또한 그 시대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현대의 시점으로만 보는 것을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그는 독재자이고 무지한 사람이며 비평등주의자라고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당세의 눈으로 보는 것은 그럼 가능한가. 그것도 안되죠. 이렇게 관찰자의 태도에 따라 의미가 흔들리는데 사실 그대로라면서 아주 작은 것을 다 현실적으로 재현해도 그것만으로 우리가 사실로서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전체적 사실이 아니라 부분적 사실만 보게 되는 것이죠. 

이제 다시 우리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던가 대한민국이라던가 하는 것으로 돌아와서 정체성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는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앞에서 그냥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말했지만 정체성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우리는 적어도 한가지 점을 추가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그 대상에 대한 간단한 인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간단한 인식이 없을 때 우리는 행동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수학에 등장하는 개념처럼 이러저러한 정의를 알면 그것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사과한알에도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으며 미래가 있습니다. 그 사과는 누군가가 먹을 수 있고 썩어서 거름이 될지도 모르며 혹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서 독재자의 얼굴을 향해 던져지는 무기로 쓰일지도 모릅니다. 그 사과는 그 사과를 만들어 낸 나무가 있고 그 나무가 서있는 땅이 있으며 그 나무를 심고 키웠던 사람도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사과는 가장 인기좋은 여자 배우가 키스했던 사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한한 사실들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과는 실상 다른 모든 사과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정확히 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없고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슈퍼에서 사과를 팔자면 등급정해서 같은 등급에 같은 지역에서 난 사과는 한 알에 얼마 하는 식으로 정하기 마련입니다. 이럴때 사과는 단순화됩니다. 같은 박스안의 사과는 정확히 서로 같은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그 사과의 정체성을 아주 간단히 정해 준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사과를 인식합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상 우리가 더 애착을 가지는 상대에 대해서 더 길고 복잡한 인식을 합니다만 그래도 그것 역시 무한대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만하다가 굶어죽는 사람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어떤 의미에서 결국 우리는 사물을 모르고 우리 자신도 모릅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고 에너지도 시간도 유한하니까요.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알 때까지 기다렸다가 행동하겠다는 것으로는 굶어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인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인식의 결과는 간단한 설명입니다. 이게 세상이고 이게 나라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것이 사실 그자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역사가 그러하듯이 우리가 가진 관점에 의해 선택된 정보로 만들어진 세계이고 나입니다. 

여기 중요한 문제가 또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은 그럼 무엇이 만들어 낼까요. 우리의 행동, 우리의 정체성이 만들어 냅니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이 되는 것이죠.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의 관점을 만들고 우리의 관점이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냅니다. 

정체성의 문제는 개인의 차원에서 사회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러가지 측면에서 여러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요즘 한국에는 다문화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최소한 몇몇사람들은 이러한 정책이 한국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기감을 느낍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앞장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대개 평등이나 보편주의에 입각해서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무력화 시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가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이민을 받아야 하는가. 사람들은 흔히 이 질문이 객관적인 정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 질문은 마치 나이가 찼으니까 결혼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처럼 그건 당신이 뭘 원하는가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지는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객관성과 주관성. 그것이 큰 문제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주관적 문제를 객관적 문제로 착각하고 내 눈에 이렇게 보이니 나는 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정체성의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세상과 나를 보는 것인데 대부분은 그걸 그저 과학적 사실의 관찰쯤으로만 생각합니다. 즉 내가 뭘 '보니까' 이렇더라, 그건 이거 아니냐. 나는 사실을 관찰했다. 나라는, 사회는, 계층은, 인간은, 본래 이러저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이런 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다문화정책 같은 것에 대해서 같은 세상을 사는데 보는게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안에서 파시즘이나 히틀러를 봅니다. 너는 국수주의적으로 외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해야 한다라고 믿는구나. 사람이 그럼 안되지. 이런식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는 한국의 정체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지나간 일이 뭐가 중요하냐면서 가볍게무시하고 요즘 한국어보다 영어쓰거나 중국어 쓰는게 대세다라면서 외국어를 적극적으로 권장합니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라고 믿는가에 따라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킬 것입니다. 자신을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어떤 자리를 얻고 유명세를 얻으면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하는 독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한다면 부자가 되건 유명해지건 그건 다 허무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땅히 세상에 대해 뭔가를 알다가 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껍데기에 신경쓰는 대신에 알몸으로서의 자기자신에게 너는 그래서 뭐를 알게 되었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관점은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우리의 정체성에서 만들어 지기 때문에 그 순환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일이 많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인다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실을 보고 있다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때로 적어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합니다. 

이상한 인형모으기에 광분하는 오타쿠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저렇게 돈과 시간을 낭비하다니 인간으로 태어난게 아깝다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문제는 당신은 오타쿠가 아닌가하는 점입니다. 결국 그게 중요한 것이죠. 당신은 변태이고 어리석은 집착에 빠진 인간이 아니라서 다른 오타쿠를 찡그린 얼굴로 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출세오타쿠나 권력오타쿠, 사랑오타쿠나 잘난체 오타쿠인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뭐에 목숨을 걸고 인생을 다 써버리고 있습니까. 

배운 사람은 특히 요즘 세상에서 한국에서 교육받았다는 사람들은 대개 주입식으로 남의 이야기를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감당이 안될정도의 지식체계를 머리속에 덕지덕지 넣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입니다. 남의 말에 의존해서 삽니다. 남의말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걸 내 시각으로 소화하는가 아니면 그냥 권위주의적으로 외웠는가는 다르지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는 퀴즈 풀기 대회처럼 그저 남의 말을 많이 외워대면 학식이 높고 많이 배운 사람으로 인기를 얻습니다. 한마디를 듣고 그걸 오랫동안 생각하고 외우고 뜻을 생각하는 공부가 아니라 수천마디의 말을 들어서 그걸 줄줄이 외우는데 주력합니다. 

그렇게 잘못 배운, '배운' 사람들은 특정한 시각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들은 오히려 못배운 사람들보다 장님일수 있습니다. 자기 눈에 너무나 생생하게 세상이 그렇게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보는 것이 사실이라고 확신합니다만 그들은 스스로 감옥에 빠진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깊어서 탈출이 불가능할 정도의 감옥인데 자기가 거기에 빠진 것도 부족해서 열광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감옥으로 초대합니다. 

개인이 선택할 문제이니 결국 학교 안가면 현명해진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학교가면 현명해진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만 학교는 초등학교밖에 가지 않았어도 현명하신 분들은 있을 수 있습니다. 박사를 받은 멍청이들은 확실히 세상에 많습니다. 

나와 세상을 쳐다볼때 이런 점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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