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
지방대가 몰락하고 있다는 뉴스가 요즘 많이 나온다. 물리학, 수학, 철학등 기초학문이지만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학과가 없어지고 학과들은 통폐합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대학교수들이 직위를 잃게 되는 일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남쪽지방부터 벚꽃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없어질거라는 기사가 뜨는가 하면 대학교수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세일즈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친인척 아이들을 동원해서 대학에 등록했다가 자퇴하는 편법을 쓰는 일도 있다고 한다. 대학 입학생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이를 두고 인구구조에 따른 것 즉 저출산의 결과라고 말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하고 올바른 진단이기는 하다. 그러나 조금 더 뒤로 물러나 보면 지방대의 몰락은 여러가지 다른 측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선 첫번째로 대학이 연구와 교육의 기능을 동시에 담당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 다시 제기 될 수 있다. 대학은 대학교수가 필요하고, 교수는 다른 무엇보다 연구 능력으로 발탁된다. 논문을 많이 쓰는 사람이 교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교원 발탁을 보면 대학은 연구기관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대학은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소라는 것이 요즘은 당연시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학을 취직하러 간다고 생각한다.
이 간극은 커리큘럼에서도 문제를 만드는데 대학원에 진학하여 연구를 할 사람이 배워야 할 내용과 졸업하면 당장 취업하겠다는 사람이 배워야 할 것이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과 돈의 문제다. 연구에는 돈이 들고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물론 사회는 교육도 필요하지만 연구도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기관과 연구기관을 함께 뭉쳐놓으니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효율적이 된다. 이건 마치 발레를 가르치는 학교를 운영하면서 그걸 가르치는 사람들은 요리 능력을 중심으로 선발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요리사들이 과연 발레를 잘 가르칠까? 음식 조리법을 개발하는데 왜 발레 교습비의 일부가 전용되어야 하는가?
대학은 고등학교처럼 평준화되어야 하고 고등학교교사처럼 전문교원들에 의해서 대학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사실 대학교육의 상당부분이 이미 교수가 아니라 대학강사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결과 이름만 교수로 불리는 대학강사들은 대학교육의 상당부분을 담당하면서도 고등학교 교사보다 훨씬 못한 노동조건에 휘둘리고 있다. 게다가 학생들에게도 이건 매우 안좋다. 과연 고등학교보다 상급 교육기관이 대학의 교육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는거 맞을까? 가르치는 것과 연구하는 것은 다르다. 요즘에는 인터넷 강의가 많다. 세상에 유명한 스타 강사들이 연구자로서의 능력이 뛰어났다면 애초에 그런 길을 가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능력을 시대에 맞춰 개화시킨 것이다.
지금은 그래서 대학은 저질의 노동환경을 대학강사들에게 제공하고 저질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면서 연구하는 교수를 뽑고 그렇게 대학을 유지시킨다. 대학교수들은 대학교수대로 늘어만 가는 잡일때문에 본인의 연구는 어렵기만 하다. 이렇게 대학이 연구기관과 취업준비기관을 모두 담당하는 것이 점점 무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지방대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순수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이나 수학이나 철학따위의 학과들은 결국 연구를 위해 존재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이런 시대적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따라서 없어지는 것이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결국 지방대의 몰락은 다른 학과로 번지고 망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대학평준화를 해서 대학을 지금의 고등학교처럼 운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결국 학생이 원하는 것은 요점만 잘 가르치는 학원강사이고 취업을 위해 대중적 내용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대학이 연구하는 교수들을 그들 앞에 가져다 놓고 아주 소수의 연구자들이나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니 말이 안되는 것이다. 고등학생의 70% 이상이 대학에 가는 시대다. 대학은 이미 대중화되었는데 대학은 여전히 인구 1%의 사람이나 진학해서 지식의 최첨단에서 연구하는 그런 곳이 되려고 한다. 말이 안되는 것이다.
교육만 망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는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매해 박사학위소지자들은 쏟아진다. 지방대에서 수학과가 없어진다고 하자 그 기사에 붙은 댓글중 하나는 이제 수학교수 자리가 줄어드니 수학대학원에 갈 사람이 더 없어지겠다는 거였다. 즉 언젠가는 수도권에도 퍼질 지방대의 몰락은 사실 연구환경쪽으로는 이미 수도권 대학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사학위자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회가 그런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연구비를 지출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문제다. 조선의 실록을 번역한다고 해보자. 그걸 하려면 연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걸 해서는 취업에 도움이 안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같은 상황을 유지하면 사회가 필요한 조선실록 번역이 안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일이 모든 학문분야에서 일어나게 된다. 학문은 개인적 취업이 아니라 공공성을 가진다. 학문이 쓸모 없는 것같지만 학문이 죽는다는 것은 도로가 없어지고 수도가 없어지고 전기가 없어지는 것같과 같은 사회 문제를 일으킨다.
