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코앞에 다가왔고 나의 조카뻘 되는 사람들중에는 시험을 보는 이들도 있다. 나는 이따금 딸 아이를 앉혀놓고 공부하는 법에 대해 말해 주고는 하는데 사실 확실하게 이렇게 하면 공부를 잘하게 될수 있는 방법 따위는 세상에 없다. 말을 물가에 데려가도 물을 먹는 것은 말의 마음이니까. 억지로 먹이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이상하게 될수 있으므로 누군가가 나는 이렇게 했는데 성공했다라고 말하는 자기 성공담이나 자녀교육성공담에 너무 빠지면 자식을 망칠수도 있다. 그들의 자식과 당신의 자식은 안드로메다와 지구만큼이나 동떨어진 존재일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공부잘하는 법에 대해 전혀 방법이 없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간결하고 당연한 정도가 있다. 공부를 하는데에는 내가 보기엔 3단계정도를 말할수가 있는 것같다. 첫번째 단계는 배운 것을 아는 단계고 두번째는 선생님을 아는 단계이며 마지막은 책을 아는 단계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사람은 명문대에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실력이 된다. 특히 수학이 그렇다. 알고보면 그렇게 대단한 진리도 아니지만 이걸 모르는 사람도 꽤 있고 입시생이 아니더라도 학교에 대해, 어른의 공부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으므로 이걸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배운 것을 아는 단계
배운 것을 아는 단계란 그야말로 교과서나 참고서를 보면서 선생님이 설명해 준 것을 열심히 공부하는 단계다. 구구단을 배웠으면 구구단을 외우는 단계고 직선의 방정식을 배웠으면 직선의 방정식 공식을 외우고 단순 응용문제를 푸는 단계다. 우등생이 되지 못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단계에 머무르거나 이것도 하질 않는다. 공부 안하고 공부 잘하는 방법따위는 없으므로 이 단계에 들어가지도 않은 사람은 애초에 공부 잘하기를 기대해서는 곤란하겠다.
문제는 사실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배운 것을 아는 단계가 공부의 전부인줄 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도 있는데 학교에 보면 쓰러질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며 전교1등하는 학생보다 훨씬 더 열심히 공부하여 책이 너덜너덜할 정도가 된 학생도 있다. 그런데 그런 학생은 슬슬 공부하는 전교1등학생보다 성적이 훨씬 밑인 경우가 많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해도 많은 학생들은 왜 나는 공부를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냐고 고민한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바로 공부라는게 배운 것을 아는 단계가 전부라고 생각하고 열심히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우등생이 되기 어렵다.
선생님을 아는 단계
그렇다면 배운 것을 아는 단계에 있는 학생이 모르는 선생님을 아는 단계란 무엇인가. 스스로가 선생님이 되어서 뭔가를 가르친다고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여러분은 중학교 수학인 직선의 방정식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수업을 하면서 뭘 강조하게 될것이고 다 잊어버려도 뭐는 꼭 기억해야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런게 없으면 사실 수업이 거의 불가능하고 수업은 무한대로 지루해진다. 그래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이 단원의 핵심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의 입장에서 배운 것의 핵심을 아는 것, 즉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은 사소한가를 아는 것이 바로 선생님을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에서도 중요하지만 특히 시험을 볼때 선생님을 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바로 시험문제를 그 선생님이 만들지 않는가. 선생님은 적어도 대부분의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각 단원들의 핵심을 학생들이 알고 있나를 물어보기위해 만든다. 아주 소수의 문제만 경우따라 응용력과 시험점수 변별력을 위해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선생님을 아는 단계에 이른 학생은 시험을 보면 대부분의 문제를 빠르고 쉽게 풀어내며 선생님이 수업을 할때 뭐가 중요하다고 하는 건지 빠르게 잡아낸다. 그러니까 어렵고 아리송한 부분을 공부할 시간도 많고 시험도중에 그런 문제를 풀 시간도 많다.
