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9
우리는 학창시절에 성선설과 성악설을 배운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으며 서양의 루소가 비슷한 주장을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으며 리바이어던에서 모두와의 투쟁을 말했던 서양의 홉스가 비슷한 말을 했다.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연히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기 마련이고 그 반대로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인간과 본성의 제약과 교육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성선설이 옳건 성악설이 옳건 혹은 인간의 본성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건 선악을 따졌다는 사실 자체가 주목할만 하다. 선악을 따진다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타고났기 때문에 그걸 내부에서 찾자고 하건 없으니 그걸 교육시키거나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서 만들자고 하건 선악은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논의 된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에서 선악의 윤리는 필요했다. 결국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여기저기서 찾았다.
그럼 오늘날에는 어떤가? 우리는 성악설의 변화된 형태에 익숙하다.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무지를 악으로 여긴다. 다시 말해 세상에는 우리가 찾아야 할 혹은 이미 몇 사람은 찾아서 그걸 알고 있기까지한 진실, 진리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무지하게 태어나며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옥인 이유다. 따라서 이 진리를 모두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길이다.
이러한 형태의 가르침을 주는 대표적 사례는 종교이지만 종교적 가르침은 주관적이고 대개 불분명하다. 반면에 과학은 객관적이고 자명한 사실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가르치기가 쉽다. 따라서 현대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이래 진실이나 진리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계몽주의적 사고는 강화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레 인간의 타고난 본성따위, 인간의 내부에 들어있는 것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보이게 만든다. 무지는 악이고 인간은 이런 악을 가지고 태어난 원죄를 가진 존재일 뿐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 성선설에 해당한다고 할만한 것이 등장한 것이 바로 낭만주의다. 계몽주의적 가르침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것은 특수하고 주관적인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자아 즉 나다. 보편적인 관념들은 우리들이 조금씩 다른 존재라는 것을 지워버린다. 우주적 시간을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의 노동이 힘겹다던가 우리의 결혼이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처구니 없는 세계의 거대함 앞에서 인생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이것이 삶의 근원적 부조리다.
계몽주의에 대한 진정한 공격은 지식 자체에 대한 반성에서 나왔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경제를 말하건 역사를 말하건 과학을 말하건 우리는 그것의 기초가 되는 메타 경제학, 메타 역사학, 메타 과학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과학이 되는지, 과학이 아닌 것이 과학인 척하는 것의 위험함이 무엇인지를 말한 사람은 칼 포퍼였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과학조차도 종교적 믿음같은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써서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알린 토마스 쿤이었다.
지식에 대한 반성은 언어에도 도달한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종류의 것도 없다면 우리는 기억도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뭔가를 알기 때문에 언어가 생기고 발달했다는 말도 옳지만 그 반대로 언어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며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마치 장님이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공허하다.
언어의 발달과 인간의 발달은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매우 유사한 것이며 그래서 문자의 등장은 인간 역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뭔가를 기록하게 됨으로 해서 인간은 타고난 기억력을 훨씬 능가하는 시공간내에서 데이터를 저장하고 가공하여 보편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정보를 다루게 되자 그걸 위해서 더 정밀한 언어를 발달시켰다.
실질적으로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구분할 수 없다면 개나 고양이는 따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말은 공허한 것이다. 뉴튼이 중력법칙을 발견하기 이전에도 중력은 존재했었다는 말은 과학적 문맥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언어의 문맥에서는 공허하고 앞뒤를 뒤집은 것이다. 나는 네가 X라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겠어같은 말이다.
우리는 물질적 의미에서 호모 사피엔스가 40만년전부터 존재했었다던가 하는 식의 말에 익숙하며 따라서 인간이 아주 옛날 부터 존재했었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과학적 문맥 내부에서는 옳은 말이다. 그러나 진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고민하면 우리는 인간은 그보다 훨씬 더 최근에 만들어 졌다고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물질이 아니다. 인간은 현상이고 의식이다. 인간은 문자의 사용같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데이터가 축적되고 그런 가운데 등장한 유령같은 존재다. 인간을 물질로 보는 것은 아무런 글도 써있지 않은 종이 뭉치를 역사적 고전이 된 책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인은 DNA가 아니다.
