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26
쳇GPT의 인기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를 바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바꿀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인문학이다. 사실 인공지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인공지능 전공자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일에 조금도 종사해 본 적이 없으면서 흔히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스카이넷같은 인류를 멸망시킬 인공지능을 문학적 상상력을 배경으로 이야기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위협은 실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흔히 과장되어지는 이유는 인공지능이 인문학의 상당부분을 공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적 공부에 강하게 의존하던 사람들은 이때문에 인공지능의 등장을 더더욱 인류멸망처럼 느끼게 된다.
사실 이전에도 기계가 공장노동을 대체하자 공장노동자가 기계문명에 반대했던 러다이트 운동같은 것이 영국에서 있었다. 러다이트 운동이 아니라도 축음기와 가수의 경쟁같은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축음기가 나오기 이전에는 노래를 들으려면 가수를 불러야 했다. 그러니까 수많은 3류가수들이 그저 그런 노래로도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축음기가 나오자 1류가수의 노래를 녹음한 것이 더 인기를 끈다. 3류가수들은 영혼이 없는 소리 운운하면서 축음기를 악마의 기계로 불렀다.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변화는 인문학에 있어서 축음기의 등장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오늘날 인문학의 상당부분은 그저 많은 자료를 읽고 그것을 변형하고 요약하여 소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철학을 생각해 보자. 철학을 배운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하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수십명의 철학자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말하면서, 외국의 여러 철학적 흐름에 대한 전문용어를 나열하면서 그걸 적당히 나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철학에 대해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때문에 철학과 철학하기가 다르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미술사나 문학사 공부가 예술 작품의 창작과 다른 것과도 비슷하다.
현실적으로 압도적인 다수의 사람이 아니면 모두가 예술계나 인문학계의 거장같은 창의력이 없고 설혹 있다고 해도 그렇게 인정받지 못한다. 이 부분이 중요한 부분인데 그렇기 때문에 창의력이 잡다한 지식들에게 밀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명작이 무시당하거나 사실 약간의 빛내기만 하면 명작이 될 수 있는 작품이 수없이 많은 엉터리 인문학에 의해 매도당하고 가치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을 수 있다. 사실 엉터리 인문학이라는 말은 좀 가혹한 말로 아래에 더 쓰겠지만 인문학에 있어서 그런 부분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악효과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3류가수도 나름의 가치는 있지만 그들이 모여서 대부분의 1류가수를 사장시키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양으로 보았을 때 인문학의 몸통은 언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하는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언어를 공부한다. 그 단어들을 누가 만들었을까? 조상들이 혹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론가들이나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남의 언어를 배우고 그걸 가지고 부지런히 또 자신의 언어를 만든다. 철학에 언어 이상의 알맹이가 존재하는가라는 원천적인 질문을 제외하더라도 그 알맹이들은 겹겹히 수 없이 많이 만들어진 언어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만들어진 상위의 논평용 언어들로 둘러 쌓여 있다. 그리고 그 언어들이 그 알맹이의 평가나 전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걸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과학혁명에 대한 사례다. 과학계에서 말하는 과학 혁명이란 그 핵심이 사실 수학이라는 언어를 뉴튼 시대이래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 이전의 물리학은 철학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었고 사실 일상어로 전개되었기에 어느 정도 지금의 인문학과도 비슷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수학으로 자연을 기술하기 시작하자 과학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우리가 마술사 비슷하게 여기는 연금술사같은 사람들이 과학자였던 시대에서 우리가 아는 뉴튼 같은 사람이 과학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뉴튼은 최후의 연금술사라고도 말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대과학을 만든 과학혁명은 언어혁명 즉 수학혁명이었다. 우리는 수학화하기 쉬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양을 측정하는 것이다. 양이란 숫자이기 때문이다.
