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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주 생활

체면과 자신감 그리고 한국인

by 격암(강국진) 2019. 11. 1.

어제는 전북독립영화제 개막식이 전주에서 있었습니다. 개막작으로 유월, 탑차 그리고 다운이라는 작품들이 상영되었는데요 그 중의 하나인 탑차라는 작품을 보면서 한국인의 체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탑차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습니다. 무능력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가 있는 집안에서 할머니가 집을 나갑니다. 딸은 미혼모로 어린 자식을 둘 데가 없어서 탑차에 태우고 다니며 일하는 사람인데 이런 아버지와 함께 엄마를 찾아다닙니다. 찾아보니 할머니는 말도 안통하는 젊은 남미 노동자와 불륜하면서 도피중이었습니다. 그녀는 딸에게 나는 지금이 행복하고 말은 어차피 남편과도 안 통했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이 영화를 그리 감명깊게 보지는 못했습니다. 바람난 아내, 가부장적 남편, 가난으로 찌든 생활, 사회적 억압으로 부터 일탈하면서 자유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내용들이 상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 영화를 보고나서 저는 이 영화의 진짜 주제가 뭘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가부장적 가정? 인간의 자유와 행복? 가난한 가족들의 불행한 일상?


처음에는 이 영화의 주제와 이 영화의 분위기가 충돌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자유로워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할머니는 마지막에 조금밖에 나오지 않으며 사실 그다지 행복한 얼굴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에게도 떳떳하지 못한지 차분히 이야기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화를 내면서도 이해해 주려고 하는 딸의 얼굴도 사실은 그다지 후련하게 납득이 가고 인정하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불행한 얼굴이었죠. 만약 자유가 그리 좋은 거라면 할머니의 행복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하며 최소한 할머니는 진짜로 행복해 보여야 하는데 제게는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문득 만약 똑같은 줄거리를 가지고 서양배우를 써서 서양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면 느낌이 전혀 달랐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진짜 행복해 보였겠죠. 아니 이야기의 출발부터 조금씩 틀어져서 전혀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같습니다. 할머니가 도피를 하는게 아니라 당당하게 이혼하자고 하는 장면부터 나왔을지 모르죠.


이쯤에 이르자 이 영화의 진짜 주제가 되어야 할 것은 한국인의 체면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이 감독이 의도한 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생각해 보면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은 주로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의 표면적인 부분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주로 체면때문에 불행한 거였죠. 


물론 그게 다는 아니겠습니다만 남편은 아내가 보잘 것없는 남자와 도망간 남자가 되는 것에 체면이 상하는 것이고, 딸은 남들에게 효녀로 보이고 좋은 엄마가 되지 못한다면 체면이 상하는 것이며, 엄마도 사실은 자신의 사는 모습이 체면이 서질 않으니까 온전히 행복하질 못하는 겁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자기 사는 모습에 자신이 없습니다. 라면만 먹고 살아도 '나는 라면이 좋다, 내 인생 내가 결정했으며 나는 지금의 내 삶과 내 결정에 대해 진심으로 후회하지 않고 떳떳하다'라는 자세가 없지요. 사실 한국인들은 주로 사회적이고 대중적인 기준으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보일 지에 많은 시간을 씁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인의 체면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던 겁니다. 


한국인들은 흔히 이렇습니다. 


자동차가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 자동차가 없다고 말하면 체면이 상하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합니다. 직장이 없는 것이 불편한 것보다 직장이 없다고 말하면 체면이 상하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합니다. 작은 집에 사는 것보다 큰 집에 살지 못해서 체면이 상하는 것이 훨씬 더 불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하고 배신을 하고 나서는 체면때문에 더 나쁜 짓을 합니다. 바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겁니다.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가서는 사과를 하는 척 하면서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배신당한 사람이 배신한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려줘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그걸 외면하면 이젠 피해자가 이상한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그 가해자들은 실은 피해자의 마음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체면이나 세상의 시선같은 자기 입장만 중요합니다. 강간범의 부모가 강간한 것도 모자라서 저 여학생은 원래 헤펏고 내 자식을 먼저 유혹했다라고 까지 말해야만 하는 겁니다. 


자기중심적이나 이기적이라는 말은 종종 모순된 의미를 가집니다.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은 자기만 생각한다는 것인데 체면을 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타인 중심적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에 집중하지 못하고 남들의 감정과 시선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가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사실은 주로 남의 시선에의해 만들어 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때와 자신만 있을 때의 태도가 극단적으로 다른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같은데에 나가면 실제로 행동이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은 본래 어떤 이유때문에 직접적으로 불행하고 우울해 하는 것보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하는 마음때문에 불행하고 우울해한다고 하더군요. 동양이나 서양이나 보편적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사는 삶에 자신이 없는 것은 한국인이 유독 심한 것같습니다. 


