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5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이 쓸모없다던가, 한국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던가 하는 말들은 한국에 정말 많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넘어서고 싶다면 이런 논의들의 표면이 아니라 그 바닥에 있는 문제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적당한 절충점이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그저 유연한 보수라던가 조심스런 진보같은 말장난에 빠지면서 이제까지 있어온 것과 똑같은 불합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보수, 진보의 바닥에 있는 문제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하고 보수와 진보를 명사로서가 아니라 동사로 파악해야 한다. 즉 이제까지 있어온 보수는 이러저러했다던가 진보는 이러저러했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보수나 진보를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보수의 가치는 본질과 정의에 있다. 세상에 어떤 관행이 있고, 사회적 인식이 있고 법이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 하는 가는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지키는가하는 것에 크게 의존한다. 예를 들어 교통법이 있다고 해도 교통시스템의 성패는 사람에 달려있다. 아무도 교통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도로는 무법천지가 되고 지옥이 될 것이다. 어떤 악법도 무법보다는 낫다.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법이 있으면 어느 정도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기준을 가지게 되지만 무법이면 항의 할 근거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시스템에 의존해서 살고 그 시스템은 어떤 본질적 규칙을 가진다.
따라서 사회적 이익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이룩해야 하는 것은 질서확립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법을 만들지만 그 이상으로 그걸 사람들에게 선전하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 아무도 투표하지 않는 공화국이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곧 우리는 계몽하고 선전하는 것이 법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끼며 선전하고 법질서를 지키는 일에 더 몰두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영어를 비교해 보자. 언어도 시스템이다. 그런데 어느 언어가 더 쉽고 유익한가를 떠나서 한국이 공용어를 영어로 하고 한국어를 안쓰기로 한다던가 미국인들이 알파벳을 버리고 한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게 쉽다면 이미 전세계는 단하나의 언어로 통일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한글이 전세계 최고의 문자라고 해도 한글이 창제된지 5백년이 되었지만 한글을 쓰는 사람은 전세계에서 아주 소수인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 시스템, 문화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은 오로지 우리가 사물의 본질을 잘 살피고 그것을 잘 파악하는 것에 달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생각은 통상 본질주의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뭔지, 법이 뭔지, 결혼이 뭔지, 사기가 뭔지는 어딘가에 잘 정리되어져 존재하며 모든 사람들이 이 본질을 잘 알게되면 세상은 잘 돌아갈텐데 불행히도 어리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본질을 몰라서 세상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주의에 따르면 우리가 세상의 본질을 흐뜨리지 않는 것이 선을 이룩하는 가장 중요한 일로 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는 부모답고 자식이 자식다워야 한다. 그러면 세상은 저절로 잘 굴러간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기도 하고 공자의 정명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합리적인 이 생각은 한편으로 불합리를 만들어 낸다. 본질을 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패러다임을 깨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본질을 잘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를 우리 앞의 문제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고 자꾸 형이상학적이고 언어유희적인 복잡한 말장난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왜냐면 세상의 복잡함앞에서 우리가 자꾸 어떤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고 노력하면 할 수록 우리는 예외적인 사건을 만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언어가 가진 뜻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날로 복잡해 지는 법처럼 말이다.
인생의 절대적 본질을 깨닫고 나서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교육의 절대적 본질이 뭔지를 정말로 알고서 교육을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종종 그런 것의 본질을 논하고 때로는 그것을 깨달은 것처럼도 느끼지만 그것은 편의를 위해 하는 말이거나 착각일 뿐이다. 그런 것이 설혹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50년전과 지금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우리의 지식과 경험을 써서 불확실한 판단을 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스템은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착각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세상이 불법과 합법으로 나뉘고 정의과 부정으로 나뉜다. 자동차는 두 개의 차선 사이를 달리면 되고 그 바깥을 달리면 안된다. 우리는 세상일이 대개 이렇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이런 식의 흑백론이 통하는 곳은 인간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시스템 내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본질주의에 기대고 종종 이 본질주의에 중독된다. 그래서 세상을 그 언어로만 본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서로 같은 사람이 없는데도 사람을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식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식능력은 제한되고 일상에 빠져 그 인식능력이 떨어지면 남들은 너무나 쉽게 보는 것도 보지 못하는 바보가 된다. 남루한 옷에 걸레를 들고 바닥청소를 하는 청소부의 삶을 살아도 회장님이라고만 불러주면 너무 행복하고 비닐봉지라도 그 위에 프라다 상표가 붙어있으면 너무 자랑스러워하며 들고다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 생명이나 유기체란 이런게 아니다. 그것들은 돌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주변의 환경과 동적인 평형을 만들고 마찬가지로 끝없이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것들의 존재양상은 마치 상대와 함께 춤을 추는 것과 같아서 상대방의 움직임에 상관없이 홀로 멋대로 움직이면 어제는 좋았던 행동도 오늘은 큰 댓가를 치뤄야 하는 행동이 된다. 인간뿐만 아니라 사회도 문명도 모두 어떤 스케일에서 보면 이런 생명이고 유기체다. 따라서 하나의 패러다임과 시스템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변해야 하는데 변하지 않으면 그 댓가는 죽음일 수 밖에 없다. 특히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빨리 변한다. 여기서 본질 찾고 원래 그렇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은 스스로와 주변을 위험하게 만들 수 있다.
본질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법을 어겼으면 벌받아야 한다'던가 '팩트가 중요하다'던가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같은 말을 지나치게 남용한다. 내가 이 말들을 틀렸다고 하지 않고 남용한다고 말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모든 말은 인간의 말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남용되고 절대시 되면 문제를 만든다. 위에서 말한 본질주의는 바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가 전체주의를 만들어 내는 원인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바로 그 전체주의 말이다.
