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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가족이 미래다.

by 격암(강국진) 2022. 5. 3.

22.5.4

가족은 가장 오래된 사회 공동체이다. 그래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도 많고 우리는 흔히 가족이 뭔지 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현실은 우리의 말과 관습이 발달된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고 지금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으므로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계인이 무슨 짓을 하면서 살건 그게 나에게 무슨 문제를 만들 것인가. 그런데 나와 가까운 어떻게 말하면 나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어떤 사소한 특징하나가 나에게 죽고 사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가족은 우리가 가장 신경써야 할 사람이며 우리는 흔히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은 그저 타성에 젖어 별생각없이 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족은 가장 소중하면서도 두려운 사람이고 가장 은인이면서도 가장 원수일 수도 있는 존재다. 

 

가족이 가장 큰 원수가 되는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가족 사이에 사기를 친다던가, 가족간에 폭력사건이 발생한 경우 이런 일은 흔히 사회나 법이 간섭할 일이기 이전에 그저 사적인 일로 여겨지는 일이 꽤 많다. 그러다보니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기가 쉬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래에 더 이유를 쓰겠지만 나는 옆집사람과 우리집 가족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간에 살인이 나건 말건 법은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극단만큼이나 극단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이 양극단의 어딘가에 적절한 수준이 존재할 것이고 사안에 따라 답도 달라질 것이다.

 

사회적 간섭은 댓가를 요구한다. 그것은 사회가 가족의 역할을 대신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정을 따지기 이전에 공동체가 있어야 살아갈 수 있다. 가족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사회가 그걸 대체하지도 않는 것은 가족공동체를 사회적 공동체보다 무조건 위에 둬서 법이 가족공동체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만큼이나 나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복지 수준이 높아지면 소위 가문이라고 불리는 거대 가족공동체의 영향은 작아진다. 그래서 복지 정책이 좋고 사회가 안정된 나라에서는 가족은 핵가족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집안에 쌓인 재산이 많은 부자가문의 경우는 사회적 복지가 그걸 쫒아갈 수 없으므로 가족은 대가족 관습을 따르곤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부모와 자식으로 이뤄진 핵가족을 대체할 수준의 사회적 복지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기괴하고 끔찍한 미래일 것이다. 

 

이 부분은 조금 일반적으로 넓혀서 고민해야 할 가치가 있다. 세상은 하나의 보편적 진리와 질서에 따라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게다가 설사 어떤 사회의 수준이 다른 사회에서 보기에는 미신적이고 사이비적인 종교공동체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같으며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해도 그 개혁이 지나치게 빨라서는 안된다. 즉 낡고 비보편적인 공동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공동체가 그걸 대체하지 못하면 차라리 끔찍한 사이비종교의 공동체라도 있는게 낫다. 어떤 기괴한 질서라도 완전한 무질서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이걸 무시하고 그저 자기가 아는 공동체내지 질서를 기반으로 개혁을 밀어부치는 사람들은 대개 끔찍한 비극을 만든다. 식민지에 자기들 질서를 억지로 주입하고 그 식민지를 그냥 해방시켜 버린 경우 인종학살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래놓고 그걸 발전시켰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다. 

 

다시 범위를 좁혀 가족으로 돌아오면 사실 어디까지를 가족 공동체로 여겨야 할 것인가라는 기본적 질문의 답도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답은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대가족과 핵가족 질서가 종종 충돌한다. 예를 들어 마마보이 남자가 결혼을 해서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남자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결혼한 아내와 한가정을 이뤘다는 생각이 약하고 여전히 부모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너무 몰두해 버린다. 그렇게 하면 이 집은 실질적으로 조선시대적인 대가족 개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자녀부부는 자기 재산이라도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손자의 교육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심하면 먹는 거 입는 것, 사는 곳까지 모두 부모가 정해주는대로 따라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어떤 때는 억압으로 어떤 때는 잔소리 때문에 어떤 때는 그저 두려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아내는 아무 권리와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므로 이 결혼은 그녀를 불행하게 만들게 된다.

 

이런 문제는 물론 마마보이 남자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결혼을 해서도 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은 나의 가족이야라는 생각에 빠져서 같은 일을 남편에게 하는 일도 많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게 뭔지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편이나 아내를 형제나 부모와 같은 선상에 둔다. 그냥 모두가 민주적인 가족 공동체의 일원같다. 이런 말이 통하려면 정말 그 사람들이 운명공동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은 대개 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안일한 개념을 가지고 일을 처리해 나가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대가족 질서와 핵가족 질서를 마구 뒤섞어 편한 것만 취하면서도 자신이 누군가를 학대하거나 착취한다는 생각을 못한다. 우리나라 막장드라마는 바로 이 주제를 열심히 반복해서 다루고 있다. 

