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장에 정을 붙이는 이유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개는 친척이나 친구같은 사람이 큰 이유일 테지만 오래된 가게와 지역의 음식이 그 이유일 수도 있고 그것이 강이나 산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숲과 산이 어떤 지역에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나는 바다도 좋아하지만 아무래도 숲이 좋고 산이 좋다. 숲속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나뿐 만이 아닐 것이다.
전주에 살게 된지도 몇년 되었고 전주 옆의 모악산에 가 본것도 이제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 몇년간 모악산은 나에게 그리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명한 금산사쪽으로 가는 것도 미술관쪽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깊은 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모악산을 보다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집에서 보다 가까운 중인동쪽의 주차장에서 모악산을 오르는 길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금산사쪽과 미술관쪽은 왠지 관광지 같다. 하지만 중인동 주차장에서 오르는 모악산은 경사가 완만한 면도 있고 산밑의 풍경도 정겨워서인지 내 마음에 든다. 친구같고 가족같달까.
최근에는 딸아이의 일로 서울에 갈일이 있어서 하루를 양산의 두물머리와 문호리리버마켓에서 보낸 일이 있었다. 두 곳다 추천해 주고 싶을 만큼 잘 정리된 좋은 곳이었고 나는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도권처럼 사람많은 곳에 있는 강변에는 모악산에 있는 호젓함이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두물머리와 리버마켓이 좋으면 좋을 수록 더 모악산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모악산에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아주 많다. 최근에 내가 가는 길은 중인동 주차장에서 금선사를 지나 연분암으로 오르고 매봉길을 따라 다시 중인동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주차장을 출발해서 청하서원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청하서원의 담길이 매봉길이 시작되는 곳이라 나처럼 매봉길을 거꾸로 오면 이 곳이 하산하는 출구가 된다.
청하서원을 지나 포장된 도로를 따라 쭉 걸어올라가면 금선암이 나온다. 이곳에서 금선암쪽으로 해서도 모악산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가 본적은 없다. 내가 가는 길은 연분암쪽으로 해서 가는 길이다. 연분암 표시가 된 쪽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연분암까지는 아주 길이 좋지만 그 다음에는 산길이고 경사도 좀 심하다. 어차피 연분암에 다가지 못해서 있는 편백나무 쉼터에 이를 때면 이미 이마에는 땀이 난다. 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편백나무 숲이 있는데 그냥 갈 수는 없다. 벤치에 앉아서 물을 마시고 땀을 닦는다. 그리고 가져간 책을 조금 읽는다. 숲속에서 아주 긴 독서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페이지를 읽어도 숲속에 앉아서 읽는 맛은 확실히 각별한 데가 있다. 숲을 내 서재로 쓰는 느낌. 좀 사치스런 느낌이다.
몸이 식었다 싶으면 이제 다시 연분암으로 떠나야 할 때다. 앞에서 말했듯이 연분암을 통해서 능선으로 올라서는 길은 그 직전의 길이 아주 가파르다. 길은 전혀 위험하지 않지만 나같은 약골은 여간해서는 단숨에 올라서게 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연분암위의 능선에 올라서는 순간을 실질적인 등산의 끝이라고 여긴다. 그 다음에도 주차장까지 돌아오려면 산길을 5킬로는 걸어야 하지만 거기에는 능선에 올라가기 직전의 길처럼 경사는 없고 게다가 내리막길이다. 매봉길도 내가 걷는 것과 반대로 걸으면 나름 등산한다는 느낌을 주는 길이라고 하지만 내가 걷는 식으로 거꾸로 내려오면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산책길 처럼 느껴진다.
지난 번에 이 편백숲에 왔을 때는 뜻밖의 동행을 만났다. 모악산에는 개 한마리가 산다. 처음에 봤을 때는 개가 산속에서 어떻게 살까 마음이 불편했는데 매번 갈 때마다 보니 개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사는지 몰라도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개가 지난 번에는 작정하고 나와 산을 돌기로 한 것이다. 편백나무 숲에서 물을 마시다가 보니 어느 새 개가 내 동행이 되어 있었다.
개는 나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모악산을 올랐다. 이름도 모르는 이 개는 목에 딸랑이가 묶여 있어서 나는 이 개를 딸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헉헉대는 나와는 달리 딸랑이는 종횡무진 평지를 걷듯 잘도 올라간다. 내가 연분암 못미쳐 다시 벤치에 주저 앉자 가던 길을 다시 돌아와서는 내 옆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는다. 개는 마음이 편안한데 내가 마음이 불편했다. 이 개가 나를 따라 집에까지 가자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쏘세지라도 하나 가져올 걸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개가 나를 따라오니 사람들은 내가 개를 데리고 산에 온 줄 알았다. 사실 나도 이 개를 처음에 봤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개가 다른 사람을 따라가고 있을 때
"저러다가 개라도 잊어버리면 어쩌려고 줄도 안매고 산에 개를 데리고 오는가. 조심성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딸랑이를 보고 귀엽다고 말하면서 누굴 따라왔냐고 감탄성을 흘린다. 딸랑이를 보고는 반갑다고 자기 개 부르듯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딸랑이는 천연덕 스럽게 앉아서 쉬고 있는 내 다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앉는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내 개다. 몇몇사람들이 나를 흘끗본다. 조심성없는 주인 아니냐는 눈치다. 이거참. 나는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연분암에 도착하기 직전에 있는 벤치에 앉으면 이제 내가 산에 왔다는 느낌이 본격적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는 곳의 높이가 느껴진다. 왠지 약간 속세를 뜬 것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물마시고 땀닦고 독서하는 시간이다. 나는 벤치에 앉아서 짧지만 좋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 번에는 딸랑이도 있었지만.
