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22
세대간의 차이란 일반론이라 사람마다 차이는 크다. 게다가 그런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차이인지 아니면 환경의 차이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젊은 세대이건 나이든 세대이건 같은 환경에서는 똑같이 행동할 같은 사람인데 환경이 달라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가지고 세대차이를 말하게 될 수도있다.
이걸 전제하고 말하면 확실히 세대차이란 존재하는 것같아 보인다. 먼저 한가지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작해 보자. 내 개인적 경험도 그러하고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그러한데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록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이 점점 더 독립된 성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100년전쯤에는 16살이면 당당한 성인으로 행동했다면 이 16살은 50년쯤 전에는 20대 초반쯤의 행동과 비슷했고 지금에는 30대후반도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이런 현실이 다른 무엇보다도 교육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고 믿는다. 평균적인 교육기간을 생각해 보라. 온국민이 초등학교 교육도 받지 않는 나라에서는 아이들은 일찍 성인처럼 행동하지만 평균적인 교육기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사람들은 자신이 독립된 성인이라는 자각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이 옳다면 평생 교육의 시대란 어떤 의미로 평생 어린이로 살아가는 시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 시스템이란 기본적으로 누군가가 뭔가를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는 마치 경찰서란 범죄자를 잡아야 하고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과 같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애초에 교육 시스템도 경찰서도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식이란게 의미가 없고 배울 수도 없는 거라면 돈을 내고 학원에 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 아닌가.
문제는 이런 당연해 보이는 전제에도 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시스템은 그 시스템의 근간이 되는 생각을 반복해서 주입한다. 따라서 교육 시스템은 학생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것을 정지하도록 만든다. 답은 선생님이 가지고 있다. 모르면 물어보고 외워야 한다. 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책임감도 느끼지 않게 된다. 나는 시키는 대로 배운 대로 했을 뿐이며 나는 아직 배우는 중에 있는 학생일 뿐인데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겠는가. 시험문제의 질문은 내 생각이 어떤가를 묻는게 아니라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뭐라고 했는가를 묻고 있다. 학생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생님의 학생에 대한 평가이며, 부모님이나 친인척 혹은 사회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 가다. 즉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이 교육이라는 것은 더 길어졌을 뿐만 아니라 강도도 강화되어 왔다. 즉 개인적인 판단으로 쓸 수 있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어 온 것이다. 몇십년전에도 사교육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유치원때부터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진국이었던 당시에는 목표도 낮았다.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정도면 취업은 보장되었고 대학에 가서 다들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에서 보내는 시간이 취업준비로 가득 차는 오늘날과는 다르다. 요즘은 취업을 하고도 그 회사에 오래 다닐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직준비로 바쁘게 사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교육이란게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절에 젊은이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것, 중요하다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을 오해하면 안된다. 과거도 장미빛이 아니었다. 과거는 어떤 의미로 발전해서 지금이 된 것이다. 이걸 오해하면 대기업 직원이 치킨집 사장을 부러워하는 것처럼 된다. 교육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기성세대가 신세대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면서 알아서 하라고 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유학이 가고 싶으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요즘에는 그에 관련된 정보들을 얼마든지 쉽게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수집된 정보를 보고 공부해서 그에 따라서 유학준비를 할 것이다. 과거라면 뭐든지 다 처음이고 정보가 흐르지 않아서 다 자신의 상상으로 해야 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유학에는 이런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일을 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젊은이들은 무한히 시간을 낭비하면서 겨우 겨우 작은 답을 찾았고 그래서 친절하게 세부사항이 포함된 정답을 알려주는 선생님을 상상속에서 꿈꿨다. 다만 그런 선생님이 넘쳐나는 요즘은 반대의 고민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답이 뭔지 몰라서 헤멨는데 요즘은 정답이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그것따라 살기가 힘들다.