쳇GPT같은 인공지능은 거대 언어 모델이다. 그리고 내가 말하는 것은 이 새로운 도구가 인문학계를 마치 수학이 과학을 바꿨듯 영원히 그리고 완전하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이미 인공지능의 결과들은 우리가 인문학의 몸통으로 여기는 부분을 기계가 해결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책 한권을 순식간에 번역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많은 번역가들은 기계번역이 영혼이 없다면서 비판하겠지만 사실 다수의 번역가보다 기계 번역이 더 우수해 지는 시대는 이미 온 것이 아니라면 코앞에 와있다. 쳇GPT는 지구상의 모든 자료를 다 읽고 번역을 하는 것인데 어떤 번역가가 그걸 언제까지 능가할 수 있을까? 어떤 번역가가 책한권의 주석달기를 순식간에 할 수 있는가. 인문학의 몸통이 언어라고 할 때 그 언어에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쳇GPT가 보여주고 있다. 니체에 대해 대학교수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하는 쪽이 더 좋을 수 있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인공지능에 대한 무한 찬양을 한다거나 인문학을 폄하한다고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 때문에 이제 대부분의 창의력없는 가짜 인문학자들이 설곳을 잃게 될 것이다. 글쓰기의 기준은 쳇GPT가 될 수있다. 즉 당신의 글이 인공지능의 글보다 못하다면 당신의 글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수없는 쓰레기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이제 새로운 직업을 찾아보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 그런 기사를 읽는 것보다는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쪽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 말은 그 반대에도 적용된다. 즉 인공지능이 따라올 수 없는 글을 쓰는 사람의 가치는 훨씬 더 올라갈 것이다. 축음기가 진짜 프로 가수의 시대를 열었듯이 인공지능은 진짜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시대를 열 것이다.
인공지능은 무시할 것도 찬양만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동차가 인간보다 빠르듯 어떤 면에서는 분명 인간보다 뛰어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평균에 대한 것이다. 수없이 많은 데이터를 보고 그 안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읽고 세익스피어 스타일로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세익스피어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능가해 왔다. 그렇기에 침팬지처럼 살던 인간이 지금의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은 창의적이 되어야 하고 자기를 능가해야 한다. 그것이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이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다.
인공지능은 여러가지를 의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언어혁명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도 기계어라는게 있고 상위언어가 있다. 상위언어는 몇줄로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지만 기계어로는 그게 어마어마하게 길다. 그 번역을 해주는게 컴파일러다. 인공지능은 프로그래밍이 일상까지 올라올 정도의 상위언어 역할을 할 것이다. 인공지능과의 대화가 곧 프로그래밍인 것이다. 사실 쳇GPT가 주목을 끌었던 기능 중 하나가 명령을 내리면 컴퓨터 언어로 프로그램을 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편의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표준의 의미가 더 크다.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과 협동하여 일을 할 때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말을 할 때 사전의 의미를 참조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수학이 물리학내에 있었던 애매함과 혼란을 정리하고 물리학의 발전을 도왔듯이 인공지능이 언어활동의 프랫폼 역할을 할 때 같은 효과가 있지 않을까? 인공지능은 인류의 공통어가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이 쓴 천페이지의 글을 인공지능이 분석한 결과 그 요약은 딱 한줄이라면 그 글은 한줄만 읽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영화에 대해 평론사이트의 평가가 절대적 기준이 되지는 않듯이 인공지능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는 있을 수 있다.
아직도 마술의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듯이 새로운 시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빠르지만 그렇다고 내년에 당장 세상이 바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같은 고전영화에 기반하여 인공지능의 자아나 인류멸망의 스위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는 것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이해하는 것의 아주 일부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던 시대가 지나고 과학의 시대가 왔다고 인류가 멸망했는가?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과학시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은 또한번 재정의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의 어떤 낡은 것은 아마 멸망할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부분에 종사하는 인문학 말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과학의 시대가 오는데 인류멸망을 생각하는게 아니라 과학으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듯 인공지능의 시대 앞에서도 우리는 같은 일을 해야 한다. 축음기의 소리에는 영혼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는게 아니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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