지식이 선이 된 이유는 분명하다. 온 사회를 기계적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있는 시대에 무지한 행동은 그 기계를 세워버릴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직장의 시대, 계몽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회의 부속품같은 존재다. 각각의 부속품은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비극이 탄생할 것이다. 이것은 인쇄기술의 발달로 책이 대중화된 시대이며, 산업혁명의 시대이고, 대중교육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쓰고 읽기가 가능해진 시대이다. 사람들이 1인1표로 투표를 해서 자신의 지도자를 뽑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무지가 악이되는 메커니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지식이 그 절대성을 잃어버리고 컴퓨터가 발달하고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기계가 스스로 데이터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가공하는 시대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최근에는 기계가 시도 쓰고 소설도 쓰며 프로그램도 짜는 경우가 시작되었다. 이런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있다. 인간은 지식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부속품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걸 차차 기계가 대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평생직장의 개념같은 것도 사라지고 있다. 수명은 늘어가는데 근속 기간은 짧아진다. 직장의 시대, 계몽의 시대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작이 있었던 그것은 이제 끝나가고 있다.
계몽의 시대에는 무지가 악이었지만 우리의 시대에는 안다는 것은 데이터를 의미한다. 즉 데이터가 없는 것이 악이다. 나는 문자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현대인을 안드로이드라고 부른다. 수렵채집인은 문자기술때문에 새로운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축적된 데이터가 언어를 발달시키고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데이터 축적이 한층 빨라진 요즘 우리는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예견할 수 있다. 그 말은 뒤집어 말해서 직장의 부속품같은 지금의 인간이 미래에는 악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것이다.
계몽의 시대에는 무지가 악이었다. 계몽의 시대에 문명화되지 못한 야만인은 사회에 대한 위협이거나 무책임한 존재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직장의 부속품처럼 변한 계몽주의 시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을 성실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며 설사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고 해도 악이라거나 사회에 대한 위협이라고 까지는 스스로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계몽의 시대에 야만인이 할 법한 소리다. 수렵채집인에게 정상적 사회는 계몽의 시대에 존재하는 정상적 사회와 다르듯 미래의 사회도 지금의 정상적 사회와는 다를 것이다. 미래의 인간과 과거의 인간은 필연적으로 충돌하고 힘겨루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그 답을 대개 안다. 다만 그 미래가 코앞에 다가왔을 뿐이다. 기계가 기계의 일을 담당할 때 인간은 인간의 일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이 인간의 본질은 창의력이고 자유이며 자아를 가지는 것이다. 체스나 바둑처럼 그 모든 규칙이 정해진 게임에서 기계는 이미 인간을 능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 경우는 즉 대화를 나눈다던가, 시를 쓴다던가, 운전을 한다던가, 작곡을 하는 경우에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생산한 데이터에서 학습을 해야 한다. 이러한 경향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인간을 데이터 생산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계몽의 시대에는 지식은 숭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사람, 찾아낸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을 중요한 사람으로 여겼다. 새로운 인간은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이터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에는 설사 그런 비전이 있어도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자본과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의성은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마치 수렵채집인의 마을에서 지식인이 그다지 대단한 취급을 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시대는 디지털 낭만주의의 시대다. 우리 바깥의 지식은 점점 더 편리해지고 흔해지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는 통찰력을 가지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다. 그것에 운이 더해지면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페이스북을 만들어 세계적 부호가 된 마크 주커버그에게 일어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시대다. 당신이 끄적인 허접한 스토리가 점점 자라나서 대작 영화의 줄거리가 될지 모르고 당신은 판권으로 돈을 벌지도 모른다. 습관적으로 음을 흥얼거리는 걸 좋아하는 당신이 새로운 시대에는 사실 세계적 히트곡의 작곡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남들 다보는 교과서만 열심히 봐서 안간힘을 다해 취직해서 죽을 때까지 그 직장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노력하고 살라는 말은 점점 더 비현실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건 마치 세상에 서양의 과학문명이 들어오고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말고 사서삼경이나 잘 읽어서 과거시험이라도 잘 보라고 하는 말처럼 될 수도 있다. 계몽주의의 시대에는 남들과 똑같아 지는 순간이 표준화된 부품으로 인정받는 순간일 수 있지만 디지털 낭만주의의 시대에는 그 인간의 죽음일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이 남과 다르다는 것에 있는 시대가 그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이런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 안에 그런 힘이 있을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성선설의 시대에 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은 본래 자유롭고 자아를 가지며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는 시대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없는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고 믿는 시대다.
'주제별 글모음 > 인공지능에 대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공지능은 정말 사무직 노동자만 대체할까? (0) | 2023.05.05 |
---|---|
게임, 도구 그리고 도구를 이용하는 기계 (2) | 2023.03.25 |
인공지능은 인문학을 완전히 바꿀 것이다. (2) | 2023.02.26 |
인공지능과 새 시대를 사는 법 (0) | 2023.02.10 |
chatGPT는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0) | 2022.1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