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
진보란 우리가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실은 세상에는 관습화된 진보가 많이 존재한다. 진보라는 말을 선점한 것뿐인 이 낡은 진보들은 그 이름이 진보일 뿐 사실 미래로 가자는 구호를 외치며 세상을 과거로 당기는 역할을 한다. 배워야 할 학생이 오히려 선생을 가르치려고 든다.
진보가 낡아지는 것은 이데올로기란 한번 만들어 지면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어느 시대의 누군가가 미래를 보면서 만들어 낸 고정된 하나의 청사진 같은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반세기나 한 세기전의 혹은 그 보다도 더 이전의 어떤 사상가가 인류가 나아가야만할 바람직한 방향을 그린 비전이 되는 것이다. 이 과거로부터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문명적 유산일 뿐만 아니라 부채가 되기도 하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그 이데올로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비판해내지 못하는 한 그 이데올로기는 후대의 사람들을 과거에 가두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일단 그 이데올로기에 갇히게 되면 우리의 질문은 흑백론적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우리가 도달하기로 약속한 그 미래에 이미 도달했는가 아니면 그에 미치지 못했는가? 이 질문에서 우리에게 미래와 현재와 과거는 하나의 선위에 나열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대개 답은 그 안에 없다. 이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기하학적으로 생각해보자. 과거에 어떤 기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30미터쯤 전진했을 때 그 진행방향을 보며 70미터 앞쪽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보는 것이다. 문제를 1차원적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0미터 지점과 100미터 지점 사이? 그게 아니라면 100미터지점을 통과해서 150미터나 200미터에 있는 것일까? 하지만 사실 우리는 동쪽으로 70미터 지점이나 130미터 지점에 있는게 아니라 동북쪽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그게 아니면 허공을 날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대한 과거의 사상가들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미래를 바라본 그 시각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에서 많은 좋은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래를 직접 살아본 적이 없다. 그들이 미래를 봤다고 해도 그들은 반드시 아주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기 마련이다. 그들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과거의 이데올로기가 말하는 그 목표에 도달했는가 아니면 그에 미치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은 결코 흑백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요즘 진보정당이나 진보정치라고 하면 어떤 문제를 다룰 것같은가? 이 답에 정답은 없지만 노동자문제, 여성 문제, 성적 소수자 문제, 외국인 인종차별 문제, 복지 문제 그리고 환경문제같은 것을 다룰 것같지 않은가? 이제 눈을 감고 시간을 50년전으로 돌려서 그때의 진보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자. 진보는 과연 지난 50년간 변했는가? 혹시 반세기전의 진보나 지금의 진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어째서 오늘날의 진보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냄새가 나는가? 한국에서 반세기는 특히나 그야 말로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었던 시간인데 왜 진보의 주장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같을까? 우리가 아직 과거의 그 아름다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아직 여성은 불평등한 세상에 살고 노동자는 핍박받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설사 50년전에 같은 메세지가 진보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과연 그것이 지금도 진보인지 생각해 봐야 하는거 아닐까? 우리가 만약 우리는 아직 50년전에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지금 우리는 위에서 말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거 아닐까? 우리가 50년전의 위치와 그때 설정한 목표를 잇는 직선 위에 있는 거 맞나?