지난 번에는 이 벤치에 앉아 있을 때 감잎을 따서 감잎차를 만든다는 사람을 만났었다. 바다에 가면 그렇지 않은데 산에 오면 사람들이 처음 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 같이 고생한다는 동지의식을 느끼게 되나 보다. 그러다 보면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하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그게 참 좋다.
연분암은 자랑할만한 모양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나름 모악산의 명소다. 나는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일요일에는 점심에 맞춰 연분암에 오면 국수를 삶아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짜다. 사람들이 그걸 위해 국수나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고도 들었다. 대단한 관광지가 아니라도 산에 올라서 공짜 국수를 먹는다는 건 일요일 하루를 보내는 멋진 방법이다. 기부라는 형식으로 돈을 내도 공짜로 먹은 느낌일 것이다. 산과 숲은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연분암을 지나면 드디어 능선길로 올라가기 위한 경사가 높은 길이 나온다. 어떤 사람에게는 별거 아니겠지만 체력이 별로인 나로서는 체력단련용 코스다. 과장을 좀 하자면 나에게는 거의 암벽등반 수준이다. 오랜만에 헉헉대고 땀도 내다가 가끔은 힘들다 싶으면 주저앉아 버린다. 앉은채로 비탈길을 내려다보면 그것도 나름 맛나는 시간이다. 세상이 이제 아래로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능선에 올라서면 실질적으로 산행은 거의 끝이다. 매봉이 150미터 바깥에 있지만 그곳까지는 평지나 마찬가지고 내려오는 길은 대개 쉽다. 매봉과 반대쪽으로 가면 정상이 있다. 나는 어쩌다보니 모악산 정상은 한번도 못가봤다. 아직은 이정도가 좋다는 느낌이다. 가봐도 대단할 것이 없다는 말도 들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매봉길 전망대에 가서 주변 한번 둘러보는 것이 모악산 등산이다. 이게 지겨워지면 다른 길을 택할까 싶은데 아직은 지겹지 않다. 매봉에는 매봉 전망대가 있는데 매봉쪽의 능선길은 전반적으로 전망이 참 좋다. 매봉 전망대도 내가 머무르는 곳이지만 그늘이 없어서 여름에는 오래 머물 곳은 못된다.
매봉 전망대를 지나서 걷다보면 깊은 산속의 소나무 길도 나온다. 이쯤되면 이젠 거의 등산이 아니다. 평지나 다름없는 한적한 숲길을 걷는 것이다. 길이 평평하거나 약간 내리막길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몇군데는 좀 조심해야 하고 그래서 등산용 지팡이가 있는게 좋다.
지난번에는 딸랑이가 편백나무숲에서 따라오기 시작하더니 매봉전망대를 넘어서 매봉길의 끝까지 나를 따라 왔다. 내가 청하서원에 거의 다 가서야 어느 새 슬그머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딸랑이가 나를 따라 올까봐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오히려 미안해 졌다. 어쩌면 딸랑이는 먹을 것을 바란것도 아니고 나를 따라오겠다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다. 그저 사람이 그리웠고 나를 도와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다음번에 올 때는 쏘세지라도 가져다 줘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음의 빚을 지워서 결국 먹을 것을 얻어 먹는다는 생각을 하니 이게 저 딸랑이가 사는 법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늘은 떠나기 전에 여러번 확인해서 딸랑이에게 줄 쏘세지를 하나 가지고 갔었다. 그런데 등산길을 다 돌고 올 때까지 딸랑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최근에는 만나지도 못한 적은 없었는데 딸랑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렇게 쫒아 다녀도 무엇하나 안 주는 야박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고 나를 피하는 것일까? 아뭏튼 그래서 집으로 올 때도 내 가방에는 여전히 쏘세지가 남아 있었다.
어린 왕자가 밤하늘을 볼 때는 자기 별과 거기에 두고 온 꽃을 생각했다고 한다. 나도 죽을 때까지 전주에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언젠가 먼 훗날 전주 생각을 한다면 분명 나는 모악산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내가 산에 두고 온 딸랑이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딸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추운 겨울은 잘 넘겼는지 죽었다면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나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딸랑이는 역시 사람을 유혹하는 재주가 있다.
'여행 > 전주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주 신시가지 밤산책 단상 (0) | 2018.07.21 |
---|---|
전주에서 가는 목포 기차 여행 (0) | 2018.06.30 |
아래에서 본 모악산 편백나무 (0) | 2018.04.18 |
구이 저수지, 4월의 정서 (0) | 2018.04.17 |
소박한 가게의 미덕 (0) | 2018.0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