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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평화로운 시대와 국가의 종말

by 격암(강국진) 2018. 5. 2.

2018.5.2

일본의 경제학자 오마에 겐이치가 국가의 종말이라는 얇은 책을 낸 것은 1995년의 일이다. 그는 전통적인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으며 그보다는 통신과 경제적 소통의 결과 지역국가가 국경선을 무시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제 그 예언이 있었던 것도 20년 이전의 일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국가의 존재를 여전히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그의 예언은 틀린 것이었을까? 하지만 비록 국가라는 개념이 가까운 시일내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평화로운 시대는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시대에 어떤 국가가 좀 더 경쟁력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할 거리는 많이 있으며 오마에 겐이치의 지적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전면전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전면전이란 두 진영이 진짜로 국가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전쟁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베트남전쟁도 심지어 한국전쟁도 전면전이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다고 베트남군이 미국에 처들어와서 미국을 망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한국전쟁도 한국과 북한의 입장에서는 전면전이었지만 그 전쟁의 진짜 주역이었던 미국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하는 전쟁이 아니었다. 아마도 마지막 전면전은 세계 2차세계대전이 아니었나 싶다. 그 시대는 핵무기의 출현과 함께 확실하게 끝이 났다. 

 

핵무기가 아니라도 오늘날 전쟁이 드물게 된 이유는 분명하다. 시장때문이다. 시스템 때문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최고의 안보는 경제적 협력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두 지역이 혹은 두 국가가 하나의 경제 시스템 안에서 강하게 결합할 때 그 두 국가가 전면적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경제는 지식과 신용에 근거한다. 폭탄으로 쑥대밭이 된 땅을 얻거나 억지로 누군가를 우리 시민으로 끌어들여서 좋을 것이 없다. 법과 규칙이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보여주는 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은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시장과 계약이 깨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렇게 규칙을 깬 사람과 국가를 온 세계가 징벌하는 것이다. 바로 시장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신용이 망가지면 전 세계가 몰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경협이 곧 안보인 것이다.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피하는 최고이자 유일한 방법은 국가를 개방하고 세계 경제속으로 깊숙히 들어오는 것이다. 무기가 너무나 잘 발달된 오늘날 그렇지 않은 국가는 한순간에 재가 될 위험속에 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이런 시대가 오기 전에는 세상에 신용이 드물었고 따라서 정의도 드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죽여도 크게 뒷탈이 생기지 않았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게로 늘상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거의 정복왕이란 것은 결국 더 많은 남의 땅을 빼앗은 왕을 말하는 것이다. 몇백년전쯤을 생각해 보라.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조직이 드물었다. 그러니까 힘이 곧 정의였다. 그때 존재하는 신용은 고작해야 바로 모든 것을 군사력으로 가진 왕의 약속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왕을 믿을 수 있는가? 첫째로 왕은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믿을 수 있다. 그러니까 독재가 엉터리 민주주의보다는 훌룡하다. 엉터리 민주주의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독재국가는 일이 잘되건 안되건 누가 제일 큰 책임이 있는가가 분명하다. 진짜 민주주의는 이렇지 않지만 그렇게 되려면 강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낮은 문맹률과 훌룡한 통신시설같은 것말이다. 

 

둘째로 우리는 왕이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살인과 전쟁과 약탈이 흔한 시대에 안전을 지킬 힘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물리적인 힘이 없는 사람이나 국가가 하는 약속은 설사 약속을 지킬 의도가 있어도 지켜질 수가 없다. 

 

이런 것들은 일찌기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지적했던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세상에는 왕이 필요했고 강대한 군사력이 필요했으며 국가는 크면 클 수록 믿음직했다. 더 큰 국가는 동일한 질서가 더 넓은 지역에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더 강력한 왕을 의미했다. 따라서 신용이 없던 시대에 더 거대한 국가는 더 바람직했다. 사람들은 왕을 모시고 싶어서 모신게 아니라 이런 왕이 만들어 내는 질서 속에서 자기 살길을 찾았다. 왕은 필요악이었던 것이다. 

 

봉건시대가 끝이 나고 귀족계층이 몰락하여 세계가 평등한 시민들의 나라로 채워진 이후에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정확히 같은 논리로 해서 왕이 필요했고 왕을 만들었다. 그 왕의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미국이다. 최근까지 미국은 다른 국가들의 리더역할을 해왔고 때로 그 역할을 잘 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리더역할을 해야했기에 다른 나라들이 미국을 돕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유지해 온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온 세계가 그렇게 했다.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만 그럴 수 있는 나라가 없었고 따라서 미국은 국가들중의 왕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다른 국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힘없는 사람이 왕이 되어봐야 휘둘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가장 큰 내수 시장을 가진 나라이며 광대한 토지와 자원을 가진 국가다. 그래서 세계의 왕이 된 것이다. 

