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제까지 여러가지 글들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들과 모순되거나 다르지는 않지만 약간 방향이 다르게 그것을 써보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답은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에 대해 무엇을 말하건 그것이 기억될 수 없는 것이라면 결국 우리는 모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는 그것이 나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이죠. 과거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만큼만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압니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를 압니다. 이런 기억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주고 따라서 기억이 없다면 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답은 제출되자마자 즉각 다른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기억이란 건 개인적이지만 내 주변의 사람들도 가지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홀로 태어나서 홀로 살아간다면 나의 기억은 오직 나만의 것이겠지만 우리가 가족이나 사회속에서 집단 생활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도 공유하게 되리라는 겁니다. 내가 나의 기억이라면 공유된 기억은 자아의 확장이고 자아의 공유입니다. 즉 내 주변의 것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해서 기억나게 해주기 때문에 나는 나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만든 상처라던가 내가 잡은 짐승의 뼈 혹은 내가 만든 집은 나에게 내가 한 과거의 일을 잊지 않게 해줍니다. 나는 상처를 만든자이고 사냥을 한 자이며 집을 지은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문자의 등장과 함께 아주 크게 확장됩니다. 이제 문자를 가진 인간은 자신이 그걸 다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주 길고 복잡한 이야기도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림이라던가 다른 물건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억을 남기는 방식들이지만 문자는 오로지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발명이며 따라서 가장 효율적인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제 한번 말한 것을 두번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문자로 기록된다면 내일 오늘과 정확히 같은 말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경으로 기록되기 전에는 누구도 부처의 말을 전부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경이라면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변하지 않는 기록은 수십 수백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기억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이렇게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쓴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이제 기록된 정보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방에 앉아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기억만으로 쓸 수 있는 것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에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분량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서 그런 것을 배웠지만 그 대부분을 잊어버렸고 더욱 더 대부분은 읽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거기에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역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도 도서관에 가면 징기스칸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죠.
이렇게 거대한 기억을 가지게 된 인간은 이제 거대한 사회속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비록 그 모든 것을 모르지만 기록이 남아있다는 이유입니다. 변호사도 모든 법규를 다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며 보통 시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는 많은 법규들이 있으며 원하면 우리가 언제든지 그 법규를 찾을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사과나 맥주라고 말할 때 사과와 맥주의 정의가 뭐냐고 물으면 학자처럼 길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도서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보의 시스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과정에 의해서만 수정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 생활을 하거나 말을 하는데 있어서 걱정이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두가 같은 교통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도로에 나가면 자동차가 같은 방향으로 달릴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매순간 다른 차와 부딪힐 것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운전을 할 수 없겠지요. 무정부상태적인 공포속에서 사회는 갈라지고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이뤄진 작은 집단으로 세상은 쪼개질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학교에서 오랜간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그 오랜기간동안 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배웁니다. 내가 뭘 배운 사람이고 뭘 해야 하는 사람이며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이고 이 세상은 어떤 역사를 거쳐서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 세상에 대한 신뢰를 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금도 내고 카드도 쓰고 일도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떤 게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지를 배우고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을 어느 정도 경험으로 확인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한국돈이 휴지가 되거나 이웃사람이 총을 들고 와서 우리 가족을 죽이거나 은행에 넣어둔 전재산이 사라지지는 않는 다는 확신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는 누구인가를 구성하는 일부이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나는 우리가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우리를 우리이게 합니다.
이러한 기록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근대화가 시작되고 과학혁명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나는 내가 쓴 것이다라는 표현은 약간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가 측정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생각하는 것을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가 옳다는 것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과학혁명이래 지식의 확실함을 보장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엄밀하게 측정된 양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과학법칙은 그런 측정에 기초해서 발견되어집니다. 백만명이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객관적인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객관적인 것이 있다면 똑같은 자로 측정한 것입니다. 30cm 자가 1미터 길이의 나무보다 짧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객관적 현실이지만 그걸 증명하는 보다 확실한 방법은 정확한 자로 두 개의 물건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엄밀하게 측정한 데이터와 그것을 통해 발견한 법칙을 통해 아주 복잡한 세상을 비교적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과학이고 과학을 넘어 과학적 사고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지만 경제학의 출현은 17-8세기에 서양에서 열정적으로 추구된 통계 자료의 누적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즉 데이터가 있으니까 그 데이터 안에서 법칙을 찾은 것이죠. 이것은 과학적 사고가 경제분야에 적용된 경우입니다.
우리의 이론은 그것이 강력하고 단순하면 할 수록 세상을 단순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대표적 사례는 결정론과 환원주의입니다. 결정론은 과거가 현재를 결정했고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만 알면 사실 미래나 과거도 모두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죠. 환원주의는 세상은 모두 서로 얽혀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립계를 만들어서 그 안에 있는 것들만 생각하면 된다고 말해줍니다. 갑자기 서로 상호작용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것들로 이뤄진 세계가 그저 서로 각각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세계는 아주 단순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결정론과 환원주의가 너무나 틀려있으며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이 두 가지 이론은 너무나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이고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고 근대화가 진행된 것이죠. 이 이론에 기초해서 우리는 전에는 풀수 없었던 많은 문제들을 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론들이 언제나 옳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론들에 대한 믿음이 깊어질 수록 반대로 어떤 문제들은 도저히 풀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됩니다. 의식이나 영혼이나 뇌의 문제가 대표적이고 이것이 경제학이 계속 원시적인 학문으로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기술의 시대가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전자 매체의 시대이고 인터넷의 시대이며 컴퓨터의 시대이고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이제 우리는 도저히 인간이 이해불가능한 데이터까지도 만들어 내고 기록하고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양일 뿐 아니라 종종 아예 인간의 언어로 되어지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이터를 이용해서 전에는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을 하나 둘 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들이 바둑AI, 단백질 접기 문제의 해법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쓰는 AI인 거대언어모델이죠.
이런 시대가 오고보면 이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또 한번 다르게 표현되어져야 마땅한 것같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나는 데이터이고 연결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는 데이터에 둘러 쌓이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떤 하나의 명확한 정적인 그림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 보다는 이해불가능하게 복잡하면서 동시에 빠르게 바뀌는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그저 하나의 유한한 생명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원래 그랬습니다. 세상이 최근에 그렇게 바뀐게 아닙니다. 그런데 오만한 인간은 자신이 아는 것이나 자신이 기록된 것만 보면서 세상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했던 것 뿐이지요.
많은 경우 결정론과 환원주의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결코 언제나 옳지 않은 도구이고 세상이 인간에게 이해불가능한 것은 개미나 짚신벌레가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세상을 모두 이해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도구를 이용하거 서로 서로 협동해서 결코 한 명의 인간으로서는 다룰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모으고 그걸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써서 분석하여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란 말하자면 양자역학을 이해못하는 사람이 쓰는 양자역학 공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공식을 써서 어떤 양자역학 질문에 대한 정답을 만들 수 는 있지만 어떻게 해서 그 정답이 나오는지는 이해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컴퓨터 최적화와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써서 찾아낸 인공지능은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건 세상에 존재하는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이 이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중력을 이해하지 못해도 중력법칙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우리가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무지에 눈을 떠서 전부터 있었던 것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 옳습니다.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도 중력법칙이 존재했던 것처럼 챗GPT는 openAI라는 회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인공지능은 만드는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점점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더 많이 자각했다는 뜻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여전히 무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작고 연약한 짚신벌레 같은 유한한 생명체로 이 세상 전체는 언제까지고 미스테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데이터가 다르고 우리가 누구와 또는 어떤 것과 연결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우리는 데이터고 연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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