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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틀을 깨는 교육

by 격암(강국진) 2024. 5. 22.

세상에는 이전과는 다른 교육을 한다는 곳들이 몇몇 있다. 최근 자료조사차 그런 곳들을 들러보았는데 어디나 과연 대단하군하는 인상을 주는 곳들이었다. 호의적인 기사와 그곳들을 소개하는 책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곳을 발견한 후 몇일이 지나고 나면 세상은 바뀐게 없는데 나는 번번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건 비판이라기 보다는 그냥 느낌일 뿐이므로 직접 그런 곳이 어디인가를 말하지는 않겠지만 틀을 깨는 교육이라는게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왜냐면 틀을 깬다는 게 뭔가에 대한 확고한 아이디어를 가지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저 교수당 학생비를 확 낮췄다거나 학생 스스로 학습하는 자기주도형 학습이라거나 토론 세미나형 교육이라거나 문제 풀이 중심형 교육이라거나 하는 식만으로 틀을 깨는 교육이 되는 것일까? 

 

나는 한번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 문제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막연히 과거시험이라고 하면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유학시험이니 공자 맹자 이야기나 물어볼 줄 알았던 과거시험문제가 뜻밖에 상당히 구체적인 전략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이런 문제에 대한 주관식 논술문을 써서 제출하는 것이니 과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뜬금 없이 조선시대 과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금과는 달랐던 조선 시대의 시험이나 공부방식에도 불구하고 그때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나름 합리적이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당연한가? 그런데 이런 걸 생각했을 때 지금의 교육과 다른 것이면 틀을 깬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는 미래로 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과거로 가기 쉽다. 즉 오랜동안 실종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게 된 것을 다시 하면서 그것이 틀을 깨는 교육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지금의 교육을 비판한 들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변해온 것인데 과감히 조선시대 교육으로 돌아가면 그게 틀을 깨는 교육일까 아니면 시대역행적 교육일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니 과거의 것이 이제는 진보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그게 틀을 깨는 교육이 아니라고는 확실히 말하지 못하겠다. 예를 들어 고전 200권을 읽고 졸업하는 것이 교육과정인 미국의 세인트존스 칼리지가 그런 예다. 내가 이 대학을 언급하는 것은 차라리 이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1937년에 200권을 선정한 이래 같은 책으로 교육해 왔다는 이 대학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에 이르는 고전 2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교육과정의 전부로 삼는다. 4년에 200권이면 대충 한주에 한권정도다. 생각해 보면 상당한 분량으로 그냥 읽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이해하고 토론하려면 누구나 그렇게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인류의 고전 운운하는 책들 중에는 책 한권으로 한 학기 강의가 되는 책들도 있을테니까 그렇다. 

 

내가 차라리 세인트존스 칼리지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대학의 교육목표가 단순하고 명쾌하기 때문이다. 고전 2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 단순하므로 의미있는 성취가 있을 것같다. 무슨 창의력이 어떠네,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네 하는 식으로 추상적 목표를 세우는 것은 좋지만 수단이 문제다. 명확한 비전이 없으면 그냥 이것저것 필요해 보이는 것을 조금씩 하고 마는 교육과정이 되고 말고, 과연 그것만으로 지금의 대학교육보다 더 좋은 교육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토론형 교육이라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25년쯤 전에 이스라엘에서 살아본 내 관점으로는 그것은 유태인 교육이라는 느낌이 든다. 유태인들은 토론을 굉장히 강조해서 공부할 때는 언제나 모여서 토론을 한다. 혼자서 어떻게 공부하냐는 식이다. 즉 그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답이나 정리에 도달하는 과정을 강조하고 그래서인지 유태인들이 세미나 같은 곳에서 말을 엄청나게 많이 한다. 다시 말해 앞에서 말한 고전읽기도 그렇지만 토론형교육이라는 건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유태인들 사이에서는 상식이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육이 정말 새롭기는 참 어렵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교육에 문제를 느끼는 사람은 대부분일 지 몰라도 대안적인 교육에 공감하는 사람이 대부분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대학이 일론 머스크나 샘 알트만, 워런 버핏같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교수로 쓴다고 해보자. 거론한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했고, 그들이 하루 하루의 시간으로 얼마나 되는 돈을 버는가 같은 것을 생각해 볼 때 불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이 대학교수라면 그 대학의 인기는 절정일 것이다. 그 대학의 커리큘럼이 뭐니 같은 것은 따질 필요도 없다. 만약 내가 거론한 사람들이 누굴 가르치는 일에 있어서 훌룡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그럴 것같은 사람들을 가상으로 모아볼 수도 있다.

 

내가 말하는 포인트는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사람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만이 공감하는 대안적인 대학에 얼마나 훌룡한 교수들이 올까?  나는 누군가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대안적인 대학의 교수들이 훌룡하다면 기존의 대학교수들도 훌룡하고 이건 경쟁과 비교의 문제이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대학교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교수가 된 사람들이 간단한 리가 없다. 리그로 치면 이건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와 동네 조기축구만큼의 차이가 날 것이다. 이 문제는 대안교육이 모두 피할 수 없는 것으로 결국 시스템이 좋아도 왠만큼 좋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교육비전이 너무 너무 확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류교육과 경쟁할 수 없다. 

 

틀을 깨는 교육이란 어떻게 말하면 교육혁명이다. 혁명을 하겠다는 사람은 대개 다 불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비전의 확실함이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데 교육 혁명 운운하는 것은 그냥 과대 광고에 불과하고 괜히 거기에 혹한 학생들만 피해를 볼 뿐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누굴 속여서 데려오듯 하는게 아니라 솔직히 말하고, 같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투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나도 새로운 교육이 좋다. 지금의 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수백년간 개량되어져 온 지금의 교육 시스템을 과소 평가할 수는 없다. 아예 대학에 안가는 것이 대안이라고 하는 쪽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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