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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목적이 없는 철학

by 격암(강국진) 2022. 3. 17.

2022.3.17

나는 철학책을 틈틈히 읽는 과학도이다. 그런데 철학책을 읽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흔한 오류가 있다. 그 철학적 사색의 보편성에만 너무 주목하는 이 오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변 철학도 사회적 시대적 배경의 산물이지 시공을 초월하는 답이 아니다. 어떤 철학을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절대적 진리처럼 생각하는 것은 마치 무슨 약에 쓰는 치료제인지도 모르고 약을 먹는 것과 같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젊었을 때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은 철학을 마치 과학처럼 하나밖에 없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로 생각한다. 물리학의 경우 3천년전이건 만년전이건 우리는 자연법칙이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물리학은 이런 의미에서 시공을 초월해 있다. 프랑스와 한국에서 물리학이 다르지 않고 3천년전과 지금이 물리학이 다르지 않다. 물론 하나도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리학은 그간 발전해 왔고 19세기의 사람들은 양자역학같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뉴튼의 계산은 기본적으로 시공을 초월해서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철학도 세상에 대한 하나 밖에 없는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처럼 곧잘 생각한다. 이에 따르면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이 세상에 대한 진리를 보게 된 사람의 기록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명한 고전 철학서를 어렵게 어렵게 읽으면서 그 안에 있을 것같은 진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충분한 것처럼. 실제로 뉴튼의 물리학을 공부할 때 뉴튼의 어린 시절이나 뉴튼의 애정사나 뉴튼의 재정상태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과학은 적어도 철학에 비해서는 훨씬 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밖에 없는 세계에 대한 관찰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그렇지 않다. 철학은 언제나 질문에 대한 답이고 어떤 병증에 대한 처방이다. 그러므로 질문이 뭔지 모르고 병증이 뭔지 모르면 그 답을 쓸 수 없고 그 답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리고 병증을 알자면 그 사람과 그 시대를 알아야 한다. 

 

사실 이런 착시가 일어나는 것은 대개 애초에 그런 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걸 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들은 명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어떤 세계관을 아주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 세계관이란 아무리 당연해 보이고 철두철미해 보여도 수없는 사람의 정확한 관측데이터와 수학적 엄밀함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물리학적 우주관처럼 엄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는 그런 세계속의 우리가 가지는 문제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래서 어느새 정신차려보면 마치 만년전의 원시인이나 3천년전의 고대인이나 지금의 현대인이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혹은 세상에 그 문제들밖에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우리는 뭔가를 배우는 동시에 뭔가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 세계관에 갇혀서 장님이 되는 것이다. 이러면 여러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혼란만 일어날 뿐 정리는 거의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낭만주의의 뿌리를 쓴 이사야 벌린은 18,19세기의 낭만주의를 그 이전의 계몽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으로 이야기한다. 뉴튼의 물리학의 성공과 프랑스 혁명의 상처속에서 사람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 보편론이 아니라 단 하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낭만주의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실존주의가 된다. 이런 낭만주의적 흐름은 오늘날에도 이어졌다. 세상 모두와 다른 문화적 소수자로서 세상을 살아도 그것은 멋진 일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은 과거에는 없던 일이다. 현대인들도 낭만주의의 자식들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심각해 진 서구 사회의 병증은 논리적이고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세계, 그런 시스템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압살하는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철학자들은 서로 다른 답들을 내놓았을 수도 있지만 다수가 비슷한 문제를 보고 그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고 한 것이다. 반면에 이데아론을 주장하고 시인을 싫어했던 플라톤 같은 사람은 당대의 사회가 가진 혼란이 싫었을 것이다. 혼란속에서 질서를 수복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객관성과 보편성 그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를 강조하게 된다. 

 

과학과 수학이 발전한 서구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동양에서도 같은 논의는 있다. 객관적 세계를 강조하는 주자학과 내 안의 양지를 강조하는 양명학의 관계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관계와 비슷하며 불교안에서도 경전을 강조하는 교종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종이 이런 관계를 가진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우연한 일도 아니다. 실제로 서구에서도 공자나 맹자가 크게 인기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그래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맹자의 설에 대한 표절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서구 계몽주의의 아버지는 공자였고 동서양의 교류가 있는 가운데 양쪽 모두에서 이 두가지 흐름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런 이야기도 아주 단순화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 즉 각각의 철학자들은 설혹 같은 시대를 살아도 자연히 약간씩은 서로 다른 문제를 풀었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아주 일찍 들었을 법한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고 나는 오랜간 여러가지 책들 사이를 괴롭게 헤매었다. 나에게 있어서 구원이 되었다고 할만한 책은 두 권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는 바로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ZMM)이고 또 하나는 과학 혁명의 구조다. ZMM의 경우는 철학책이기 이전에 소설책이므로 자연히 주인공은 그냥 사색을 즐기지 않는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 훨씬 더 분명하다. 나는 후일 ZMM의 철학이 박이문이 쓴 현상학과 분석철학에서 소개한 메를로 퐁티의 생각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결국 병증이 같으니까 처방이 비슷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표절해서가 아니라 말이다. ZMM을 읽으면서 나는 자연히 철학은 어떤 문제에 대한 처방이라는 것을 되새기게 되었다. 

 

과학혁명의 구조같은 경우에는 물리학자로서의 내 공부들이 도움이 되어서 각별히 재미있게 읽었던 것같지만 결국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로 인해 여러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쪽이 맞으면 반대편은 틀린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리처드 로티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1979년에 쓴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마음이나 정신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었다는 메세지를 전한다. 그래서 자연히 현대철학은 그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하는 인식론중심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자명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오히려 데카르트의 발명에 가까우며 이는 현대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더 많은 정보가 축적되는 시기에 인간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컴퓨터의 발달로 정보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요즘 우리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마음에 대한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된다. 인간의 마음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에는 마음은 더이상 인간의 본질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언제나 진짜로 중요한 것은 병증이고 진단이며 질문이다. 제대로된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답을 찾을 수도 없고 남이 준 답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질문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답이 이해가 안되도 큰 문제는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질문은 더이상 나에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질문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스스로 답을 내보려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따금 그 대단한 철학자들의 답이란게 우리의 답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가 질문을 알 때 왜 그런 답들을 사람들이 내는지는 더 이해하기 쉽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질문은 대개 세계관속에 교묘히 숨겨져 있다. 그 세계관의 다른 이름은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질문을 쉽게 보기 어렵다. 고금의 철학자의 책을 읽는 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정신을 확대하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가둬버리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 철학자와의 대결이다. 그 세계에 갇혀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모든 철학은 어떤 배경을 가진다. 어떤 패러다임을 가진다. 지금 당장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성이라는게 세상에는 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는 문제가 있고 따라서 우리는 몇천년전의 종교지도자나 사상가가 남긴 말안에서도 여전히 교훈을 얻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고전들을 읽는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해석은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차이점도 있다. 우리는 프랑스인의 사랑과 한국인의 사랑은 서로 다르다고 하면 수긍한다. 심지어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다르다고 해도 수긍한다. 그러면서 몇천년전 사람은 우리와 같은 걸 느낀다고만 쉽게 수긍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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