 

이쯤이면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다시 지적하는 이유는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에는 앞에서 말한 전쟁다운 전쟁이 없다. 이런 시대에 어떤 국가가 단순히 넓은 땅을 가지고 많은 인구를 가지며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다고 해서 정말 경쟁력이 있을까? 이것은 마치 칼이나 총을 잘 다루는 사람이 평화로운 국가에서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같은 이야기와 같다. 세상이 평화로운데 싸움잘하고 총잘쏘는걸 어디에 써먹겠는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는 하나로 더 강력하게 융합되어 가고 있다. 강력하게 발달한 컴퓨터와 통신기술이 전 세계를 하나의 시스템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짜 민주주의의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즉 권력의 핵심이 존재하지 않고 중심이 따로 없는 시스템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국가의 종말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종말되기 전이라도 우리는 거대한 국가보다 작지만 지식과 신용의 차원에서 경쟁력이 있는 국가가 더 경쟁력을 가지는 시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군비지출은 세계의 군비지출의 절반이다. 즉 미국 이외의 모든 국가가 쓰는 군비의 총합이 미국의 군비와 비슷하다. 요즘 시대에 이런 국방비는 크나큰 낭비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0번째로 군비를 쓰는데도 국방비를 50조나 쓴다. 힘의 균형때문에 돈을 쓰던 나라들은 그걸 한꺼번에 줄일 수도 없지만 사실 전쟁도 안하는데 군수물자를 계속 수십년간 생산한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때문에 아프칸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을 미국의 군수물자 소모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요즘에는 인구가 많고 크기만 한 국가는 쓸모가 없다. 문제는 그 큰 나라가 내부적으로 그리고 외부와 어떻게 융합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건 그저 유지비만 엄청나게 들어가는 공룡이 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는 운명에 빠지게 된다. 미국만해도 세계의 왕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기가 끊기고 의료보험이 없고 인종 차별, 높은 범죄율과 총기문제로 시끄럽다. 별로 왕답지 못한 것이다. 

 

이런 시대는 한반도에게는 기회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언제나 거대한 국가에게 무력으로 당해왔다. 중국에게 당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러시아, 일본, 미국같은 거대한 국가들에게 조선은 그리고 한국과 북한은 밀려 다닐 수 밖에 없었다. 이유는 주로 우리가 더 작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21세기는 다르다. 한국의 작은 사이즈가 크게 문제가 안된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평균적 수준이다. 나는 언제나 한국 국민들의 평균적 수준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해 왔다. 그 이유는 역사에서 먼저 찾아야 겠지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글의 존재다. 

 

한글은 한국인의 문맹률을 전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게 해준다. 한국의 발전은 다른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의 차이다. 한글은 컴퓨터에서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요즘 한국인들이 온라인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면 한국의 인구가 5천만 이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여든 열기의 힘은 인구가 훨씬 큰 일본이나 미국을 능가하는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이것은 결국 촛불혁명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구 5천만인 나라에서 수도에 백만이상의 인구가 모여든다는 것은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글과 인터넷으로 이어진 한국인들은 어느 나라보다 집단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이 국가를 합리적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미래를 선도하며 세계에 비전을 제시할 국가가 필요한 것은 반드시 거대한 인구와 땅이 아니다. 

나는 더구나 한국의 힘이 지금의 소모적인 상황에서 벗어나면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고 본다. 소모적인 상황이란 바로 남북 대치상황을 말한다. 한국에서 비합리적인 일들의 상당부분이 반공논리에 기반해서 행해지고 있다.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끝나고 1년만에 한반도에서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그 두 정권들이 그리고 그 정권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 매우 비합리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한반도 평화시대가 와서 한국에 진정으로 사상의 자유가 오게 된다면 우리를 억눌러온 무수히 많은 금기들이 무너질 것이다. 예를 들어 재벌이 지배하는 경제도 금수저들만 계속 잘사는 세상도 그런 금기가 만들어 낸 현실중의 하나다. 군사문화가 만들어 낸 권위주의 문화도 그런 금기들이 만들어 낸 현실중의 하나다. 한국의 지독한 대학입시도 그런 금기가 만들어 낸 현실중의 하나다. 

 

이제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북한은 물론 북한을 넘어서 존재하는 땅으로 바깥을 향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비로소 대륙적 기질이라는 것이 뭔지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간 이 좁은 땅에 갇혀 지내면서 이곳이 아니면 답이 없다는 생각에 기죽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단적 힘이 폭발적으로 발휘되게 되면 나는 한반도가 바로 오마에 겐이치가 말한 국가의 종말로 가는 전단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땅이 될거라고 생각한다. 조폭들은 상인들에게 보호비를 받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평화로운 시대에는 조폭은 살아남을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과거의 거대국가가 이제는 낡은 유물처럼 보이는 시대다.   그것은 더 이상 중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미국이 한반도를 핍박할 수 없는 시대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중국인, 러시아인, 일본인들에게 나아가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진짜 인류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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