모든 이데올로기가 필연적으로 이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나 이상을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법칙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패러다임 안에서 과거를 바라본다. 나는 이미 이쪽 패러다임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 가치는 시공을 초월해서 그냥 정상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이 된다. 공화국 국민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왕조에 충성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병자로 보일 것이다. 현대 교육을 받는 사람이 성리학만 공부하고 그에 따라 나라를 운영했던 조선 시대 사람을 보면 바보로 보일 것이다. 이렇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는 시공을 초월하여 옳은 것이고 상대방은 바보고 어리석다라고 선언해 버리면 대개 문제가 해결이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예를 들어 보자. 정규직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어려운 입사시험이라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자신들이 더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똑같은 노동을 하면 똑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 심지어 비정규직의 임금이 더 높아야 한다는 주장을 괘씸하게 생각한다. 이에 대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의 원칙을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스런 법칙으로 여기는 사람은 정규직 사람들을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대학입시를 예로 들어 보자. 누구는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붙었고 누구는 떨어졌다. 갑자기 누군가가 공부할 능력만 있다면 입학시험을 봤건 보지 않았건 무슨 차이가 있냐고 하면 어떨까? 취업도 요즘에는 고시라고 불리는데 취업고시는 대학입시와는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에서 동일노동에 동일 임금의 원칙이 옳다던가 그르다던가 하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학벌을 기반으로 한 차별이 근거없다던가 근거있다던가 하는 것도 아니다. 이상적으로 말해 우리가 같은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을 하면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옳다. 하지만 현실은 그걸 보장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학벌을 보고 사람을 뽑을 때도 있었고, 남녀차별을 회사에서 할 때도 있었으며, 정규직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일도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와서 설혹 그런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할 때에도 우리는 과거를 어느 정도 긍정할 필요가 있다. 물론 과거는 완전히 긍정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시스템을 바꿔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론적으로 이쪽의 패러다임, 이쪽의 시스템의 눈으로 과거를 완전한 악으로 묘사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고 오히려 개혁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왜냐면 이는 과거의 패러다임에 속한 사람들을 포용하는게 아니라 완전히 매장해 버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살던 양반에게 노비따위를 부리던 사악한 인간 운운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어떤 가치도 시공을 초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원칙을 선언해 버리고 그것을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옳은 법칙으로 만들어 버리면 그런 이데올로기는 필연적으로 금방 낡은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 스스로가 나는 시공에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 무관심해진다. 세상 사람들이 이제는 다 양복에 청바지 입는 시대가 되었는데 한복의 올바른 형식에 대한 싸움만 하고 있는 식이 된다.
사실 말그대로의 진보, 진정한 진보는 누구보다 자기 시대에 민감해야 한다. 과거의 누군가의 이데올로기에 갇혀서는 안된다.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지금 어떤 마을의 앞에 있는 댐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 댐이 무너지면 그 마을에 있는 사람은 다 죽을 판이다. 다시 말해 이 마을의 미래에 대해 말할 때 가장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방향은 바로 댐과 홍수에 관련된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이 마을에 가장 필요한 메세지는 댐을 보강하자라던가 홍수를 피해 달아나자는 메세지일 것이다. 댐을 망각하고 논의 되는 문제들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마을길을 넓히자던가 마을 학교를 수리하자는 주장은 홍수가 생기면 하나 마나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댐이 무너지고 홍수가 생긴다라는 것은 외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이고 미래다. 반면에 넓은 길과 수리된 학교를 가진 마을은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다. 비록 우리가 넓은 길과 수리된 학교가 중대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현실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그 외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여력이 남으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보는 얼마나 주어지는 현실과 미래에 집중하는가. 그들은 주로 뭐가 바람직한 미래인가, 뭐가 내가 믿는 진보적 가치인가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세상에 귀를 닫아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미래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할 것같은 문제가 과연 진보주의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다뤄지고 있는가? 예를 들어 인공지능 문제나 전기차 문제를 생각해 보자. 진보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이나 전기차 산업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는가. 우리나라에서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기술에 무지하며 대개 인문계열 사람들 같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진보가 가장 현재와 미래에 민감한 사람들이 맞는가? 그들의 모습은 평생 독신으로 살며 연애한번 안해 본 사람이 연애에 대해 조언을 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는 전과는 전혀 다른데 말이다.
지금 세상을 바꾸는 것은 기업이고 과학기술이다. 빠른 통신의 보급이나 태양광산업의 발전이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같은 분석기사에 사람들은 익숙하다. 그런 논의의 장소에 가서 건전한 노사관계가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바꾼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공자나 맹자의 말처럼 고리타분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반드시 건전한 노사관계에 반대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가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지금 이 세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냥 당위성만 계속 떠들 뿐이다.
어떤 사람이 지역 균형 발전이 진보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그런 쪽으로 힘쓰자고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만으로는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방향을 발견해야 한다. 지역화폐를 보급하면 그런 것에 도움이 될까? 지역중고거래를 활성화하면 도움이 될까? 그렇다면 지역화폐와 지역중거래는 어떤 조건속에서 잘쓰일 수 있게 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결국 지금 세상을 빠르게 변하게 만드는 신기술과 새로운 개념에 이어질때만 의미가 있다.
관습화된 진보는 뜨거운 얼음처럼 모순적인 말이다. 다시 말해 그런 건 없다. 진보가 아니다. 배워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하면 곤란하다. 진보는 남을 가르치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 성찰적이어야 한다. 어딘가에서 백번은 들었을 것같은 낡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세뇌다. 그런 건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진보는 현실과 미래를 누구보다도 더 예민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다. 관습적인 진보가 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일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과거에 갇히게 만드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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