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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바다기행

소설 바다기행

by 격암(강국진) 2011. 10. 24.

%이 이야기는 20년전에 제가 쓴 소설입니다. 이야기 카테고리를 만든 김에 올려봅니다. 


바다 기행.


1. 바다는 긴 기억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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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철준. 어느날 반바지에 모자를 쓰고 나는 자전거를 끌고서 길을 나섰다.

두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찬바람을 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과 직장에서

멀어질수록 마음이 편해지는 거였다.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동해 바다와

만났다. 바다는 넉넉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동해안 꼬리 주변의 이 어촌에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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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너무 높이 떠오르지 않은 아침녁이었다. 나는 바다를 바라볼수있는


언덕에 자전거를 세우고 바닷물을 퍼올리는 관위에 걸터앉았다. 이어폰을


통해서는 잔잔하게 퉁겨지는 기타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다는 비스듬히 비춰진


아침햇살에 수많은 빛알갱이로 반짝이고 있었다. 바다위에 떠있는 두척의 배는


미처 잠에서 다 깨지 못한 모습으로 한가로이 움직였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긴


자욱이 그뒤를 따랐다. 숨을 들이마시면 거기엔 그리운 냄새가 있었다. 


하늘에는 어지러운 새떼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 내가 있었다.



재경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때 나의 기분은 어떻게 설명할수 없는 것이


었다.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 그리고는 허무함 또 그리고는 슬픔....


재경은 술을 많이 마셨고 차를 몰았다.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알수가 없다.


차는 곧장 축대 밑으로 떨어졌고 도로에는 타이어 자국이 없었다.


왜 재경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을까? 밟을 수 없었던 것일까?


내게는 열어보기 두려운 진실과 사람들로 부터의 비난 만이 남았다. 동거하던


여자를 버린  남자와 비관해 자살한 여자 우린 이렇게 기억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기운이 없었다. 아마도 가장 슬퍼하는 것은 나일텐데도 사람들은


그걸 느끼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것은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였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그녀를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나는 얻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내가 그랬듯이 또다른 과친구를 말없이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 그를 향한 마음으로 꽉차있었다. 섭섭했지만


난 표시내지 않고 그녀 옆에 말없이 머물렀다. 너무 자주 만나려하지 않으면서,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짝사랑이 이루어지기 바라면서, 그녀에게 '부담'없는


친구가 되는 것이 내가 될수있는 전부였다. 아무리 만나도 남자로는 다가오지


않을 그런 부담없는 친구 말이다. 그걸 위해서 나는 약간 실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민재는 좋은 녀석이었다. 남자인 내가 보기에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민재는  인기있는 남학생들중 몇몇이 그렇듯 한 여자에 몰두하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았고 재경은 그중에서 좀 더 친한


한명일 뿐 뭔가 특별한 존재는 아니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재경은 기다렸다.


자신의 목마름은 외면한채 언제나 그의 앞에서는 따뜻하고 포근한 여자가 되어


그의 휴식이요 즐거움이 되고자 했다. 그녀가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낀다는


사실을 언젠가 그가 알아주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는 비굴하게까지 보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그시절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우울해져 홀로 술잔을 기울일때면 나는 민재를 부러워 했다. 나는 왜 미팅도


안하냐고 묻는 재경의 말에 난 이 여자 저여자를 만나고 다닐수있는 민재를 다시


부러워했다. 재경이 민재를 만난다면서 나와의 약속을 취소한다고 할때면 난 정말


그가 부러웠다. 정말로 그랬다. 나는 몸서리쳐지게 혼자였을 뿐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그녀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했다.


그뿐이었다. 그게 나였다. 사랑받고 싶은 여자에게는 사랑받을 수없는 남자.


그녀에게서 멀어질수도 더 가까워 질수도 없는 남자.


어느 날 술자리에서 지금은 기억할수 없는 무언가 때문에 민재가 내가 부럽다고


했을 때 나는 웃음이 나왔다. 산다는 건 그렇게 웃기는 일인 것이다. 모두가 반대


방향을 보고 딴소리를 하고 있는 것. 그게 산다는 것의 본질 중 하나인것이다.



