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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주 생활

전주에 비가 온다면

by 격암(강국진) 2015. 9. 8.

전주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오송제에 있고 싶다. 연잎이 가득한 연못에 비가 내리면 아주 멋진 풍경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 후드득 후드득하는 빗소리가 멋질 것이다. 오송제 주변에는 원두막이 하나 있다. 나는 그 원두막에 앉아서 빗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연잎밑에서는 오리들이 법석을 떨 것이고 비는 가까운 편백나무 숲에도 떨어져 쏴아 하는 소리라도 전해줄지 모른다.

 

전주에 비가 온다면 한옥마을도 훨씬 더 근사할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빗소리를 좋아했고 비오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이유중 하나는 번잡스럽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도시도 비가 내리면 어느 정도 차분해 진다. 사람들도 마침내 조금은 멈춰선다.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런 저런 먹는 장사로만 너무 가득 차버린 한옥마을도 비가온다면 훨씬 괜찮아 보일 것이다. 우산을 쓰고 내가 좋아하는 한옥마을의 좁은 골목을 걷거나  찻집에라도 들어가 바깥구경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비를 피하기 위해 뛰어가는 모습이라도 보게 될지 모른다. 아니면 그저 찻집에서 책을 읽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을 보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나는 경기전이나 전동성당의 구석에 서서 비내리는 바깥을 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한벽루나 청연루에서 강물위로 비가 떨어지는 것을 봐도 될 것이다.

 

전주에 비가 온다면 나는 만화방에 가서 만화를 보고 싶다. 전북대 앞의 만화방에 앉아있으면 비록 바깥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한없이 아늑하게 느껴질 것이다. 공기는 온통 눅눅하고 주변에는 만화가 가득하다. 사발면에는 물을 부어놓았고 삶은 계란도 있다. 나는 그런 B급 정서도 좋다. 그러다가 나와서 아직도 비가 내리는 것을 발견한다면 나는 주변의 생맥주집을 찾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택시를 타고 삼천동으로 가서 한상 가득히 안주를 차려놓고서 비오는 날의 막걸리맛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낙서 가득한 벽과 홍합탕 안주를 가지고 좋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비가 이미 오고 있다면 너무 늦었다. 오송제에 산책을 갔을 때 마침 비가 온다면 그것은 아주 즐거운 경험이겠지만 비가 이미 내리기 시작한 때에 억지로 집을 나서기는 싫다.

 

어떤 일도 우리가 정확히 뜻한 대로는 되지 않는다. 좋은 것을 상상하면서 우리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면 우리는 대개 실망한다. 진짜 좋은 것은 항상 뜻하지 않게 만나지는 법이다. 나는 좋은 것을 우연히 만나고 싶다. 마치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과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처럼.

 

전주에 비가 온다면 나는 그때 좋은 곳에 있었으면 싶다. 아내는 김치전이 아주 만들기 쉽다고 말한다. 우리집의 냉장고에는 맥주가 채워져 있고 강냉이 뻥튀기가 큰 통에 가득히 채워져 있다. 최근에 볶아서 갈아온 커피도 채워져 있고 티볼리 라디오도 언제나 소리를 낼 준비가 끝나있다. 원한다면 욕조에 물을 받아 빗소리를 들으면서 목욕을 할 수도 있다. 기타를 꺼내어 노래를 한곡 불러볼 수도 있다. 나는 준비된 사람인 것이다. 전주에 비가 온다면 우리집도 좋은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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