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의 일이다. 어느 날 내 블로그에 접속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내 블로그에는 3천개정도의 글이 있는데 그걸 모두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몇일지나지 않아 블로그는 정상화되었지만 그 일은 내게 백업을 할 필요를 느끼게 해주었다. 문제는 단순한 백업도 쉽지는 않지만 그런 백업은 별 의미도 없다는데 있었다. 수천개의 글을 하드디스크에 저장해 놓고 잊어버리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옛 글을 읽고 소감을 말씀해 주시는 친철한 방문객들 덕분에 나는 가끔 내글을 다시 읽고는 한다. 댓글을 보고 나도 내가 무슨 글을 썼더라하는 마음으로 그 글을 다시 읽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주 많은 글들은 나를 포함하여 아무도 읽지 않은 채로 그저 올려져만 있다. 그런 글들을 하드디스크 안 어딘가에 처박아 두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백업용 블로그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다른 블로그를 하나 개설해서는 매일 매일 글을 하나씩 읽으면서 옮기는 것이다. 설사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블로그 두 개가 동시에 문제가 생길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러다 보니 이 작업은 일종의 퇴고작업이 되어버렸다. 거의 손대지 않고 그냥 옮기는 글도 있지만 어떤 글은 상당히 고치면서 옮기게 된다. 특히 연작에세이같은 걸 다시 읽으면 아무래도 많이 고치고 싶어진다. 그걸 쓴 이후에 생각도 더 했고 책도 더 읽었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가 내 정신의 자식들이니 이왕이면 조금 더 말끔한 모습으로 완성시켜놓고 싶다. 설혹 나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도 다시 읽지 않는 글이 된다고 하더라도 너저분한 모습이면 미안하다.
매일 매일 내 글을 읽고 옮기면서 나는 써둔 글이란 자산이자 부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생각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도 그 생각들을 모두 머릿속에 담아 둘 수 없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 아 이런 관점도 있군하고 생각하게 되는 일이 많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는 오늘날 우리는 뭘 써야 할 것인가라는 글을 옮겼다. 글쓰기에 관한 이 글을 읽어보니 그 내용인 즉슨 사진기가 나온후 회화가 사실적 그림에서 추상화로 변했듯이 사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글쓰기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사실화를 그리듯 정확한 묘사를 하는 글쓰기는 이미 시대에 뒤쳐진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필자를 들어내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 그래야 본인에게건 독자에게건 의미가 있는 글이 된다. 내 글이지만 읽어보니 상당히 그럴듯하다. 이런 생각을 전에 했었다.
예전에 써둔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 내 블로그의 이름은 나를 지키는 공간이다. 요즘은 써둔 글이 아주 많으면 그걸 인공지능이 학습해서 마치 필자처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겨우 몇천개의 글로 어느 정도나 자연스러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이 블로그는 나 자신이 될지 모른다. 이 모든 것을 읽고 기억하는 인공지능이 나에게 나의 생각을 말해주는 것이다.
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는 이미 어느 정도 그렇게 이 블로그를 쓰고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한 생각을 하다보면 요즘은 문득 키워드로 내 블로그 안에서 내 글을 검색하게 된다. 그 주제에 대해 나는 어떤 생각을 했었는가를 다시 읽어 보게 된다. 내 블로그는 이래서 나의 비서같은 역할을 한다.
블로그안에 글이 천개가 있건 만개가 있건 그게 돈이 되나요라고 물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돈은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십년 이상을 써온 이 글들을 보며 이런 시간낭비는 아깝지 않냐고도 할 것이다. 확실히 나는 엄청난 시간을 써서 글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이 글들 때문에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과 뼈로 된 나보다 이 글들이 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일해서 건물을 사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 업적을 세우며, 어떤 사람은 아이들을 키우고 회사를 키웠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그 건물과 업적과 아이들과 회사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글이란 훨씬 더 개인적인 것이다. 그래서 훨씬 더 나 자신의 일부로 애착이 느껴진다. 많은 글을 읽고 정리하다 보니 써둔 글이란 수없이 만들어 둔 자식처럼 부채와 같은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나의 자산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대학교때부터였다. 나는 어린 시절에는 일기도 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쓰기가 있는 삶은 조금 더 재미있고 보람찬 삶이었다. 글쓰기를 시작하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뭘 했든 내 삶은 대부분 그저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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