 

부모라고 해도 자식의 삶을 다 책임져 줄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는 것이 요즘의 삶이다. 설사 부모가 결혼자금을 대주고 생활비를 보조해주는 등 상당한 원조를 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부모는 부모의 삶을 살아야 하고 자식은 자식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서로 도울 수는 있지만 선을 넘느니 차라리 손을 놓아야 한다. 부모도 자식도 서로의 삶을 위기에 빠지게 하고 컨트롤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경우가 있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할 때도 물론 나름 만족한 삶을 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활환경에서는 확률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경우 곤경에 처하게 된다. 세상은 빨리 바뀌고 예전과 이미 크게 달라졌는데도 부모가 자식의 삶을 좌지우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세상이 장사꾼의 시대가 되었는데 농사만 고집하는 부모가 억지로 자식을 농사만 지으라고 하는 상황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 쉬운 것이다.

 

이것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고 당연해 보일 수가 있어도 장기적으로는 누군가의 인생을 되돌릴 수 없이 망치는 일이 된다. 독립해서 혼자 살아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차츰 빼앗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세대가 지나면 전혀 가치관이 다르다. 예를 들어 3-40년전만 해도 요리사는 기피업종이었고 한국의 전자제품이 일본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국가수가 노래를 발표만 하면 빌보드 1등을 하는 미래가 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고 명문대를 나오면 전공이 무엇이건 취직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관점에 박제된 사람이 자식을 그 시대에 고정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김연아에게 9급공무원하라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한 세대 위의 노인세대가 그 가족을 이끌면 어떻게 되겠는가? 해방직후의 가난한 시대를 지나온 그들은 아직도 소고기에 쌀밥먹는게 사람들의 꿈인줄 알고 배나 안고프게 해주면 그걸로 사람들은 고마워할걸로 생각한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소고기나 돈까스 먹으면 괘씸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초중고 무상급식을 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고 재난지원금 줬는데 그걸로 소고기 먹는 사람이 나오면 무슨 범죄가 발생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 반대로 부모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식도 부모의 삶의 핵심을 파괴하면서도 그걸 이해못하기 쉽다. 세대차이란 마치 종교의 차이와 같다. 기독교신자를 절간에 살게 하면서 여기도 참 좋다고 하면 기독교신자가 어떤 느낌이겠는가. 부모를 학대하고 착취하면서도 자신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식도 세상에는 아주 많다. 그들은 부모는 그저 당연히 주는 사람이고, 희노애락도 없고, 멍하니 골방에서 밥만 먹으면 되는 좀비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같다. 그들은 종종 부모의 것은 이미 부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핵심은 옳고 그른게 아니다. 핵심은 책임의 문제다. 부모의 관점에서 부모의 조언은 옳을 수 있다. 자식의 관점에서 자식의 조언은 옳을 수 있다. 하지만 설사 부모형제간이라고 해도 남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와 비슷한 관계는 자녀가 어린 시절의 부모 자식관계와 평생을 함께 살기로한 부부관계만 있을 뿐인데 이 경우에도 온전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자식이 성장하고 형제 자매가 성장했는데 아직도 우리가 진짜 운명공동체인 거라고 착각하며 선을 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넘어 책임질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이다. 월급이 더 많다고 꼭 더 좋은 직장이 아니고, 동네나 사회에서 더 유명인 대접해 준다고 꼭 더 잘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미꾸라지가 종달새의 삶을 걱정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이미 성장해서 성인이 되고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삶에 대해서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종달새는 미꾸라지를 종달새로 만들 수 없고 억지로 그렇게 하려고 하면 종달새 흉내를 내는 바보 미꾸라지를 만들 뿐이다. 

 

그런데 가족끼리는 그런 일을 하기가 쉽다. 나이가 들면 우리가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비록 저 사람은 한때 나와 부모자식관계였고 나와 형제자매관계였지만 이제는 낯선 타인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의식적으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연히 부담스런 간섭을 하게 된다. 사실 사람은 만난다는 것 자체가 간섭이다. 자동차 따위 경차를 타고 있어도 아무런 불만이 없었는데 형제가 페라리를 몰고 나타나는 것만으로 아내나 남편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냥 타인이면 불편하면 안만나면 되는데 안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게 가족이다. 

 

많은 사람들은 오랜동안 만나지 않았던 초등학교 동창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크고 작은 충격을 받는다. 이미 수십년이나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은 이제 서로 다른 입장이 되었다. 이건 마치 군대에서 상관으로 모시던 사람이 나중에 사회로 나와서 내 부하직원이 되는 것같은 식의 변화다. 시간이 지나서 이제 옛날의 그 사람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 옛날로 돌아가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물론 사람들은 타인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에 크고작은 충격을 받으면서 조심하려고 한다. 

