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존경받지 못하는 선생님이라는 모순

by 격암(강국진) 2016. 8. 25.

16.8.25

모든 일이 그렇지만 배우는 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그리고 그 길에는 각각의 위험과 장점이 존재한다. 배움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 특히 요즘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승의 권위 문제일 것이다. 요즘은 스승이란 말 자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이 문제가 심각하다. 

 

문제의 한 원인은 이렇다. 독립적 인간을 강조하는 서구의 문화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그 껍데기만 혹은 그 반절만 들어왔다. 사실 남의 것은 완전히 다 들어오는 법이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남의 것을 배울 때 항상 그 일부만 배운다. 흉내내는 사람은 항상 원본과 다르다. 독립적 인간을 강조하는 서구 교육이라는 것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서는 독립적 인간을 강조하기 때문에 학생의 권리를 강조하는 동시에 의무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으므로 저질러진 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로서 책임도 지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성인과 아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우리는 가끔 교실에서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거나 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교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것이 대학의 수업이거나 혹은 문화센터같은 곳의 성인대상의 수업이라고 하자. 혹은 직장에서의 일이라고 하자. 일이 어떻게 흘러갈까는 분명하다. 수업에 방해를 준 학생, 교사에게 폭언을 하는 학생들에게 관용은 없다. 왠만하면 수업에서 퇴출된다. 심지어 사법처리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통상 어린 학생들에게는 같은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애들이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게 바로 서구의 문화가 절반만 들어왔다는 것이다. 서구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더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서구는 아이들을 성인취급한다.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도 그렇다. 규칙을 어겼으면 그 댓가를 치루는 것이 독립적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지 나도 내 의지가 있다, 내 의사가 있다면서 자기 맘대로 하고 결과를 책임지지 않는 것이 독립적 인간을 기르는 일이 아니다. 

 

스승의 권위 문제에는 다른 측면도 있다. 배움의 길에는 이런 문화적 혼선을 말하지 않더라도 본래 권위와 믿음의 문제가 있다. 뭔가를 타인에게 배운다는것은 그걸 가르치는 사람을 신용해야 하는 일이다. 학생은 어떤 선생도 완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완벽해 지려고 완벽해 보이려고 노력해야할 의무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뭔가를 배우고자 한다면 선생을 신뢰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교육은 애초에 말이 안된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를 줬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은 그 지도가 구겨져 있다거나 산의 지도쪽은 모르겠는데 자기가 아는 동네의 지도는 좀 부실하거나 틀린 곳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이 지도를 믿어야 할까 아니면 이 지도는 엉터리니까 완전히 무시해야 할까?

 

당신이 만약 약간의 오류라도 있는 지도는 모두 무시하겠다고 한다면 현실세계에서 당신은 큰 문제를 만나게 된다. 현실세계에서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실같은 곳에서 만들어 질 수 있는 환상같은 상황은 별로 없다. 다시 말해 여기 완결무결한 정답이 있으니 그걸 외워라는 식의 상황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완벽한 선생도 없다. 현실에서는 답은 맞거나 틀린게아니라 거의 맞거나 거의 틀린 것들에 속한다. 어떤 답도 100% 틀리거나 100% 맞지 않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많이 틀렸지만 맞는 부분도 있는 답조차 귀하다. 참고서만 펴면 거기에 정답이 써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런 게 답이 아닐까라는 제안이나 아이디어조차 귀하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약간의 오류라도 있는 지도는 모두 무시하겠다는 태도로 산다면 당신은 거의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는 자신이 존경받을 만한 엄격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나 실은 배움이 뭔지도 모르는 멍청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차차 쓰겠지만 정도의 문제만 있을 뿐 이런 멍청이는 아주 많다. 생각보다 훨씬 많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아니면 대부분이 이런 멍청이다.

 

남의 답에 대해 의심하고 트집잡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선배나 경험자의 눈으로 보면 대개 오만 방자한 바보로 보이게 된다.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경험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의 답에 대해 이런 저런 트집만을 잡고 의혹을 제기한 끝에 간단하게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무가치 하다고 선언해 버리는 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도 완벽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모두를 무가치하다고 선언해 버리면 뭘 배우겠는가? 게다가 그런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다. 공자니 칸트니 문학이니 물리학이니 하는 분야들이 등장할 때마다 종종 아 그거 그건 이런 저런거 아냐? 의미없어!라고 간단히 선언해 버린다. 같은 논리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그 사람이 뭘 배우겠는가.