이렇게 한발 뒤로 물러서면 지방대의 몰락이라는 것이 단순히 학생이 없어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대학을 평준화해야 한다. 공공성을 가진 연구는 세금을 써서 다른 곳에서 행해야 한다. 그래야 전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사실 별로 쓸데도 없는 입시공부때문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쓰고 있는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참고 공부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말고는 입시공부는 대학공부나 연구자로서의 기초 학력을 기르는 일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 지금 대학입시는 줄넘기로 학생을 뽑거나 사서삼경 외우기로 학생을 뽑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그런 것도 노력해서 잘하는 학생들은 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전교1등 하는 아이들의 상당수는 마라톤으로 사람을 뽑아도 우수성적을 낼 것이다. 성실성과 참을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제 빨리 푸는 능력따위는 대학들어가면 별로 쓸모가 없는 기술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이고 낭비인가. 그 엄청난 사교육비는 그럼 뭐하러 지출하고 있으며 날마다 야간자율학습에 학원으로 다니는 아이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게 다 지금 대학이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야 하는 것은 입시제도나 고등학교 교육이 아니다. 대학이다. 우리는 왜 학부모와 학생들을 고문하고 있을까? 입시지옥만 없애도 출산률이 올라갈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한발 더 뒤로 물러서서 대학에 대한 더 큰 그림을 보도록 하자. 문제의 가장 큰 뿌리는 대학의 세속화에 있다. 우리는 대학생을 종교인으로 보지 않지만 사실 대학생이라는 것은 일종의 종교인과 같은 것이었다.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자기 내적 평화와 욕망을 추구한다. 세속화되어 거대한 건물을 추구하거나 큰 재물을 추구하고 권력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예수건 부처건 큰 교회짓고 절 지으라고 설교하지 않았다. 해방되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구원받으라고 했을 뿐이다.
대학 이야기하다가 종교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당황스럽다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와 대학의 변화에는 굉장히 유사한 점이 있다. 사실 종교는 지금의 대학처럼 과거에는 그 사회의 지식을 담당하는 분야였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종교라고 하면 그걸 순수히 믿음의 세계라고 생각하지만 종교의 시대에 종교적 가르침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 즉 확고하고 변할 수 없는 진리였다. 마치 대학에서 가르치는 뉴튼 법칙 같은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은 과거에는 구분되지 않았고 종교집단은 많은 지식을 독점적으로 가지고 그걸 전수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했다.
그런 종교는 세속화되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는 권력을 추구하고 교인이 되는 것이 돈과 출세를 위한 길이 되어 버렸다. 서양에서는 면죄부라고 해서 아예 천국가는 티켓을 돈받고 팔기도 했다. 물론 한국에도 마찬가지다. 점봐주고 소원들어주는 것이 불교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시대에 성장한 것이 바로 현대과학이다. 현대과학은 초기에는 매우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때의 합리는 기독교가 합리였으니까 관찰하고 측정하고 거기에서 수학적 질서와 법칙을 추구한 사람들의 행위는 말도 안되는 것으로 비판받았다. 이때의 귀납적 진리에 대한 비판은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식의 일을 해서 뭐가 되나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그런 말이 틀리지도 않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당대의 과학은 워낙 초기여서 실용적 가치는 별로 없었고 답이 없는 질문도 엄청 많았다. 지금 보면 지구가 둥글고 돌고 있다는게 당연하다 싶지만 지구가 돌고 있다면 왜 우리는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며 바람이 한쪽으로 계속 불지 않는가 같은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는 사람은 지금도 대부분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학문의 틀에서 얼마나 빨리 얼마나 엄청난 지식이 누적될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즉 과학이란 애초에 믿음과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돈벌고 출세하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본래의 종교적 의미를 망각한 것이듯 과학 나아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본래는 돈벌고 출세하고 그런 것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인이 종교를 통해 우주적 진리나 신에 도달하려고 하듯 학문을 하는 사람은 그런 행위를 통해 이 세계의 진리에 도달하고 그것을 통해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학문을 하는 것이 보람되게 느껴지기에 그런 걸하면서 살고 싶으니까 학문을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은 자기 수양과 자기 실현의 길이다.
여러가지 이유로 학문이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일일 때 이런 학문의 순수성은 지켜질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지성의 교회당같은 곳이었다. 즉 대학문을 들어서면서 우리는 이제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건 고등학교 졸업생의 7-80%가 대학에 가는 시대에 맞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돈에 눈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떤 사람이 뭔가를 하는 것은 모두 돈때문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시대에는 맞지 않다. 어떻게 살 것인가, 뭘하고 살 것인가가 모두 그냥 돈 많이 주는 쪽으로 가야지라고 답해져서는 안되는데 말이다.
대학은 세속화되었다. 대학은 오타쿠처럼 순수하게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순수한 괴짜들의 장소가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것이 대학을 크게 확장하는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것은 마치 교회의 세속화가 종교의 시대를 끝장 냈듯이 대학의 몰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을 뿐이다. 아직도 선전문구나 책에는 대학이 숭고한 곳이라는 말들이 남아있지만 그것은 대학에서 일하는 교수들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리둥절한 말일 뿐일 것이다. 그들은 세속화된 대학에서 숭고함따위는 보지 못한지 아주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거대한 조직의 관성에 따라 역사가 반복될거라고 생각한다. 대학이라는 이름은 이미 너무 관성이 붙어버렸다. 그러므로 진짜로 자신이 가진 생각에 헌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모임 장소를 만든다면 그걸 대학이라고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착각할 테니까 그렇다. 조선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학문이 들어오자 학교를 서당이나 서원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대학이라는 말은 이미 너무 오염되었다. 물론 종교의 시대가 갔지만 교회와 절은 남아있듯이 미래에도 대학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곳은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종교의 시대 그리고 대학의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당장 내년에 일어날 일은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대학이 몰락한다면 그것의 궁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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