열심히 해도 공부못하는 학생은 대부분 뭐가 중요한지 안한지에 대한 구분을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헛짓만 열심히 해서 공부하는 시간을 낭비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책을 아는 단계
그렇다면 선생님을 아는 단계보다 더 높은 책을 아는 단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학교 선생님에게 수업을 듣는다. 그런데 물론 그 선생님이 학교를 만들거나 그 교과과정을 만들고 교과서를 쓴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해보라. 당신이 수학자이다. 그래서 중학생용 수학교과과정을 개발해야 한다. 무엇을 어떤 순서대로 가르킬 것인가. 물론 이 답을 진짜로 낼수 있는 사람이라면 중고생 수준일리가 없다. 실은 이것은 정답이다 오답이다라는 구분이 있는게 아니라 어느정도까지 답할수 있는가의 문제다. 일반어른은 물론 선생님도 다 자신의 한계속에서만 교과과정과 교과서의 의미에 대해 말할수 있다. 심지어 그 교과서를 쓴 사람보다 그 교과서의 의미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수 있다. 누구나 아무것도 없는데서 교과서를 만드는게 아니라 있는 것을 조합하고 변형하여 교과과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너무 추상적으로만 가지말고 구체적이 되어보자. 예를 들어 중학교 수학과정에서 가르치는 중요한 부분은 대수학 즉 방정식 풀기다. 그런데 방정식을 풀자면 제일 간단한 1차방정식 부터 가르쳐야 하고 1차방정식이라도 방정식을 가르치려면 변수를 도입하는 과정 즉 x니 y니 하는 미지수의 도입을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며 그것보다 먼저 답이 음수일때도 있기 때문에 자연수밖에 모르는 아이에게는 음수개념을 포함하는 정수와 정수의 사칙연산을 가르쳐야 한다.
내가 말하는 것은 각각의 것을 배우는 것은 다 앞뒤로 이어지는 의미가 있으며 그것때문에 그것의 중요성은 나름의 의미를 더욱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교과서도 소설책처럼 이야기가 있는 책이지 백과사전이나 퀴즈책처럼 각각의 단원이 동떨어져서 지식이 나열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안다는 것은 바로 교과과정 전체의 이해, 교과서 전체의 이해를 하는 것을 말한다.
좁은 구멍으로 세상보기와 학교의 문제
말은 그럴듯 한데 정말 그런 추상적인게 중요할까라고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법하므로 이렇게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여기 검은 밤하늘에 달이 떠있고 그 밑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으며 나무의 아래에는 박쥐가 날고 있는 그림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리고 그 그림의 크기는 보통 A4정도 크기라고 하자. 그 그림을 하얀 종이로 덮는다. 그리고 거기에 백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을 뚷어서 그 구멍안에 있는 부분만 그림이 보이게 하자.
그리고 당신은 매일같이 종이를 조금씩 움직여가면서 그 그림의 일부분씩을 어떤 학생에게 보여준다. 물론 그 학생은 그 그림이 뭔지 모르는 학생이다. 두달후 그 그림을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여준후에 그 학생에게 너는 이 그림이 뭔지 아냐고 물으면 그 학생은 '검은 밤하늘에 달이 떠있고 --' 이렇게 설명할수 있을까?
많은 학생은 그저 검정색, 검정색 그리고는 하얀색 그리고는 검정색 이런 식으로 자기가 본 그림조각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기억이 얼마나 가겠는가.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고 각 조각들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없이는 공부는 금방 한계에 부딪힌다.
현대학교교육의 문제중 하나는 다수의 학생을 한명의 교사가 정해진 속력으로 정해진 것을 가르친다는 그 형식때문에 내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교육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멋진 그림을 조각조각내어서는 조금씩 던져준다. 그리고 그걸 합쳐서 다 보여주는 일은 거의 드물다. 교사의 능력문제, 학생의 능력문제, 환경의 문제 모두가 있다.
왜냐면 처음에는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해를 못할테고 미리 세부사항없이 전체를 조망하게 해줄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능력이다. 쉽지 않다. 대학교수조차 이걸 잘 못한다. 그래서 대학강의도 철학과 전체적 조망없는 조각난 지식을 강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다고 해도 물론 학생들은 대부분의 경우 이해를 잘 못한다. 일단 배운것을 아는단계는 되어야 그걸 조합할텐데 그정도도 잘 안되는 학생이 더많기 때문이다. 대학이면 몰라도 초중고과정에서 선생님이 수업하면서 최고 우등생들만 이해할 것같은 소리를 계속 떠들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특정 다수를 위한 교육은 전체적 조망을 잃어버리고 자질한 지식의 나열이 되기 쉽다. 교육을 받는 당사자가 뭘 아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듣는 사람이 뭘 모르는지는 모르는데 할수 있는 강의가 진짜 명강의일수는 없다. 기껏해야 잘난체하는 강의가 될뿐이다.
