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8
한국에는 지금 사상과 야만의 싸움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문장을 보면 내가 사상의 편을 들고 있다고 할 것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사상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자기반성이 충분하지 못한 면도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상이 이기지 못하고 야만이 사상을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사상이 세상을 보는 눈이 충분히 깊지 못해서다. 창의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야만이 사상에 대해서 가지는 불만은 두 종류다. 하나는 기득권이 가진 야만적 욕망을 사상이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법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특권을 누리고 싶다. 그걸 심지어 과시도 하고 싶어하지만 인간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사상은 그걸 제약한다. 그러나 숫자로 보았을 때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고 따라서 민주주의 선거에서는 사실 이들만으로는 승산이 없다. 그런데도 왜 야만이 의미있는 정치집단일 수있는가? 그 이유는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불만때문이다. 이들이 가진 불만은 사상을 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세상이 문화적으로 싫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기득권도 아니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가 많다. 이들이 이런 불만을 가진 이유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능력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그런 시도가 오히려 이들을 해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은 틀린 것만도 아니다. 이들을 야만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들은 사실 논리나 증거같은 말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통을 포기하고 폐쇄적이 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야만이다.
하지만 사상은 사회적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보살핀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에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사상은 물론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보살피려고 한다. 다만 그들이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란 바로 그 사상의 눈으로 파악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다. 누가 약자이고 피해자인가는 바로 그 사상이 결정한다. 이런 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두 기득권층으로 부르는 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 오만이다. 왜냐면 그 사상은 결국 유한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학때 느낀 분노를 한번 다시 적어보겠다. 내가 대학시절 내 모교는 아직 개교한지 몇년되지 않은 학교였는데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살았다. 그런데 2인 1실의 기숙사방을 배정하는 방식을 거의 매학기마다 바꿨다. 이번에는 같은 학년의 다른 과 학생과만 룸메이트를 할 수 있었는데 다음학기에는 같은 과 학생과만 할 수 있고 그 다음학기에는 선배와 후배가 짝을 지어야 하는 식이었다. 이런 각각의 배치원칙에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름의 좋은 의도가 있었을거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학생들은 죽을 맛이었다. 책상앞에서 누군가가 원칙을 정하면 이사다니고, 마음에 드는 친구와 헤어지고를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사상이란 고작 이런 것이다. 정부에서 좋은 생각가지고 뭘 한다고 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천하에 바보같은 간섭이요 부당하고 모욕적인 명령이 된다. 종종 현실을 모르는 바보들의 판단처럼 보인다. 그런데 '좋은 생각'이 넘쳐나는 민주 계열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괴롭힌다. 뭘 하나 바꿀 때마다 적이 늘어난다.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면 안된다. 왜냐면 세상에는 바꿀 것이 워낙 많고 그들은 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어떤 걸 바꾸느라 매우 힘들었지만 뭔가 다른 것이 바뀌면 애초에 그런 걸 바꾸려고할 필요도 없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의 모순이 너무 누적되어 사회적 공감대가 생겨날 때만 그걸 바꿔야 한다. 여기서 희생자 한명 생기면 이 법만들고 저기서 희생자 한 명 있으면 저 법만들고 하는 식으로는 누군가를 구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피해자로 만드는 혼란만 더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누더기가 되고 구멍이 더 많아져 불만은 더 커진다. 그렇게 할일이 없는가? 정말로 집중해서 바꿔야 할 것이 따로 있지 않던가? 개혁은 꼭 필요한 것에만 어쩔 수없이 집중해서 하는 것이다.
기득권만 욕망을 가진 것이 아니다.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사상에 따라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사람들에게도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바로 그 사상속에 반영시켜서 그걸 잘 숨긴다는 것이다. 그게 당연해 보이도록 말이다. 교묘하게 그 욕망을 잘 숨기는 능력이 뛰어나면 날 수록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지적하기 힘들지만 결과적으로는 개혁은 누군가에게는 숨쉬기 쉬운 곳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어려운 곳이 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능력위주로 승자가 더 많은 댓가를 받도록 한다는 원칙은 당연한 것같지만 여기에도 함정은 얼마든지 있다. 깡패들은 걸핏하면 남자답게 우리 주먹으로 승부를 내자고 말한다. 그들은 죽자사자 싸우는 주먹싸움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어느 면에서는 공평하다. 미적분이나 법전으로 승부를 내자는 것도 꼭 공평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것으로 세상을 본다. 소위 사상가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민주당은 2016년 대선에서 패배하고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마크 릴라는 이때 소위 정체성 정치에 몰두한 것이 진보주의 정치가 저지른 잘못이라는 지적을 했다. 지금의 여당인 민주당이 과연 이 지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대표적으로 이번 대선에서는 여성가족부와 페미니즘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야당에서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고 까지 하고 나선다. 20대 남자를 말한다는 이대남들이 보수를 지지한다고 말한다. 이게 아니라도 자칭 페미니스트와 그들의 반대자들이 극렬한 싸움을 벌이는 일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여당 후보인 이재명은 젊은이들은 남과 여로 나눠싸울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와 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적절하고 옳은 지적이지만 이것이 과연 야만으로 눈이 먼 사람들의 귀를 열어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이번 대선에서 일어나는 야만적인 일에 대해 분노하고 거기에 대해 어떤 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가 통할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진정하고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통하지 않을 것이다. 논리나 증거는 2차적인 문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들은 논리와 사상 자체를 사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말들이 모두 사기라고 믿는 것이다. 이건 사이비종교에 빠진 것과 같다. 그들은 좁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세상에는 언뜻 들으면 지구가 평평하다던가 백신접종은 빌게이츠의 음모라던가 하는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그런 것에만 귀를 기울인다.
