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6
한국에는 교육에 대한 몇가지 (몇가지만 있겠는가만은) 모순적인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는 공부 공부 하면서 학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학원에 다니며 소위 선행학습이란것을 한다. 그런데 정작 대학에 그렇게 들어가는 학생들의 학력은 날로 떨어진다고 교수들은 불평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입시공부를 잘했던 사람의 말보다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 종종 더 입시의 전문가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부인보다 훨씬 좋은 대학을 나온 가정을 많이 알고있다. 그런데 요즘은 그때와 다르다면서 부인들이 대학입시의 온전한 전문가 역할을 하며 남편들은 거의 발언권도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나름대로 각자 확고한 세상에 대한 이론을 가지고 있으며 거의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좋은 방법을 남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진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진실은 우리가 얼마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우리 앞의 문제를 보는가 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초등학생인 아이가 가방을 제대로 챙겨가지 않고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곤란을 겪거나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는 일이 생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부모는 가방을 대신 챙겨주고 숙제를 확인해 주고 하는 일을 하게되고는 하는데 여기에도 적당선이 있으며 모순이 있다. 부모가 모든걸 챙겨주면 아이는 자기것을 챙기는 연습을 하지도 못할뿐만 아니라 다급해하는 부모를 보면서 그일들이 자신의 일이라기보다는 부모의 일처럼 생각하게 되는 버릇을 가진다. 공부하면 게임기사줄께 라는식의 관행은 아이들로 하여금 게임기 안사주면 나공부안해라는 말을 하기 쉽게 만든다.
교육의 목적이 만약 가방을 잘싸가는 것에 있다면 부모는 가방을 대신 싸줌으로써 아이가 교육과정을 마치게 해줄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기 때문에 아이는 실패하는게 필요하고 부모는 답답하고 속이 상하지만 아이가 잘못하고 혼도나고 망신도 당하는 것을 어느정도 참고 두고보는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아이는 다음 단계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을 배울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버려둘수는 없지만 어느정도는 실패하고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것이 어느정도가 적당한 수준일 것인가하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다. 시련은 아이를 망가뜨리지 않으면 더 강하게 한다. 어느정도가 적당한가하는것은 일반론적이고 객관적인 답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그 아이의 현재상태를 파악하는 것에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똑같은 질문은 무수히 많은 것에 던져질수 있다. 교육의 목적은 유치원공부를 잘하는것도 초등학교 성적을 잘받는것도 심지어 대학입시에서 성공하는것 조차도 아니다. 그런데 대학입시 같은 나중 일은 둘째치고라도 부모들은 유치원수준에서부터 실패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유치원에서 알파벳을 배우면 마치 알파벳을 배우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요 인생의 목적인것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매단계에서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은 이런 문맥에서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이는 매우 단기적인 목적을 위해 너무 몰입해서 자신의 재능을 찾고 교육과정에서 진정 배워야할 것을 배우지 못하게 된다. 아인쉬타인에게 체육과정에 몰입해서 이걸 못해내면 네 인생은 끝이야 하는식으로 교육을 시켰더라면 아인쉬타인은 일찌감치 나는 틀렸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실제로 나는 실패와 패배에 매우 취약한 인간상들을 요즘 아이들에게서 본다. 아이들은 너무 일찍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신비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좌절도 빠르다. 이건 이거고 나는 이랬으니까 끝이다라는 식이다. 한번의 실패로 인생은 끝난거라고 좌절하며 자살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짧게 보는교육을 이야기하자면 학원 이야기가 생각난다. 세상에는 학원이 많다. 그런데 학원이 뭘까를 생각해보자. 자동차 세일즈맨은 자동차가 없이는 인생은 온전해 질수없다고 말할것이다. 주방용 칼을 파는 사람은 요리실력의 대부분은 칼에서 결정된다고 말할것이다. 학원이란 일단 세분화된 교육기관이다. 즉 초등학생용 학원이 있고 중학생용, 고등학생용이 따로 있으며 실은 과목마다 다 다르게 세분화되어있다. 세분화된 교육기관은 교육의 목적은 극히 단기적인데 있다거나 어떤 특정화된 것에 있다고 말하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학원은 초등학생의 시험성적을 올리는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일단 소비자인 부모가 그걸 원한다. 그러니까 특별히 권위를 가진 경우가 아니라면 단기적으로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 시장에서 퇴출당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확고하게 거짓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정부분 보험사직원이 세상의 위험을 과장하는것같은 거짓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교육이란 항상 단기적 목표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교육이다.예를 들어 시험점수가 급하면 본래 실력을 늘리기보다 남이 잘뽑아준 예상문제로 공부하고 시험보는 요령만 키우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길게봐서 옳은 길이라고만 할수 없다. 나는 어떤 학원선생은 자신은 학원의 진실을 알기 때문에 자기자식은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그런 학원에서 학원으로 다니는 경우와 비교하기 위해 현실에는 없는 초장기 학원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학원의 목적은 대학입시에서 성공하는것이지만 아이들은 유치원수준에서부터 이 학원에서 공부한다. 이 학원은 당장 결과를 내는것보다는 아이에게 장기적으로 봐서 뭐가 필요할까를 고민하면서 종합적인 교육울 시킬것이며 따라서 아이들이 쓸데없는 경쟁에 지치지 않도록 해 줄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스승모시기 같은 이런 학원은 현실에 없다. 따라서 무수한 사교육, 더더욱 세분화되어가는 교육은 단기적 목표에 단기적이고 무의미한 경쟁에 아이들을 최적화 시킬 뿐이다.
