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0.26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문화적 차이는 다른 판단을 하게 만든다. 표면적인 대의명분보다 정치적 이합집산과 새로운 정권의 창출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이 문화적 차이다. 그리고 문화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한국정치를 새롭게 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통상 한국의 정치를 보수와 진보내지 보수와 민주의 대립구도로 보지만 그것은 이제 너무 낡은 것이 되었다. 민주와 촛불군중의 태생과 문화는 다르다. 이제 한국의 정치는 보수와 민주의 이분법이 아니라 보수와 민주 그리고 촛불군중의 3분법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오랜 기간 한국의 정치를 공적으로 양분해 온 것은 보수와 민주세력이었다. 보수는 그 기원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등 해방직후의 기간, 군사독재의 기간에 두고 있으며 이때문에 민주세력으로 부터 종종 친일파의 후예라고도 말해진다. 해방이후 미군정에 의해 살아남은 친일파 세력이 주축되어 커온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행동이다. 단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의미있게 되는 것은 성공한 사회적 행동때문이다. 이렇게 말했을 때 보수를 존재하게 한 핵심적 행동은 '군사쿠데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사독재의 탄생에 동조하고 그것을 지키는데 동조한 세력이 바로 보수다.
보수는 한국 전역에서 지역적 경제적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는다. 하지만 또한 보수를 지지하는 상당수는 저소득자, 저학력자, 노령세대인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가장 보수색이 높은 부산, 대구가 전국에서 가장 평균소득이 작은 도시인 것만봐도 알 수 있다. 보수는 스스로의 기원을 산업화시기로 보는 것을 더 선호하며 이때문인지 경제에는 자신감을 보이지만 사실 지난 반세기동안 보수가 내놓은 대통령은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였고 이들 정권기간동안 경제는 좋지 않았다. 보수가 반복해서 불러오는 꿈은 낡았다. 그들은 그 기원이 지독히 가난했던 후진국시대이기 때문인지 여전히 쌀밥에 고깃국먹는 것을 꿈으로 여기는 집단이며 잘 해봐야 돈을 많이 버는 것이 꿈인 집단이다. 보수는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래서 그 돈으로 뭘할까가 없다. 남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사는 사람들같다. 어쩌면 그래서 저소득층, 저학력층 그리고 노년층에서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와 대립하는 민주세력은 그 기원을 주로 1980년대의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투쟁에서 가진다. 다시 말해 이들이 정치집단화하게 된 행동은 바로 80년대의 민주화투쟁이었다. 물론 이들은 어느 정도 그 전투에서 성공했으며 그 절정은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이었다. 이들의 몸통은 흔히 386세대로 불리는 사람들인데 386세대란 1990년대에 30대이고 80년 학번을 가진 사람들이며 60년대에 태어난 사람을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다. 386세대란 사실 흔히 말하는 베이붐 세대이며 인구분포로 봐도 한국 인구의 중심허리를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자연히 이들은 물자와 문화소비의 중심이었고 이들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퇴직을 함에 따라 한국 사회는 크게 요동쳤다. 이런 구도로 보면 386세대가 보수세대와 충돌한 것은 결국 80년대 당시의 기득권 세력과 숫적으로 교육적으로 우위에 있던 당시의 젊은 세대가 보편성을 놓고 충돌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당시의 기성세대는 군대문화를 유지하려 했지만 외국 학문을 배운 다수의 젊은이들은 더 많은 자유와 인권을 세계적 보편성 수준에서 요구했다. 이때문에 그들은 보편과 객관을 매우 강조한다. 민주세력은 한국을 민주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키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없이는 한국은 군부독재가 지속되는 후진국으로 남았으리라는 것이며 따라서 필리핀이나 미얀마같은 국가로 남았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여기서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를 끝낸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다. 해방이후 30여년이 지나자 민주화투쟁이 벌어졌듯이 80년대의 민주화투쟁으로부터 다시 30년이 지나자 한국에는 새로운 종류의 투쟁이 나타났다. 사실 한국의 정치는 적어도 21세기에 접어든 이래 촛불군중에 의해 변해왔다. 그들은 박근혜 정권을 용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수준을 여러단계 격상시켰다. 이들은 다른 무엇보다 인터넷의 보급에 따른 온라인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단이며 아래에서 기술할 것처럼 그들의 문화와 꿈은 민주세력과도 그리고 보수세력과도 같지 않다. 즉 촛불군중은 반드시 민주세력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촛불군중을 따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을 위한 역사가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는 국제시장같은 류의 산업화 문화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랑하고, 민주세력도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같은 민주화 컨텐츠를 통해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자랑하는 문화물을 만들어 왔다. 이에 비하면 촛불군중의 정체성을 인식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는 아직 별로 누적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언젠가는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영화로 만들어져야 한다.