아뭏튼 그런 이유로 과거에는 시험에 나오지 않는 책도 읽을 수 있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도 많았다. 어떤 시험에 통과한다던가 하는 생각없이 그저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을 할 여유가 있었고 친구는 소중한 정보의 원천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도 학업은 쉽지 않았으니 여유시간이란게 흑백처럼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식으로 말할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으로는 좀 더 여유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말은 과거에는 사람들이 좀 더 개성이라는 것을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쓰고 싶은 방식으로 시간을 쓸 때 나의 개성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은 교과서를 반복해서 공부하는 시험공부는 당연히 이 개성을 억누른다. 모든 사람을 같은 잣대로 1등에서 꼴찌까지 늘어놓을 뿐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교육이란게 무슨 피해만 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만약 그런거라면 모두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나라가 가장 합리적인 나라여야 할 것이다. 학교는 보편적 지식을 가르치고 시야를 넓혀 준다. 문제는 모든 것이 그렇듯 이득이 있으면 손실도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변신했다. 이때문에 한국의 노년증과 청년층을 비교해 보면 세대차이가 엄청난데 이 세대차이는 지금까지 말한 교육의 차이가 어떤 득과 실을 주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의 노년층은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도 학교 시스템이 부실하기 짝이 없던 시절에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노년세대를 보면 자아는 큰데 교육수준은 낮다. 모든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를 보면서 철없고 무지하다고 말하는 편이지만 이 노년세대가 중년층 나아가 젊은층을 보면서 느끼는 문제는 사람들이 애들같다는 것이다. 학교에 다니면서 책이나 읽었지 요즘 애들은 현실을 모른다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 세대는 자신들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를 잘 모른다. 이들은 아직도 한국이 미국에게 옥수수가루같은 걸 원조받던 시절에 갇혀 있고, 사람이 배부르게 밥을 먹으면 그걸로 감사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인간의 평등따위를 믿지 않는다. 아직도 봉건시대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시급을 만원을 받으면 호화판으로 사는 것이지만 누군가가 3천억원쯤 횡령을 했다고 해도 큰 일하시는 분이라 그런 거니까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다.
노인 세대는 보다 넓은 보편적 관점이 부족하다. 그런 걸 배운 적이 없고 일찌감치 자신의 두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기 판단대로 세상을 살아왔다. 그것은 자아를 기르는 훈련이 되었지만 교육없는 자아란 결국 고집만 센 비현실적인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세계는 국경을 넘어서 서로와 소통하고 사는데 자기는 조선시대적인 감성으로 작은 마을에서 사는 것이다.
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에 있는 것이 요즘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너무 오랜동안 교육 시스템에 갇혀서 자아의 성장을 제한당해 왔다. 키덜트라는 말도 있는데 이건 그들이 어린이였을 때 가졌던 욕망이 너무 제한되었었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그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답을 찾은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초등학교 다음에는 중학교가 있듯이 밟아나가야 할 정답 코스는 끝없이 존재해서 내가 선택하고 판단하고 그래서 실패하면 그것에 대해 책임도 지는 식으로 살아 본 적이 없다. 애초에 그 코스를 선택한 사람도 내가 아니다. 부모가 사회가 달리라고 한 코스를 뭔지도 모르고 그저 10여년 달렸을 뿐이다.