 

가족의 경우는 비극적이게도 동창들처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게 아니라 계속 만난다. 그렇지만 역시 사람은 변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왜곡이 생겨나고 누적되는데도 그걸 억지로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흔하다. 10살때 5살이나 많은 언니는 모든 일에서 유능하고 따라야 하는 절대자일 수 있지만 두 자매가 30살이 되고 50살이 되면 누가 더 어린애같은 가, 누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고 리더가 되어야 하는가는 옛날과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가족내의 인간관계는 예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면 문제가 생기고 심하면 비극이 생긴다.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가족이 다른 가족의 삶을 거의 고의로 망가뜨리려고 할 수도 있다. 쓸데없는 간섭과 비판이 잦아지고 한쪽이 다른 쪽의 삶을 자꾸 평가하려고 한다. 축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단한 가수라던가 대단한 학자가 집안에서 나오면 그 자식을 멍청이 쑥맥으로 만들며 절대로 성공할리가 없다고 저주를 퍼붓는 일이 생기기 쉬운 것이 가족이다. 가족은 서로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각자의 가치관에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래서 가장 무섭고 먼 사람이다. 예로부터 동서양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버리고 혼자가 되어 수행을 하는 일이 많았던 이유는 이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이 꼭 악의로 다른 가족을 망치려고 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랑으로 그렇게 하지만 때로는 그것이 죽음의 칼날만큼이나 무서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제도나 결혼제도는 살아남아있고 사람들의 생각이상으로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미래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낡은 가족제도나 관습이 어리석고 비효율적이며 무서운 것이라고 밤새도록 욕할 수 있다. 이 글도 상당부분 그런 위험을 지적하고 있다. 해마다 민족의 명절이 되면 신문들은 일제히 판에 박은 똑같은 기사들을 쏟아낸다. 대가족이 모이는 전통명절이라는 관습이 가지고 있는 대가족의 질서를 보편적 질서의 관점에서 비판하기란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런 비판은 쉽고 대안적 삶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유일무이한 나라인데 그 나라가 이렇게 된 힘의 근원도 바로 그 가족의 힘이었다. 조선은 후진적이라고 밤새 떠들수 있지만 우리가 부자나라가 된 것은 바로 그 조선에서 물려받은 문화의 힘덕분이었다. 잘난척하면서 보편논리를 떠들어 대는게 우리나라를 필리핀같은 가난한 나라로 되돌릴 일이 안된다는 보장은 확실히 있는가? 내가 위에서 말한 식민지를 휘두른 끝에 비극을 만들어 낸 제국의 예를 잊어서는 안된다. 보편에 대한 고민없이 쉽게 보편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고민이 깊지 못한 것이다. 

 

결혼제도와 부모 자식으로 이뤄진 핵가족제도까지 파고드는 사회적 질서의 시대는 매우 기괴한 것일 수 있다. 가족제도가 붕괴한 상태에서 노인문제를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그게 어느정도나 들 것인가. 노인 자살률이 급증하고 출산률이 0로 향하는 현재의 상태는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를 지속가능하게 만들면서 결혼제도와 핵가족제도까지 지금과는 다르게 만드는 미래가 어떤 것일까?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건 그야 말로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오는 기괴한 것이기 쉽다. 기괴하다고 해서 그것이 꼭 미래가 아니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 기괴성은 우리가 사실은 전통을 어느 정도까지는 인정하고 계승해 갈거라는 점을 예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동물이다. 하지만 인간은 단지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말들속에서 범해지는 잘못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말을 부정하지 못해서 인간을 다른 동물과 똑같이 만들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형은 우리 가족이야라던가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야라는 말과 같이 그 사람은 우리 가족이야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그 의미를 계속 고민해야 한다. 그 말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또 모두 틀린 말이기도 하다.

 

핵심은 우리가 단 하나의 질서와 규칙을 가진 세상에서 사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개의 게임을 동시에 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개의 층위에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물질이며 생명이고 사회적 존재이며 지적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가족이지만 그 가족의 의미도 여러개의 층위를 가진다. 그걸 다 뒤섞으면 인간은 동물이라는 말때문에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잘못을 하게 된다.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뭔지는 모르지만 단 하나가 있을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게 답이면 저게 틀렸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가족이야라는 말은 여러 개의 의미를 경우에 따라 가진다. 

 

세상은 경제문제니 환경문제니 안보문제를 떠든다. 하지만 뜻밖에 가족 문제야 말로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키이며 미래사회로 가는 통로 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인간의 삶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가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모순이 누적되어 가족이 무너지고 왜곡되면 결국 정치를 포함한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앞에서 말한 모든 문제들도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부의 화목이나 부자의 화목, 화목한 가정의 문제는 인류를 넘어 지구의 구원에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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