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
종종 무시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문재인 정권이건 어떤 다른 정권이건 그들이 단기간 동안 뭘 했는지 사실을 수집하고 그것이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판단하는 것보다 더 기본적인 일이 있다. 그것은 그 성공과 실패를 판단하는 기준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다. 그런 고민은 그 자체가 비록 단기간에 어떤 결실을 주지는 않지만 마치 후손을 위해 심은 나무와 같고 미래를 위한 장기적 투자와 같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선조가 심은 나무의 덕이듯 그런 기본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정말 좋은 세상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정권을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두 개의 의식을 동시에 가지거나 두개의 종교를 동시에 믿는 것이 불가능하듯 이러니 저러니 해도 우리는 모두 각각의 기준에 따라 어떤 한 정권의 성공과 실패를 평가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미의 기준이 여러가지라고 해도 어떤 특정한 이성이 매력적일 수도 매력적이 아닐 수 도 있다는 객관적 입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거기에는 나의 느낌이 있고 나의 미적 기준이 있다. 설사 그걸 말할 용기가 없거나 그걸 체계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객관적 관점따위는 없다. 그건 누군가의 뒤에 숨으려는 겁쟁이나 위선자, 혹은 사상적 노예의 환상이다. 모든 관점은 주관적이며 결국 우리 모두가 가진 사상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다시말해 하나의 인생이든 하나의 정권이든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내가 가진 사상이다. 사람들이 어떤 정권이 실패했다고 할 때 그것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 정권을 좋게 평가할 수 있는 사상을 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것, 그런 사상을 구체화하거나 퍼뜨리는데 그 정권이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이 객관적인가 하는 것은 2차적이다. 공화국의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되는 불평등과 비효율을 보여주는 나라도 봉건 왕조 국가의 관점에 빠진 사람의 눈에 어떤 여왕의 시대는 완벽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탄핵당한 대통령 박근혜가 실패한 정치가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비록 소수라고 해도 여전히 한국에 있듯이 말이다. 김대중 노무현 10년 정권이 거짓말처럼 무너진 것도 그들이 그들의 사상을 퍼뜨리는데 실패한 것이 핵심적 원인이다. 그들은 그걸 유지해나갈 수있을 만큼의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이거나 뭘 유지해야 하는지를 말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걸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킬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역사는 결국 인간의 선택의 결과다.
만약 지금의 세상이 엉망으로 보인다면 그것도 당신이 가진 사상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은 모두 자기가 태어나고 살아 온 작은 경험의 구체 안에 존재한다. 인간은 기억력도 이해력도 형편없다. 그래서 한 인간의 관점은 자신의 경험조차 모두 반영하지 못하고 고작해야 그것의 일부만을 반영하여 구성되어진다. 예를 들어 인간은 노동자인데도 노동자로서의 경험을 모두 배제한 관점을 따르기도 한다. 굶어 죽을 것같은 사람이 다이어트를 해서 살빼기를 하는 것을 고민한다. 이것이 소위 자기 계급에 대한 배반이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하고 하나의 사상을 완벽히 공유할 수 있다는 기대는 환상이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하나 하나의 인간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사상을 가진다. 누구도 내가 말하는 어떤 특정한 단어들 그러니까 분노나 평등같은 말의 진정한 의미를 다 알 수가 없다. 평생을 말하고 들어도 그렇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술가가 순간의 영감을 가지고 작품을 쓸 때 그것은 분명 자기 내부에서 나온 것인데도 누군가가 그것을 선물한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쓴 글을 읽으면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나 하고 놀랄 때도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1차적이고 내부적인 현실을 이해한 뒤에는 2차적이고 외부적인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들이 하나의 사상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완벽한 소통이란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관점의 소통이 있고 공유가 있으며 내적인 관점을 변화시키는 외적인 영향이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스스로의 국가에 대해 가지는 느낌은 당연히 외부인인 한국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국가에 대해 더 많은 자부심과 애착과 긍정의 느낌을 가질 텐데 그렇지 않다면 중국이나 일본이라는 사회적 공동체가 발전하기는 커녕 유지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느낌은 소통된다. 그 소통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도 그것은 압력과 동요를 만들어 내는 데 특히 오늘날처럼 통신과 물류가 발전한 세상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서로의 물건과 서비스를 쓰고 그것에 의존한다. 그래서 소위 우리의 관점은 끝없는 도전을 받는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인의 신경을 건드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우리의 신경을 건드린다.