본질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3천원 훔치면 감옥가고 3백억 훔치면 부러움을 받는다는 식의 현실을 만든다. 살인범 쫒아가는데 교통신호 어겨서는 안된다던가 저기 사람이 굶어죽어가는데 절차를 지켜야 한다며 시간만 끈다. 본질주의와 대비되는 유명론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수단으로 보고 그 목적에 집중하려고 한다. 법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법을 위해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쉽사리 특수한 관계에 빠져들어 보편성을 잊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보편만 보고 눈앞의 특수를 잊을 때 우리는 정의의 이름으로 살인을 하게 된다. 누구도 100% 순수할 수 없는데 마치 누구나 그런 것처럼 억지를 부리게 된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가 만든 시스템의 본질에 빠져서 자아를 잃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선택하는 자아이어야 한다.
중도 보수니 중도 진보니 하는 말도 문맥에 따라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문맥에서는 그런 말은 무의미하다. 패러다임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감자탕 먹을래 햄버거 먹을 래 하는데 나는 감자탕에 햄버거를 말아먹겠다고 하면서 나는 중도야 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중도니까 더 합리적인 것일까? 아프리카나 남미의 오지에서 수렵채집인으로 살아가는 부족이 있다고 하자. 그들의 문화는 보수적이고 뉴욕시민의 문화는 진보적일까? 그렇지 않다. 오지의 수렵채집인중에서 자기의 삶을 성찰하고 현재의 자기를 초월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보적이다. 반면에 뉴욕의 일상생활에 빠져서 그것만 아는 사람은 보수적이다. 똑같은 물건이 누구에게는 망치고 누구에게는 돌멩이일 수 있듯이 같은 문화가 진보일 수도 보수 일수도 있다. 미국과 한국 문화의 어느 한 중간에 자기를 놓고 살아가면서 변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중도진보쯤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 사람이야 말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진보는 가장 감수성이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진보의 가치는 현실상황을 시스템을 넘어서 선입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에 있다. 최저임금이 지금 만원인데 그걸 2만원으로 올리자고 하면 진보가 되는게 아니다. 우리 사회와 우리 사회를 둘러싼 세계를 통찰하고 우리가 변해야 할 부분을 말하는 것이 진보다. 굳이 이런 통찰력을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진보는 기존의 패러다임안에서는 말로 자신의 뜻을 잘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걸 잘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보수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노동운동이니 패미니즘이니 하는 것들이 짧게 잡아도 반세기 이상 이야기되던 것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같은 이야기만 반복하고 있다면 이들도 이미 보수라고 할 수 있다. 거대 노조도 기득권이고 진보정치하면서 정치적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도 기득권이다. 서구의 현실이나 30년전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도 그리로 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진보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보수일 가능성이 크다.
세상에는 위선적 보수가 많다. 그들은 스스로는 시스템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그것을 지키라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세상에는 위선적 진보도 있다. 그들은 실제로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자신도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실천과 행동이 없고 대안이 없으며 있는 것은 그저 거대한 시스템과 싸우기만 하는 일이다. 그러면 자신이 말하는 것이 되지 않은 이유가 저 거대한 시스템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연단위에서 신문사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쓰레기로 만들며 자신의 명성을 얻고자 하지만 정작 자신은 데이트폭력을 행하는 그런 식이다. 뭔가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없이를 고민하지 않고 떠드는 진보는 만원한장 벌지 않으면서 왜 집안살림이 이 모양이냐고 말하는 가족과 다를것이 없다. 국가를 논하기 전에 작은 마을이라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미담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아닌가. 폭군에 맞서 싸우는 백성은 훌룡한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보수주의자이지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좋은 왕을 찾고 있는 것이지 대통령이 다스리는 공화국의 이상을 가진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가 시스템에 있다면 진보의 가치는 인간의 깨어남에 있고 행동에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역시 처음에는 문화적 소수자들의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그들이 보수라는 뜻이다. 이름이 보수냐 진보냐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대중화되고 기득권화되었다면 그들은 그에 걸맞는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단순명료하게 말할 수없다. 그런 말을 듣고 이해하기에는 대중이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행동으로 자신의 문화를 보여준다. 그들은 다르지만 스스로 행복하다. 스스로 정의롭다. 스스로 유지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합류하고 그렇게 성공하면 그들은 때로 마침내 주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의 목적은 꼭 다수파가 되는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해서 진보주의자가 되었을 뿐이다. 대중화에는 보상도 있지만 댓가도 있다. 소수일 때, 진정한 진보일 때는 우리가 걸고 있는 것은 대개 우리의 삶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대중화되어 상당한 사람들의 삶을 그 시스템안으로 초대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이걸 무시하는 것은 사기요 무책임이고 종종 그저 이기주의다. 내가 살기 불편하니 내가 바뀌는 대신 온 세상이 바뀌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진보가 뭐고 보수가 무엇인가? 이걸 묻는건 이미 본질주의다. 그런 말이 어떤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나를 이해하고 나면 그런 건 세상에 이미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는 대개 보수로 살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태어난 대로 적응하고 산다. 누구나 차를 타면 교통법을 지켜야 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면 그 사용법을 지켜야 하며 남들하고 대화할 때는 상식에 기대어 아는 말로 해야 한다. 사회적 질서란 소중한 것이다. 운이 좋다면 어쩌면 우리는 평생 이렇게 살면서 내 내면만을 보고 세상과 평안하게 공존하며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 안에 완전히 매몰되고 싶지는 않다. 때로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 우리는 때로 양보할 수 없는 문제와 부딪히게 된다. 그럴 때 이따금 진보주의자는 태어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저 더 즐겁고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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