우선 80년대의 민주세력의 투쟁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민주세력의 투쟁은 군사독재정권과의 싸움이었고 결국 폭력투쟁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면서도 어딘가 반사회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자주적인 투쟁이었다. 그것이 반자주적이었던 것은 당시의 투쟁은 상당부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투쟁이었는데 전두환같은 독재자를 스스로의 힘만으로, 스스로의 절차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는 국내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사회적이란 말은 이렇게 기성절차를 긍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 전두환, 노태우는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같은 말로 사법당국에 의해 옹호되었다.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전두환은 사면복권되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지금보다도 사법적 판단이 맘대로였던 시대였다. 80년대의 한국청년들은 오늘날 세계인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면서 군부와 싸우는 미얀마인들과 닮아있었다. 그들은 미국의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유럽철학자의 책을 읽으며 한국의 바깥을 꿈꾸고 그것을 지향했다.
촛불군중의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이와 많이 다르다. 그들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과정을 통해 정권을 퇴진 시켰고 폭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대통령이 아직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도 국회와 사법부가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정권을 바꿨다. 촛불군중에게 게임의 법칙은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은 훨씬 더 강하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미국이 뭘 해줬으면 좋겠다거나 독일이나 프랑스가 뭘 해줬으면 한다는 생각은 사람들에게 전혀 없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바꾼다는 생각 뿐이었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가장 큰 의의는 이렇게 한국인의 자신감과 자주성이 들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법을 어기는 일 없이, 절차대로, 국민은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이는 기성 정치인들의 사고를 국민들이 앞지른 사건이었다. 보수정권은 물론 당시의 야당이었던 민주세력도 평화적인 집회로 박근혜 탄핵에 성공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오히려 촛불집회의 뒷켠에서 따라오는 판이었다. 야당조차 촛불군중이 말하는 탄핵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절대 되지 않을 것같은 일이 일어남으로해서 한국의 정치는 이제 완전히 격상된 것이다. 정치적으로 말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된 순간은 바로 촛불군중이 박근혜 탄핵에 성공한 그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정치에서 대통령직선제를 부정하거나 박근혜 사면을 거론하는 것은 역사적 이해가 없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민주세력이 이룬 가장 큰 성과였으며 그 결과가 대통령직선제였다. 즉 대통령직선제에 의한 대선을 불복하거나 대통령 직선제를 부정하는 것은 이 피와 희생의 역사를 뒤집는 일로 볼 수 있다. 그나마 1987은 이미 30년도 넘은 예전의 일이지만 박근혜 사면은 촛불군중이 이룬 가장 큰 성과이며 아주 최근의 일이다. 그걸 사면복권으로 뒤집는다면 그것은 한해내내 거리를 뒤덮었던 촛불군중의 의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이다. 누가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그걸 정치인들 몇몇이 모여서 결단하면 되는 일일까? 대선불복과 박근혜 사면은 비슷한 선상에 서는 무거운 행위이며 정치적인 자살이 될 수 있는 행위다.
촛불군중은 보수와 다를뿐 아니라 386 민주세력과도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군부쿠데타와 그것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집회라는 각각의 사건들이 일어난 시대와 당시의 한국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세력은 군사독재와의 투쟁에서 나온 탓인지 문화적으로 외세 의존적인 군인과 같다. 군부독재정권이 신문, 방송을 장악할 때 고작해야 대자보나 붙이고 전단지나 뿌리던 그들은 중앙의 메세지를 퍼뜨리고 중앙의 명령에 모두가 복종하는 시스템을 체화하고 있다.
계몽주의적이며 보편과 객관을 강조하는 이들의 태도는 다시 말해 너무 많은 사안들에 대해 객관적 선택이 존재하고 따라서 가장 똑똑하고 논쟁에 이긴 사람의 말에 모두가 복종하는 것이 공평하다는 식이다. 즉 대다수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보고 중요한 판단을 소수의 사람들이 밀실에서 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상명하복의 시스템에 민주세력은 익숙하다. 그들은 열린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행할 능력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전두환군부독재세력같지는 않다고 해도 21세기에서 뒤돌아보면 그들도 비민주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종종 스스로는 그걸 이해 못하는 것같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김대중, 노무현 민주정권 10년을 거친 이후 다시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시기를 거쳐야 했던 이유이며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를 겪었음에도 현정권이 아직도 비판받고 있는 이유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촛불군중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꾸 문을 걸어잠구고 엘리트주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민주세력은 흔히 우리는 법이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무슨 법을 만들고, 무슨 위원회를 만들면 그 고정된 시스템이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저 필요악일 뿐이다. 탁상공론으로 이리저리 법을 바꾸고 규칙을 정해서 시스템을 복잡하게만 만들면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사법개혁이건 성차별문제건, 교육이든, 부동산이든, 교통이든 말이다. 민주세력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며 국민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고정된 규칙으로는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 망각한다.