이렇기 때문에 폐쇄된 영토안에다 강력한 사상적 교육을 기반으로 한 나만의 지상낙원을 세우겠다는 야심은 성공하기 어렵다. 스마트폰이 더이상 사치품이 아닌 시대에 나라 바깥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유지한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유지비가 엄청드는 비효율적인 일이다. 폐쇄적으로 계속 사상단속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수한 비효율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다 필요한 일이라고 사람들을 납득시키면서 국가를 지키는 일이 정말로 가능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아래서 살고 있을 것이며 미국의 인디언들도 미국 대륙을 지키며 살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이 개인이건 사회적 공동체이건 어떤 시공간 속에, 어떤 지리적이고 사회적이며 생물학적이고 철학적인 공간 속에 우리의 자리를 확보하고 외부와 소통을 하면서도 자신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신이라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동적인 평형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물속의 공기방울처럼 내부와 외부는 서로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에 실패할 때 즉 지속가능한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는 물속에 잠시 잠깐 생겼던 와류처럼 금새 흩어져 버릴 것이다. 투기바람처럼 감당할 수 없게 부풀어 올라 사라지던가 아니면 외세의 압력에 짖눌려 사라질 것이다. 결국 조금만 지나고 나면 아무도 그 와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무도 그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다. 그 흐름이 강할 때 제 아무리 대단해 보였어도 그건 결국 자기의 전성기를 자랑하는 초라한 노인의 넋두리같이 들릴 뿐이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 이전의 한국 역사는 그 대단한 길이에도 불구하고 해체의 위기 앞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는 오늘날 기본적으로 서구적 사상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당부분 조선의 연장선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조선시대를 포함한 한국의 과거를 끝없이 재발견하고 그 역사가 지금의 우리와 가지는 관계를 다시 새롭게 하지 않으면 조선 이전의 한국역사는 마치 강물에 떠내려간 물거품처럼 잊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잊을 때 그때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를 한국인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인과 그 때의 한국인은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는 이름에 속아서는 안된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그대로라고 해도 경영자와 직원이 모두 바뀐다면 그게 같은 회사일까? 이럴 때 삼성이 망하면 안된다던가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개인의 차원에서 혹은 한국 근대사의 차원에서 일어난 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기를 지키는 데 실패했을 때 우리의 시간들은 중요한 거라고는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으로 판정되고 유실된다.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한 기업가를 생각해 보자. 그가 성공하고 나면 그가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가 써왔던 모든 시간이 성공에 대한 밑거름으로, 충실하게 사용된 시간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그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을 실패한 순간으로 여기는 사람은 그나 그녀가 살아온 과거의 모든 시간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문자를 쓰는 현대인들이 유사이전의 수십만년의 인간 역사를 그저 거의 아무 일도 없었던 시대로 이해하듯 우리는 지나간 시간 속의 우리와 우리 사회를 그저 별일없이 시간 낭비만 하던 존재로 이해하고 그 시간의 대부분을 망각하게 될 것이다. 제 아무리 많은 디지털 사진과 영상을 하드 디스크에 보관해 둔다고 해도 그렇다. 그것들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막는 것이 사상의 구성이고 공유다.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만들고 수선하고 유지한다. 보다 많은 경험과 보다 많은 사람들을 포괄할 수 있는 사상은 보다 많은 것들이 잊혀지지 않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의미를 찾고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로운 것으로 만든다. 이렇듯 단순하게 살지못하고 자신의 세계를 넓히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인간은 호기심많고 탐험을 동경하는 동물이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개인이나 단체의 궁극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아메바나 짚신벌레같은 단세포 동물이 보여준다. 그런 상태에서도 우리는 만찬을 즐길 수 있고 파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잃은 민족이나 내전중인 국가의 시민들이 보여주듯 그들은 한 순간에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이 운이 좋아 아주 긴 세월을 어딘가에서 당분을 빨면서 살아간다고해도 그 시간은 무의미하다. 죽을 때가 되어 뒤돌아보면 마치 5분을 산 것같고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한 조각의 생각과 한 줄의 글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삶의 의미나 기쁨을 가질 기초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깊이 있는 사상은 큰 배와 같다. 모두가 그것의 전부를 받아들이고 똑같이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 일부를 가지고 기꺼이 모두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공존의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배를 탄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준다. 나는 앞에서 사상이란 기본적으로 개인마다 다르다고 말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상이란 사회적 구조물이다. 마치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발달시킬 때 처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사상이라는 구조물의 구축에 참여하고 그것에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사상을 개선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비로소 모두가 같이 그 배에 올라 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한국의 존재는 한국이라는 사상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요즘은 과학과 객관의 시대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상같은 이야기는 미심쩍게만 들린다. 마치 누군가가 자명하고 객관적이며 세계에 단 하나 뿐인 사상을 완성했으며 소수의 야만인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이 정말 과그런 시대라면 그래서 모두가 같은 배를 타고 앞으로 진격하는 시대라면 세상에 정신적 정치적 혼란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미래를 향한 그 길을 다함께 빨리 가는 것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세상을 보면 우리는 두가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확실히 과학과 객관의 시대인 면이 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고 기술적 발전이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어 줄 것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 인공지능이며 우주개발 그리고 전기차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라.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미국을 포함해서 전 세계가 극우 정치 세력에 흔들린다. 이것은 주류 사상의 그림자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의 포용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상을 놀랠 과학기술이 현실화되도 그것이 현대인을 더 행복하게 해 줄거라고 믿는 사람은 점점 더 줄고 있다.
사상의 문제는 낡고 지난 세대의 것이 아니라 더더욱 심각해 지는 미래의 문제다.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는 시대가 오면 우리는 더더욱 그것 이상을 꿈꾼다. 화성을 정복하고 완벽한 인공지능 기술로 모두가 먹을 것을 걱정하는 일이 없이 사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그렇다. 오히려 그런 시대야 말로 자아가 소멸하고 의미가 사라질 위기가 더 커지기에 사상이 중요해 지는 시대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 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할 정신의 집이 필요하다.