사실 어차피 공부는 자기가 하는 것이다.큰 그림보기를 하려면 자기가 해야 한다. 그러니까 책이든 참고서든 한권을 정해놓고 앞뒤로 계속 여러번 보면서 스스로가 정리를 해야 한다. 자기가 이단원과 저단원을 연결하고 자기가 스스로 강의한다고 생각하면서 그 정수를 뽑아내려고 해야 한다. 그럴때 어느 순간 그 모든 자잘한 조각들이 합쳐지면서 아 거기엔 달이있고 나무가 있고 박쥐가 있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일단 그것을 보게되면 성적은 급격히 상승한다. 입시공부할때 보면 종종 성적은 공부한 시간에 비례해서 오르는게 아니라 계단식으로 오른다. 해도 안오르다가 갑자기 오르고 일단 오르고 나면 별로 열심히 공부 안했는데도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다.
맺는 말
전체적 조망이란 것은 개인적인 능력과 과목에 따라 다르고 딱히 정답이랄것이 없을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유럽에서 여행한 일이 많다거나 유럽역사에 대한 어떤 소설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다면 세계사를 배울때 그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달라질 것이다. 즉 당신의 개인적 경험이 그 의미를 만들어 낸다. 당신이라는 공부의 주체를 빼고 의미가 객관적으로 혼자서 서있는 것만은 아니다. 전체적 조망이란 내가 아는 것들을 서로 의미있는 관계로 나열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는 것들이 크고 작게 다르다.
나는 현대식 학교의 단점에 대해 짧게 말했는데 물론 장단점이란 게 있는 것이지 반드시 조선시대식 서당교육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교육과 현대교육을 비교했을 때 우리는 현대식 교육의 그림자를 또렷히 보게 된다.
한명의 스승이 자신의 제자의 상태를 보면서 자신이 아는 것을 대화하며 가르치는 교육과 여러선생님들이 여러과목을 여러사람에게 동시에 가르치는 교육은 다르다. 당연히 일관성이나 의미나 총체성에서 다르다. 어떤 의미로 배우는 사람들은 그 지식들이 놓여져야 하는 문맥을 배우지 못하고 만다. 만약 10권의 장편 소설책을 매일같이 한페이지씩 몇년에 걸쳐 읽어나가는 식이라면 우리는 그 소설에 대한 흥미를 거의 잃을 것이며 명작과 쓰레기 같은 소설에 대한 구분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말하자면 재미있는 소설을 가장 엉망으로 읽는 법이 바로 현대 교육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총체를 배운다는 의미에서의 교육은 사라지게 된다. 아마 교육이 그런건지도 잊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지식은 날로 증가하고 있고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날로 쉬워지고 있다. 인터넷 검색으로 지식이 금방 나오니까 외울필요도 점점 줄어든다. 우리는 벽돌은 구하기 쉬우니 설계도를 그릴수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더 더 값싼 벽돌에 매몰되어 설계도 그리는 것이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냥 값싼 불량식품같은 지식습득 중독에 걸려서 중얼중얼 머릿속에 뭔가를 집어넣기만 바쁘다.
하나의 인격은 세상의 지식을 총체적으로 본다. 어떤 사람이 과학자라고 해서 미술이나 역사나 요리나 건축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없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로서 혹은 그저 개인으로서의 관점이라는게 있고 그 관점에서 의미가 나온다. 사실 학생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소중한 것은 그런 관점들인데 그것들을 교과과정 안에서 습득하는데 실패하는게 대부분이며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나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입시에도 실패하는 길이 된다.
대학교수가 고등학교과정을 마치고 면담을 하러온 사람에게 뭘 물어본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 나무 밑의 박쥐는 본적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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