얼핏보면 박근혜를 탄핵한 촛불군중은 보수와 대립하는 것같다. 그렇기에 이들은 종종 민주세력과 혼동되고는 한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가 만들어 내는 민주세력과 촛불군중과의 갈등은 이미 노무현 정권시기부터 여러모로 들어났다. 민주 세력의 문화와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던 노무현 지지정당인 개혁당이 당시 민주당과 열린 우리당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던가? 당에서 유시민이 받았던 대접이 문제가 아니다. 후일 대선후보가 되고 패배하여 이명박 정권을 시작시킨 정동영의 행보는 인터넷으로 정당에 참여하는 시민의 영향력을 되도록 줄이는 것이었다. 정작 노무현은 노사모로 대표되는 인터넷 군중이 만들어 낸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말이다. 인터넷 정치참여는 촛불군중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는 촛불군중과 민주세력의 충돌이라고 봐야 한다. 촛불군중의 한단계 진보한 민주성도 그들이 인터넷에서 평등한 관계로 만나고 일을 만들어가는 온라인 문화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소통한다. 애초에 하나의 대선후보를 탄생시키고 지지하는데 개혁당을 필두로 여러개의 정당이 있었다는 것, 그 중에서 민주당은 심지어 나중에 노무현 탄핵에 동참했었다는 것은 이 문화적 간극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를 보여준다.
노무현정권당시 노무현을 탄핵하려는 보수의 시도가 있었는데 그건 그야말로 대선불복이었고 이에 분노해서 일어난 촛불집회는 열린 우리당을 과반의석을 가진 여당으로 만들어줬다. 상식적으로 말해 이건 힘없이 밀리는 당시의 청와대에게 힘을 실어주라는 국민의 뜻이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열린 우리당은 보수와 싸우며 대통령을 지키기는 커녕 오히려 청와대와 극렬하게 싸웠다. 그리고 언제나 밀실회의를 하면서 과반이상의 의석을 가지고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분열이 결국 이명박 보수정권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반드시 과거의 일만도 아니다. 지난 총선에서도 하나의 대통령을 지지하는 두 개의 정당이 있었다. 하나는 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이고 또 하나는 열린 민주당이다. 지금의 더불어 민주당도 국회의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왜 개혁이 지지부진한가? 왜 여당의 행동은 여당지지층의 의사와는 차이가 있을까? 많은 여당지지자들이 재난지원금 일괄지급을 주장했지만 왜 홍남기의 기재부는 그걸 88%라는 말도 안되는 이상한 숫자로 좌절시켰는가? 왜 지난 총선에서 열린 민주당이 아니고 더불어 민주당을 찍은 걸 후회한다는 사람들이 가끔 나타날까? 민주세력과 촛불군중의 분열은 계속된다.
민주세력의 꿈, 386세대의 꿈은 사실 21세기에 와서 보면 이미 낡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보편과 객관화를 강조하고 80년대의 가난한 한국에서 외국을 부러워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그들의 꿈은 어떻게 말하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화된 외국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이 꿈은 1980년대에는 진보적인 꿈일 수 있었지만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수동적이고 초보적이라 그 내용이 부실하다. 굶주린 사람이 배불리 밥을 먹는 것을 꿈꾸는 것과 같이 초보적인 사회적 안정성과 인권보장이 없던 사회에서 그것을 꿈꾼 것이다. 물론 굶주림도 해결해야 하고, 인권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더 성장하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제 선진국이 된 한국은 보편과 객관화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것보다 확실한 자기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외교를 할 것이고 우리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이며, 우리는 어떻게 외국에게 이것이 한국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소개할 것인가. 우리는 누구도 만든 적이 없는 미래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민주세력일반은 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규제정책으로 세상의 변화를 오히려 느리게 만들고 섯부른 정체성 정치로 사람들을 갈라놓기만 할 뿐이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 낡은 진보적 의제들에 매몰되는 것이다.