실은 이런 학원보다 더 장기적인 목적을 가진 혹은 가져야할 교육의 주체가 있다. 그게 가정이고 정규 학교과정이다. 초중고 과정의 교육목적은 당연히 대학입시에서 성공하는것보다도 더 장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걸 위해서 전문가들이 오랜 고심끝에 만들어 내는 것이 그 교육과정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는 법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아이를 긴 안목을 가지고 관찰하고 교육시켜야 한다. 결국 인생은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도 끝나는게 아니다. 대학 이후의 인생은 대학에 들어간 이후에 고민하면 된다는 생각은 요즘의 현실을 보면 전혀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오히려 나는 왜 대학에 가는가에서, 대학에 가면 나는 뭘할것인가를 미리 고민할 필요가 있다, 대학의 학문도 매우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규교과과정은 비틀리고 가정교육은 붕괴한것 같다. 부모가 더 서둘러 아이로 하여금 단기적인 것에만 집중하도록 한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실패하는 교육의 길을 걷는 것이다. 아이들은 일찌감치 정서불안에 가까울정도로 피곤해 진다. 정작 대학입시쯤이 되면 파탄을 일으키기 더 쉬워진다.
나는 물리와 수학에 있어서 재능을 보인 편이었다. 그 두가지만 보자면 내 성적은 상위 1%보다도 훨씬 위였을 것이다. 실제로 대학입시에서도 다 만점을 받았다. 나는 물리는 고등학교 내내 시험성적이 만점이었고 수학도 대개 만점으로 내가 전교1등이었다. 그런 내 실력의 바탕은 선행학습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상당부분 내가 집에 있던 상대성 이론이란 책을 중학교때 보고 또 본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줄줄 외울수가 있을정도가 되도 결국 다 이해하지 못했던 그책은 내생각하는 힘을 많이 키워주었다. 그리고 그런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중학교때 학원도 다니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성적도 거의 걱정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협소설이나 만화를 보면서도 그런 책에 몰두할수 있을 만큼 자유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아마도 법륜스님이 티브이에 나와서 한 이야기였다고 기억한다. 한 엄마가 자식 공부잘하라고 매일 절에 다니며 백일기도를 했다고 한다, 결국 아이는 시험에 성공했고 엄마는 이게 모두 부처님 덕이고 백일기도 덕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법륜스님은 이렇게 말했다는것이다. 그것은 다 엄마덕이다. 엄마가 기도 다니느라고 집을 계속 비우니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는것이다. 옆에서 이러니 저러니 잔소리하는 엄마가 교육을 망치고 있다는 이야기다. 교육의 기본중의 기본은 계속 관심은 가져주되 말하고 싶은게 있어도 이따금 그러는 것을 제외하면 참고 참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걸 하지 못하는 엄마들이 아이옆에 붙어서 단기적인 것을 향해 아이들을 밀어부치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교육은 결국 장기적으로 실패하는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불안을 양산하며 알게모르게 아이들을 어두운 세계로 이끌고 있다. 좁쌀같은 안목으로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교육이라하면 당장 대학입시가 떠오를 정도로 대학입시라는 주제에 사람들의 관심이 크다는것을 안다. 현실적으로 나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대학입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단기적 목표와 장기적 목표와의 차이점은 어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결과를 준다.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이 없이 단기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벌어서 뒤로 새는 인생을 만들기 쉽다. 우리는 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다급해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인생은 끝일까? 장기적이고 더 포괄적인 시각은 무엇인가. 장자같은 사람들이 어른들에게 주는 지혜란 바로 좁쌀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좁쌀들이 더 작은 좁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종종 현실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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