체면에 휘둘리는 삶이란 그야말로 험난 합니다. 대중적 기준, 남의 시선이란 마치 SNS속의 삶처럼 허풍이 가득하기 마련입니다. 10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먹고 온 사람은 그걸 자랑하면서 누구나 그 정도쯤은 먹지 않냐고 말하고, 10만원짜리가 역시 좋기는 좋다고 말하며, 오백만원짜리 가방을 드는 여자는 누구나 이런 가방 하나쯤은 있지 않냐고 말합니다. 그게 다 허풍인데 말입니다. 체면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대화란 그래서 의례 허풍대회를 벌이는 거나 비슷합니다. 


그러니 남의 시선을 기준으로 '보통'이 되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닙니다.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의 삶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말도 안되게 바뻐서 다른 일에 쓸 시간 즉 진짜 삶을 살 시간은 전혀 없습니다. 명품 브랜드 옷이 뭐가 좋은지 알지도 못하면서도 브랜드 있는 옷을 엄청난 돈을 주고 사야 하고 남들 앞에서는 전혀 무리하고 있지 않은 척도 해야 합니다. 가고 싶지 않은 학교도 체면상 가서 학벌 체면이 구겨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결혼도 주로 폼나는 상대랑 합니다. 이런 식이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짜 자기중심적 인간이란 체면보다는 자기 감정을 살피는 사람이며 자기판단으로 이뤄진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후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적어도 체면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보다는 남의 감정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자기가 그러하듯 남들도 그렇게 살 권리가 있으며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니까요. 살다가 남에게 미안한 짓은 안하고 살고 싶지만 어떻게 그런 입장이 되면 자기 합리화는 지나치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화가 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이 식어서 헤어져야 한다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이유를 백가지 말할 수 있지만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결국 이 모든 이유의 중심에는 내 감정과 내 판단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쩔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는 거니까 결국은 내 책임이 맞는 거죠. 


내 감정대로 살아라라는 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그걸 폭주나 분노의 폭발과 동일시 합니다. 그래서 주로 영화탑차에 나오는 사람처럼 불륜 도피를 하거나 혹은 다른 어떤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을 자유를 말하고 자기 감정대로 사는 사람의 예로 종종 등장시킵니다. 하지만 거기에 응당 있어야 하는 데 없는 것은 당당한 태도와 자신감 그리고 평정심입니다. 흥분하고 분노해서 거기에 휘둘리는 것은 자기 감정대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를 지키면서 살고 싶다면 우리는 분노와 공포에서 벗어난 평정심을 지키려고 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선택만이 진짜 나의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믿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체면이라는 말로 우리를 서로 서로 얽어 맵니다. 모든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도 아니고 모든 남자가 부엌일 안하는 것도 아니며 한다고 해도 체면 상할 일이 아닌데도 그 체면이라는 말은 관습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어떤 역할들을 당연한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 억압이 마치 법률이 범죄를 막듯 인간이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게 만든다고 믿는 것같습니다. 그런 억압이 없어지면 모두가 가족을 버리고 불륜을 저지르고 삶의 질은 엉망이 될테니까요. 


하지만 법이 없으면 정말 모두가 미쳐 날뛰면서 살인과 절도를 저지를까요? 게다가 요즘 세상에 맞춰서 계속 개정하는 법도 세상일을 다 다루지 못하는데 어느 시절에 만들어진 법도며 체면이 요즘 시절의 현실과 맞겠습니까. 그러니 관습적 선입견에 사로잡힌 체면이라는 것이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체면이라는 것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지요.  


우리에게는 사실 진심이 있습니다. 체면때문에 가족에게 친구에게 이웃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하는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그들을 좋아하니까 그들에게 잘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쓸데없는 형식과 체면이 과해지면 진심이 가려집니다. 고마운걸 고맙다고 하지 않고 받을 걸 받았다는 식이 됩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해주고 싶어서 해준 것을 의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하게 됩니다. 역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망할 놈이 체면이며 허풍때문에 말 한마디로 가족이 박살 날 수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체면이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들은 정말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물론 관습이야 어디나 있으니 서양은 서양의 관습때문에 고통받고 있겠습니다만 한국도 이젠 좀 자기를 믿고 선입견과 관행과 체면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감정적 폭주가 자유가 아닙니다. 불륜이 자유가 아닙니다. 남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기를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모두가 이젠 좀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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