 

이런 태도를 가진다면 뭔가를 가르쳐 주려는 선의를 가진 사람도 금방 손들어 버리게 된다. 상황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은 선의를 베푸는 것인데 배우는 사람쪽이 오히려 나라는 사람의 머리를 뿌리끝까지 완전히 고쳐놔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 답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자기 삶을 그렇게 엄청나게 희생하면서 까지 남의 삶에 기여할 수 없다. 그러니 손을 들게 된다.  멍청이들은 잠재적 스승들이 자기를 포기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의기양양하거나 자기가 무슨 논쟁에 이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오랜 입시생활을 거치면서 답이 맞았다와 틀렸다의 두가지로 판정나는 경우에 중독되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시험문제의 답은 맞거나 틀리다. 교과서에 써있는 것은 진리 그 자체다. 무조건 시험에서 맞는 것으로 판정된다. 다음 중 올바른 것을 고르시요라는 문제를 풀때 우리는 흔히 소거법을 쓴다. 즉 1번은 이 부분이 이상하므로 틀리고 2번은 이 부분이 이상하므로 틀리고 하는 식으로 제외하면서 맞는 답을 고르는 것이다. 이런 소거법은 시험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현실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현실은 회색이기 때문이다. 모든 답이 조금은 다 틀리다. 그러니까 그런 소거법에 중독된 사람은 현실에서는 바보다. 이 집을 사야할까 저 집을 사야할까. 그런데 첫번째 집은 우편함 색깔이 마음에 안든다. 따라서 '잘못된 답이다'. 그러니 두번째 집을 사자는 식이 되기 쉽다. 결혼도 그렇게 하고 진로 결정도 그렇게 한다. 본인은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정말 사소한 것때문에 큰 결정 하는 사람 많다.

 

문제의 또다른 면을 위해 다시 한번만 지도의 예로 돌아가 보자. 그 예를 읽은 사람들 중에는 분명히 해결책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구할 수 있는 지도를 모두 모아서 그것들을 서로 비교하면 특정 지도를 믿지 않고도 안전하고 확실하게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정보를 모으고 그것을 상호 비교하여 그 안에서 답을 찾는다는 방식. 이거 어딘가에서 많이 들은 것같다. 이걸 과학적 태도라고 부르지 않던가? 이쯤 되면 우리는 자신감이 생긴다. 과학적 태도, 계몽주의자의 태도가 진리 아닌가? 



우선 지도의 예를 말하자면 그 지적은 맞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제는 세상일에는 그런 평균이 가능한 것과 그런 평균이 완전히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으며 실제 현실에서 점점 더 중요해 지는 것은 후자의 것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얼마인가라는 지식은 정보를 끌어모아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숫자를 정답으로 취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평균을 내기도 쉽고 각각의 답을 이해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세상에 존재하는 정보를 모두 모은다면 일단 그 각각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생론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그 불가능한 것을 해내서 이해를 했다고 하자. 그 다음에 평균을 낸다면 평균이란 여기서 뭘 말하는가? 뭘 기준으로 뭘 소거한다는 말인가?

 

인생론은 너무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 짜장면집은 어떻게 운영하는가같은 정도의 질문, 수학공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정도의 질문도 평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면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 같은 면은 점점 더 핵심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반면에 망의 시대에 평균가능하고 객관화가 가능한 지식이라는 것은 점점 무가치해지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타이어 값이 싼 가게는 어디인가라는 답이 순간적으로 제공되는 시대에 단순히 타이어 가격을 싸게 책정해서 타이어 장사를 해보겠다는 전략은 특정 기술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런 전략은 대개 철저히 실패한다. 가격이라는 객관화가 쉬운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평균가능하고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망의 시대에는 아주 희소가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평균이 불가능하고, 평균이 무의미해 지는 순간. 다시 말해 정보가 귀한 순간은 과학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앞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 당신이라는 인간 자체가 그 증거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과학적 개념의 한 예가 아니라 특정한 기적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아주 특이한 사건이다. 그래서 보편성, 객관성을 기반으로 하는 과학적 법칙으로 당신이라는 인간을 모두 설명하게 되지 않는다. 그걸 그렇다고 믿으면 정신적 위기를 가지게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가 배우려면 우리는 믿어야 한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독립을 위협하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야 한다. 여기저기 둘러만 보고 있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가르치는 사람을 믿고 의구심을 버리고 따라가 봐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뭔가를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교실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은 무너진지 아주 오래 되었다. 그것이 아이들의 탓만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은 쉽게 세상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자기가 뭔가를 안다고 너무 쉽게 믿는다. 자기가 뭔가를 안다고 믿는 사람은 가르치기가 어렵다. 단 한명도 가르치기가 어려운데 수십명을 앞에 둔 선생님은 대개의 경우 속수 무책일 수 밖에 없다. 이러니 저러니 자기 멋대로 떠드는 학생집단 앞에서 한계가 있고 부족한 것이 있는 그냥 한 사람의 성인인 교사가 뭘 가르치겠는가. 교사는 그냥 한 인간이다. 당연히 한계가 있고 어떤 교사는 더욱 더 그렇다. 그러나 존경이 없는 곳에는 배움도 없다.

 

문제는 당연히 교실을 넘어서 넘쳐흐른다. 세상에는 자기와 다른 말을 하면 네가 뭘 아냐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생각을 바꾸면 별로 의미도 없는 부스러기 정보들을 산처럼 쌓아놓고 자기의 생각에 확신이 넘친다. 교육, 부동산, 정치, 경제, 국방, 환경. 답들은 넘쳐난다. 그런데 그 답들중에 정말 대다수는 고민도 깊이도 없다. 답이 맞고 틀리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다. 문제는 고민의 깊이와 폭이다. 배움의 자세가 실종된 시대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