얼마전에는 사학자 전우용이 이런 트윗을 올렸다.
김건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으로 35억 수익 실현 추정. 윤석렬 장모, 양평땅 개발로 800억 분양 수익 추정. 윤석렬 장모. 사위가 행정원장인 요양병원 운영으로 건보료 22억 수입. 윤석렬 검찰총장 특활비 147억 사용내용 불명.
이재명 부인, 고기값 11만 8천원등에 법인카드 사용 의혹.
50억을 푼돈이라고 하는 것들에겐, 11만 8천원이 엄청난 목돈으로 보이나 봅니다. 그리고 멧돼지를 보곤 꼬리말고 숨죽이다가 개미보고 발광하는 개는 사냥개가 아니라 똥개입니다.
여기에 달린 한 댓글이 내 눈을 끌었다. 잘못은 둘다 잘못했다, 그렇다고 이재명부인이 무죄라면 나도 앞으로 그런 죄를 저지르고 살겠다. 내 입에서는 한숨이 나온다. 어디까지나 의혹이지만 민주계열의 사람들에게는 10만원 남짓한 돈의 사용처를 제대로 밝히라면서 아예 의혹을 범죄로 단언한다. 반대로 국힘당 관련 사실들은 의혹이 아니다. 10만원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변명도 착오도 있을 수 있지만 몇십억 몇백억을 우연히, 착오로 벌 수가 있는가? 백번 양보해서 이런 것들이 모두 의혹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하자. 그러니까 지금 이재명 선거 조직에서 10만원어치 고깃값을 제대로 냈나 안냈나를 가지고 대서특필하고 유죄무죄를 따지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런 말이 그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다스같은 거대 회사를 키우고 지배하며 부패한 이명박과 시골에서 농사짓던 노무현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독재자 박정희를 청렴한 정치가로 기억한다. 그들에게 날카로운 비판이란 그저 다시 한번 날카로운 칼로 자기를 찌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선택적으로 사회적 불의에 분노한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아마도 한방에 이걸 해결할 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몇가지는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모든 문제의 뿌리는 신뢰와 문화적 단절에 있다는 사실이다. 옳고 그름이나 정의는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따질 수 있는 것인데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단절상태에 들어가면 그 사람들은 이쪽의 눈으로 보면 바로 야만의 집단이 된다. 우리는 축구를 하는데 저쪽은 농구를 한다. 그러면 모든 행동이 다 반칙이다. 그런데 문화적 단절, 소통의 단절이라는 문제가 과연 그 사람들만의 문제일까?
누군가가 조잡한 사상으로 세상을 보면서 이게 당연하다, 저게 당연하다 하면서 어떤 사람들을 완전히 소외시켜 버린 건 아닌가? 그런 소외가 한두사람에게 일어나는 것도 나쁜 일이겠지만 만약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을정도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다면 그건 분명 문제가 아닌가? 가치가 있고 공동체가 있는게 아니라 공동체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설픈 보편주의로 사람들을 갈라서 사회를 분열시켜봐야 되는 건 없고 아픔만 늘어난다. 그러니까 아직 미개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잘 모르지만 이 법만 어찌 통과시켜서 실행하면 다 알게 될꺼야 식의 계몽주의식 사고는 위험하고 성공하지도 못한다. 오만이다.
우리는 정체성 사상을 멀리해야 한다. 정체성 사상은 자꾸 사람들을 나눈다. 여러 이익단체들은 자기들의 단합을 위해 이런 정체성 사상을 강화하지만 바로 이런 식의 사고 방식이 사람들을 다치게 만든다. 나누지 말고 따지지 말아야 한다. 모두가 받는 무상급식, 모두가 받는 재난지원금이 괜찮은 생각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가 인간이고 모두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지키며 나가야지 사람을 이리저리 나눠서 이 사람은 이렇게 돕고 저 사람은 저렇게 돕는다는 식의 생각에 빠져들면 결국 또 피해자를 낸다.
남자가 문제가 있고 여자가 문제가 있는게 아니다. 문제는 감수성과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이 문제다. 남자던 여자던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애같은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식으로든 싸움은 생긴다. 우리는 극단주의자를 멀리 해야 한다. 누가 극단주의자인가? 자꾸 사람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는 자기 정체성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몇몇은 환자라고 할 정도로 심하다. 그런 사람들은 독이 된다.
사상은 깊이를 달성해야 한다. 그래야 인간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얇팍한 논리로는 그게 안된다. 기계를 잘 모르는 노인이 인터넷 기사를 불러서 인터넷을 설치한다고 해보자. 그 기사가 제 아무리 멋진 계약조건을 내밀고 멋진 설명서를 내밀고 논리적인 설명을 해도 그게 중요한게 아니다. 노인은 현명하게도 알고 있다. 구멍 하나만 있어도 그 번지르르한 말들이 다 소용없다는 것을. 그 사람은 설명서와 계약하는게 아니라 사람과 계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 기사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는 것이다.
깊이를 달성한 사상이란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게 아니라 자기 생각없이 세상을 보는 사상이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상이다. 세상에는 말과 논리로 표현하지 못하고 소통되지 못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겸손한 사상이다. 얄팍한 사상이 세상을 휘두르면 세상에 피해자만 즐비하다. 그래서 노자는 법이 더욱 밝아지면 도둑이 많아진다고 말했을 것이다. 좋은 세상은 좋은 법이 만드는게 아니다. 언제나 그건 좋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말에 빠지면 우리는 그걸 자꾸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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