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27
최근에 흑인 인어공주 영화와 흑인 클레오파트라 드라마가 나오면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느낌이다. 본래 널리 백인으로 알려져 있던 캐릭터를 굳이 흑인으로 바꾸는 것은 말하자면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 목소리인 셈인데 물론 이런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는 오늘날 상식이 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들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해서 PC(politically correctness)라고도 부른다.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하는 것은 몰상식한 것일까? 그런 것같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게 보기 힘들까?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서?
이 문제는 오늘날 점차로 심각해 지고 있는 보편과 특수문제의 일부이며 이것은 이 세상에 법이라는 것이 생겨난 처음부터 있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사적 복수는 몰상식한 것으로 정착되어져 있다. 누구가가 내 가족을 죽였다고 해서 내가 가서 복수를 하고 그 사람을 죽이거나 그 사람의 가족을 죽이면 그것은 불법이며 처벌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었을까? 많은 사람들의 눈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올바르게 보였을 것이다.
보편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아무래도 일을 중앙집중적이 되게 만든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의무와 권리를 준다는 식이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로 지역 사회나 가정같은 국가 보다 작은 공동체의 권리를 인정해 줄 수가 없게 된다. 한국인이라면 같은 보살핌을 받아야지 한국의 어느 섬에서 인권 유린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건 그 섬의 일이니 우리가 간섭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각각의 작은 지역이나 공동체에서 이건 우리의 일이니 특수성을 인정해 달라는 말은 보편적 입장에서 보면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것을 봐도 그건 그 집안의 일이어야 할까?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동물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봐도 남의 재산의 일이므로 내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일일까? 어느 회사에서 잔인한 경쟁구도를 만들어 직원들을 인간이하로 다루고 있어도 입사할 때 그러기로 동의했으니 사회는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대개 보편적이 되려고 하는 것을 해방으로 여기고 발전으로 여기는 일이 많다. 바로 여기에 보편성을 추구하는 힘이 있으며 우리가 익숙한 계몽주의같은 것도 결국 보편적 지식을 널리 퍼뜨려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믿음이 그 기반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 이런 보편에 대한 추구는 비현실적이 된다. 세상의 복잡성에 비해 중앙집중적 일처리는 느리고 섬세함이 없기 때문이다. 회초리로 아이에게 체벌을 하는 부모는 보편적 감성으로 보았을 때 학대하는 부모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가정을 깨고 아이를 사회가 데려와서 직접 키우면 과연 언제나 그것이 옳은 일일까? 아이를 키우는 부모처럼 사회가 세세하게 아이를 책임져 줄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다면 모든 아이를 하나의 기관에서 키우면 되지 왜 아이들을 날마다 학교에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가? 아이뿐만 아니라 남녀문제든 노인의 간호문제든 가난한 사람을 구호하는 문제든 언제나 현장에서 벌어지는 섬세한 정보에 대처하지 못하면 도움은 도움이 아니게 될 수 있다. 당장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정부에 신고하니 절차가 하염없이 느려서 집이 다 탄후에야 말도 안되는 도움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비극적인 예 중의 하나는 옛날 식민지 시대의 어설픈 정의감이었을 것이다. 식민지를 만드는 제국쪽은 식민지의 문화와 현실을 무시하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질서를 강요하는 일이 많다. 역사를 보면 그런 식으로 해서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얼마나 있는지 의문이다. 대개 이런 일은 전통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렇다고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걸 힘으로 억누르다가 제국이 물러가면 그간에 있었던 일들때문에 르완다의 인종학살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도의 문제일뿐 현실은 언제나 책에 써있는 원칙과는 다르기 마련이고 특히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복잡한 나라들은 더 그렇다.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이의 분쟁이 반세기 이상 이어지는데 사실 그들은 국적으로 보면 전부 그냥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사람죽이는 분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갈 것없이 한반도의 현실이라던가 한국의 지역감정같은 것도 단순히 우리는 전부 한민족이라던가 전부 한국인이라는 말로 분쟁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편적 질서는 이 세상의 복잡성에 대한 고려와 사회적 안정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보편성을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은 흔히 이런 부분을 무시하고 그걸 당연시 여긴다. 즉 사람은 사람이고, 한국인은 한국인이라는 식이며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사회적 분쟁이 일어난 곳에 가보면 흑과 백으로 정의와 악이 딱 갈라지는 곳은 거의 없다. 대개는 차별과 패거리 정신이 공공질서를 무너뜨려서 피해를 만들고 그걸 누가 책임지는가의 문제로 끝없이 싸우는 것이다. 학교폭력이 학생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 한마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복잡성에 대한 고려와 사회적 안정성이 보편적 질서에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어디나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고 점점 더 복잡해 지기만 하는 것같다. 선진국들은 이미 늙고 보수적으로 변해 버렸으며 국민들은 개혁성을 잃었고 무엇보다 그런 세월이 오래되어서 경제문제들이 심각하다. 다른 나라들은 본래 안정적이었던 적이 없다. 이런 세상인데 미디어의 발달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들으면서 산다. 누가 사기를 당했다더라, 누가 어떤 묻지마 살인을 했다더라, 누가 취업에서 차별을 받았다더라 같은 이야기로 언제나 세상이 시끄럽다.
결국 보편성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태도가 그리 인기가 있을 시기가 아니다. 세상은 복잡한데 우리는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고 사회적 안정성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앙질서가 붕괴되는 시기다. 세계화가 거꾸로 진행되어 세계가 블록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불황이 계속되면 이란의 보수 종교정권처럼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뒤로하는 독재적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 이는 한가지 이유만은 아니지만 현실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정치적 올바름 혹은 보편적 질서를 강조하는 세력의 탓도 있다. 세상 사람들의 권리를 보장해 주는 사회 시스템이 불안한 시기에 내 권리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그 사람들은 불합리를 극대화 시키기 때문이다. 이걸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일 것이다. 거기에서 여성의 권리 이야기할 때는 군인들이 여성들을 길에서 끌고 가서 강간하지 말라고 할 때이지 남녀 평등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그런 권리를 보장할 사회 시스템이 전쟁도중에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서 여성평등의 권리 운운하면 어떤 시선을 받겠는가?
우리는 모든 걸 사회적 안정운운하면서 미래로 미룰 수는 없다. 다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것에는 타협이 필요하며 평등이란 애매한 개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세상의 사회적 안정성도 생각하면서 일을 처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어설픈 보편주의에 기대어 세상은 안보고 나의 권리만 이야기하고 있으면 사회는 더더욱 붕괴되어 결국 더더욱 많은 권리가 붕괴될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더 좋은 세상이 오는게 아니라 그나마 있는 질서도 붕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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