그들은 보편에 중독되고 자기앞의 현실을 자기 눈으로 보는데 익숙하지 않다. 이런 상태를 우리는 자아가 없는 상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욕망이 있으니까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보편적 지식을 많이 외웠으니까 세상에 대해 뭔가를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결혼 생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책을 열심히 읽고서 자신이 결혼이 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학교란 본질주의자, 플라톤주의자를 키워낸다. 즉 말이나 양에 대한 본질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여러가지 관념적인 말들의 본질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고 믿게 된다. 그런게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나와 나의 배우자와의 결혼생활이란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특수한 관계이지 그걸 결혼 생활에 대한 보편론으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남자이고 한국인이며 중년의 나이를 가졌다. 이런 보편적 수치가 나의 정체성이 아니다. 나는 삼성의 직원이다라는 식으로만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은 정체성 위기에 빠져 있고 자아가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진단들에 따르면 노년세대는 교육이 필요하고 청년세대는 교육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자아를 획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연히 이것들이 쉬운 일들은 아니다. 노년세대는 변화가 힘들고 이제와서 뭔가를 배우는 일이 어렵기만 할 것이다. 노인 세대는 종종 시스템을 우습게 안다. 그들은 대기업같은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과 치킨집 사장과의 차이를 모른다. 정치도 결국 직접 와서 사람좋은 미소지으며 인사하는 사람을 보면 사람이 좋으니 정치도 잘할 거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같이 고스톱쳐주는 사람을 이장으로 뽑는다. 노인으로 가득 찬 지방은 텃세 이야기가 많다. 결국 변화하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살던 대로 살겠다는 생각이 문제를 점점 나쁘게 만들어도 그걸 말리기가 힘들다. 그들은 끝없이 그들이 익숙한 세상 즉 후진국이었던 한국으로 이 세상을 되돌리려고 한다. 그게 그들에게는 당연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자아를 획득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시스템의 소수파가 될 용기를 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런 판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이걸 청년들이 할 수 있을까? 정답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는 잠시만 멈춰서도 뒤쳐지는 느낌이 든다. 대학을 중퇴하고 대학을 나갈 것을 선언한 사람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으로 가는 선택을 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선택일까? 창업에는 학벌이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 학벌을 위해 살아온 학생들이 창업을 할 수 있을까? 남과는 다르게 살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일을 남들만 보면서 살아온 그들이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에서 자아와 교육을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대치시켜 왔지만 사실 이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배우지 못한 자아는 그저 어리석은 고집일 뿐이다. 뭘 배워야 하고 어디로 성장해야 할지에 대한 시야가 지극히 좁은 가운데 배우지 못한 자아는 아주 좁쌀같은 세계에서 자신을 지키며 굳어진 것이다. 자아의 성장이 없는 교육도 그 한계는 크다. 그것은 거대한 보편의 세계에 살지만 그 세계에 억압되어 있다. 자신이 그 세계를 주체적으로 사는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그 세계의 규칙에 억눌린다. 그래서 점점 로보트같아 지는 스스로를 느끼면서 주체성이 없어지면 결국 지능이 낮아진 바보처럼 된다. 뭘 하라고 명령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융통성이 없어지고 행복하지도 못하다. 책만으로 배운 연애처럼 뭐든지 알지만 정작 진짜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의 세상은 복잡하고 빨리 변한다. 이런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교육없는 자아와 자아없는 교육은 공통점을 한가지 가진다. 그들은 모두 반공동체적이다. 시스템을 우습게 아는 노인들은 종종 복지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걸 무슨 적선같으로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마을단위 이상의 사회에서의 시스템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작은 세계를 사는 그들은 서로를 돕는 것이 모두를 돕는 일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은 그저 이기적일 뿐이고 낯선이는 적일 뿐이다.
시스템에 매몰된 청년들도 마찬가지로 반공동체적이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에 그냥 나는 내 할일을 하면 세상은 그에 대한 댓가를 줘야 한다는 식이다. 규칙의 변화는 반칙이다.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에 그들은 익숙하지 않다. 공동체안에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규칙은 바뀔 수 있고 내가 바꾸는 것이지만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균형있게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가치관이 없이 시스템에 억눌린 사람들은 노예근성을 가지는 것이지 공동체 정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정신이란 집단적 지능의 발현이다. 세상의 문제는 대개 이 지능이 발현되지 않아서 어리석은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는 교육과 자아라는 두가지 주제가 연관되어 있고 세대 차이라는 문제도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국민통합이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한국은 결국 스스를 돌이킬 수 없을만큼 해한 끝에 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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