지금의 중년세대, 지금의 은퇴세대가 된 386세대는 지금의 한국에 책임이 있다. 촛불군중과 80년대 민주세력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촛불군중은 상대적으로 지도자나 영웅을 거의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제와 촛불집회의 영웅이라면서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고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지만 세상에는 386 정치가가 너무 많다. 80년대 당시 무슨 노조의 지도자라던가, 무슨 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던가 무슨 변호사라던가 하는 사람들이 지도자로 지목되고 후일 정치인이 되는 일이 많았다. 민주세력내부에서는 이것이 워낙 흔해서 8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파로 왕따가 될 정도다. 알고보면 서로 서로 예전에 전대협이나 학생회니 하는 곳에서 선후배로 얼굴을 익힌 사람들이 그런 끈으로 정치하는 일이 워낙 많다.
그렇게 정치적 기득권이 된 사람들이 만든 한국은 어떤 한국인가? 그 한국은 모두가 돈이야기하고, 좋은 학벌이야기하고, 아파트 평수이야기하고, 출세이야기하는 다양성이 부족한 나라다. 386의 꿈은 획일화되어 있다. 그저 월급많이 주는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 죽도록 일하는 것이 꿈이고 여유가 되면 술이나 마시고 비싼 집을 사는 것이 꿈이다. 그들은 대학생때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정작 그들이 상급자가 되고 중년이 되는 시대가 와도 한국의 권위주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수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타령으로 한국을 과거로 끌고가지만 민주세력도 80년대의 감성으로 한국을 뒤로 끌고 가는 꼰대가 되었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집값만 잔뜩 올라간 한국을 젊은이들에게 물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외국에 대한 컴플렉스에 빠져서 프랑스가 어쩌네, 독일이 어쩌네, 미국이나 일본이 어쩌네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그 나라보다 더 대단한 나라의 꿈은 꾸지 않는다.
촛불혁명은 비로소 한국인에게 외국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자긍심을 주었다. 박근혜 탄핵성공으로 완성된 촛불대중의 자긍심은 이제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한 프랑스도 비폭력 운동의 인도도 노예해방운동의 미국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촛불세대는 세계에서 1등하는 한국인에게 보다 익숙하다. 삶과 정치에 대해서 훨씬 눈높이가 높다. 촛불군중은 훨씬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인생을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즐기려는 태도를 가진다. 그래서 집회조차도 비장함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채워진 문화축제처럼 만드는 것이 촛불군중이다. 그들에게 정치란 높고 우아한 자리가 아니라 필요악으로 해야 하는 자원봉사같은 것이다.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하거나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 더 많은 규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촛불군중의 성향이 아니다. 그들은 인터넷 공간같은 공공공간을 통해서 주어진 문제를 토론하고 분석하는데 익숙하다. 게임의 법칙은 중요하다. 하지만 게임의 법칙이 게임 그 자체는 아니다. 촛불군중은 정해진 법칙 내에서 훌룡한 게임을 하는데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행동에 집중한다. 반면에 민주세력은 법칙만 있으면 게임은 다 결정된 거라는 태도를 지닌다. 그리고 결과가 나쁘면 게임의 법칙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보수와 민주세력은 기득권세력이 되어있다. 그들은 물론 스스로의 정체성을 최대한 넓게 설명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자기에게 끌어들이려고 하지만 어느 정도 둘 다 낡은 세력이 되었기는 마찬가지다. 2021년에도 새마을 운동이나 5개년 개발계획운운하는 것은 한심하지만 80년에 내가 말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정도 한국의 역사에 관련된 것이므로 일반론적으로 한심하다 운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옛날에 그랬는데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다는 것인가? 2021년 현재의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세계에게는 한류열풍이 불고 있다. 후진국들에게는 한국은 이미 모범국가이며 서구와 일본도 어떤 측면은 참 한심해 보이는 때가 있다. 우리는 이제 항공모함을 만들려고 하고, 인공위성을 자력으로 쏘아올려서 우주시대를 열려고 한다. 이 시대를 논하는데 과거는 어느 정도나 든든한 보증이 되는가? 80년대에 길에서 돌을 던졌으니 새 시대의 지도자로 적합한가? 과거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일본처럼 보수적인 나라가 되어 망할 뿐이다. 민주세력과 촛불군중은 같지 않다. 보수도 민주도 지금의 한국을 전부 만든게 아니다. 이 점을 무시하고 계속 답답하게 굴면 정치적 모순은 누적되고 결국 대격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뿐이다. 지금의 한국을 움직여가는 것은 바로 촛불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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