사상이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능력이다. 천년전의 사람이 미국 프로야구리그에서 일하는 선수며 직원들을 보면 괴상하게 느낄 것이다. 야구라는 아무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하는 게임에 그렇게도 많은 돈과 물자를 투자하고 의미를 만들어 내서 인생을 야구에 바치는 사람들을 그들은 기괴하게 여길 것이다. 제프 베조스처럼 아마존같은 온라인 상점을 만드는 사람은 그렇다쳐도 마크 주커버그처럼 페이스북같은 것을 만든 사람이 세계 3위의 부자가 되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정권의 성패도 인생의 성패도 객관과 과학에 의존하는 것 이상으로 사상에 의존한다. 사상이란 배나 집이다. 사상이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상상력이다. 사상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은 금기가 많고 의무가 많으며 억압이 많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보라. 그들은 21세기에 아직도 공산주의자를 찾아다니고 북한은 우리와 비교할 수없이 가난한데도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 색출에 나라를 뒤흔든다. 꿈을 영상화하는 부산 영화제를 사상검렬한다고 위기에 처하게 만들고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연예계를 위축시킨다. 그런 사람들은 흔히 빈부로 사상으로 지역으로 학벌로 지위로 사람들을 편가르고 차별 한다.
한국에 인문학 바람이 분다고 하던 말도 이제는 오래되었다. 한국 문화 상품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는 것의 바탕에는 이런 흐름이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여전히 불행하고 불안하다. 학교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다. 무의미와 갑질의 공포가 넘쳐난다. 이러한 불안과 긴장의 결과가 높은 자살률과 낮은 출산률이 아닌가. 살아있는 것이 숙제같고 죄를 짓는 것같은 분위기가 한국에는 있다. 깊은 불안이 병처럼 한국사회에 흐른다. 지금의 사회는 너무 많은 사람의 삶을 실패한 삶, 무의미한 삶, 기억할 가치가 없는 삶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사상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많다.
이렇듯 지금의 한국 사회야 말로 한국 사회가 사상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가 쌓아 올린 노력의 높이만 생각해 봐도 그렇다. 그들은 대개 단절없는 자신의 문학의 역사를 길게 가지고 있다. 2천년전의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천년후의 사람이 논한 것을 현대의 사람이 읽고 공감하는 것이 가능한 환경이다.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한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고전으로 거듭해서 읽히는 선조의 책이 뭐가 있는가? 세종이나 이황의 에세이는 모두가 읽는가? 그 유명한 정약용이 정말 대중적 베스트 셀러 수준에 있는가? 원효의 사상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아는 것인가? 그들은 사실 대개 플라톤이나 세익스피어보다 낯설지 않은가? 서구의 지식인들이 19세기나 18세기의 철학자나 과학자를 책을 통해 친구사귀듯 하는것과는 큰 차이가 있지 않은가? 한국인은 지금 누구에게 무엇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는가?
한국인은 학벌자랑을 좋아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꼭 읽어야 할 책 백권을 읽은 것을 자랑하는 일은 별로 없다. 사실 허세에 찬 선택이 아니라면 그런 목록이 한국에서 존재할 수나 있는지 의심스럽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같은 책을 추천하면 그것으로 철학전공이 아닌 일반인이 뭔가를 배울 수 있을까? 이런 현실이 우리 사회에 천박한 성공만 넘쳐나는 이유가 아닐까? 그것이 학교 교과서안의 사상과 현실의 괴리가 그토록이나 큰 이유가 아닐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상이란 사회적 구조물이다. 한국의 기성 세대가 신 세대에게 물려줘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유산은 포용력있고 지혜를 주는 사상이면서도 이해가 쉬운 사상이다. 그것이 우리를 한국인이게 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우리가 뭘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뭘 가지고 있으며 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되는지, 우리는 왜 안심하고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안되고 있다. 그런 기초적 부분의 중요성은 오히려 점점 잊혀지는 것같다. 그것이 반드시 대학만의 역할은 아니라고 해도 인문학은 오히려 대학에서 망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이공계 출신의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사상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조선이 망한 것이 벌써 백년전인데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점에서 조선 말엽처럼 불안하다. 누구는 미국으로 누구는 유럽으로 누구는 일본으로 누구는 중국으로 뛰어가는 가운데 자신을 잃을 것같다. 한국 사회는 사이비 종교가 넘쳐나고 범죄적인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오히려 집단적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려고 나선다. 권위주의를 좀 완화시켰나 하면 금방 급진주의자들이 날뛴다.
다시 말하지만 정권이든 인생이든 성패와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은 사상이다. 우리가 그걸 잊고 숫자 하나, 팩트 하나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시야가 아주 좁아진다. 코앞의 일밖에는 보지 못하는 아메바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에 실패할 때 우리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개혁이나 진보도 시간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후퇴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정권도 우리의 인생도 결국은 얼마지나지 않아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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