그녀의 기다림은 결국 보상받았다. 한학기간의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유럽


에서 돌아온 나는 내가 아는 언제보다도 행복해하는 재경을 볼수가 있었다. 그녀는


민재의 연인으로서 행복해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는


모른다. 그녀는 다만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민재가 얼마나 섬세하고 재미있고


잘생겼는지에 관해 끊없이 떠들어 대곤 했다. 둔하고 재미없고 못생긴 나는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그리고 말없이 뒤로 물러났다.  나보다 그녀를


훨 ?잘 위로하고 상담해 줄수있는 사람이 그녀에게 생겼으므로 나는 이제


그녀를 만나 길게 이야기하게 되는 일은 없어졌다. 그녀는 왜 유럽으로


쓴 편지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을까. 마지막 석달 동안 편지가 없었던 것은


무었 때문이었을까. 우리 편지라봐야 항상 친구사이의 편지 였는데...


난 궁금한건 있었지만 그런건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었다.


그렇게 그렇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지루하기만 하던 내 젊음은 이렇다할 추억도


가지지 못한 채 가고 있었다. 재경은 민재와 행복한 약혼식을 가지고 미국으로


같이 유학길을 떠났다. 그리고 한해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 것은 2년쯤 전이었고 그건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지 만으로


6년이 좀 넘은 때였다. 당시 대전에 있는 한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그녀가


우리 연구소에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너무나 놀랐지만 그건 그녀를 다시 처음 보게


되었을 때의 내 놀라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그녀는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고 발랄하던 옛 태도는 오간데 없었다. 모든일에 자신없어하던 그녀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 였다. 미국에서 민재와 결별을 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넋이 나가 보였다. 그녀에게는 분명 민재가 전부였다. 그녀는 학위 조차 없이


귀국 길에 올랐다. 내게 몇번이고 또박또박 그녀의 빛나는 꿈을 말하던 재경은,


그래서 마치 넌 자격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까지 보였던 그녀는,


바닥에 쳐박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녀는 끝없이 깊을 진흙창의 바닥밑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그 무렵의  나 역시 사는데 지쳐있었다. 그녀의 결혼식후 나는 김철준이라는 인간이


싫어졌다. 머리형을 바꾸고 헬스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몸무게를 15kg을 늘리고


하면서 나는 나를 바꾸려고 했었다. 생활 패턴도 바꾸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몰라보도록 바뀌고 싶었다. 더이상 김철준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나 자신을  점점 더 깊은 감옥에 넣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무었을 해도 더 외롭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는 내품에서 조금씩 회복되었다. 어느날 밤 우리는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다.


우리 둘다에게 그건 당연한 일인 것 같았다. 나를 다시 만나고 그녀는 술도


줄이고 담배도 끊었다. 자신감도 조금씩 회복했으며 악몽에 해메이는 일도


없어졌다. 우리는 다정하게  시내를 돌아다녔고 다 늙은 연인들인 주제에


대학교 신입생인것 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젊음을 보상받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그녀도 나도 30이었다.


나는 마치 30년간을 아니 그보다도 훨씬 긴 세월을 그 나날을 기다려 온것


같았다. 끝없을 것 같던 행복이었다. 내 평생 그 8개월간 나는 가장 행복


했다. 어쩌면  행복이 뭔지 그때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  그때는 난 나의


미래에 대해서 어떠한 근심도 가지지 않았다. 훌룡한 연구를 할수 있건


그렇지 않건 더 돈을 벌건 그렇지 않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가올 더 큰


고통의 시간을 전혀 예감하지 못한채 나는 마냥 행복했다.



모자를 눌러썼다. 해가 높아졌고 공기도 더워지기 시작했다. 여기 언제까지


있을수는 없는 터였다. 이곳에서의 나의 하루는 단순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해변으로  뻣은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탄다. 바다 바람을 쐬면서 아직도


깨끗하고 맑은 물과 모래를 간직한 동해를 구경하는 것이다. 안된 일이지만 이


도로의 끝은 포항시로 돌아가는 길과 연결되어져 있다. 나는 거기서 다시 이


어촌으로 돌아온다. 그리곤 샤워, 점심, 낮잠. 자전거를 타는 일은 꽤 피곤한


일이다. 해변을 따라 급경사길이 몇개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오후 늦게 역시


자전거를 타는데 이번에는 그냥 마을 주변을 산책하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밑으로 가면  다방도 있고 횟집들도 있고 만화가게도 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만화를 한다발 빌려 민박집으로 돌아온다. 이 만화들 덕분에 주인집 아이인


동준이와 쉽게 친해질수 있었다. 그러면 끝이었다. 그러면 또하루가 가는 거 였다.


나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왜 그럴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하여 생각 하면서.




2. 동준이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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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고 이름은 한동준이다. 키는 일미터 오십 팔 센티미터.

얼굴은 둥글둥글한 편이고 좀 많이 까많다. 그리고 항상 여기저기 상처가 팔

다리에 있다. 나는 좀 둔한 편이기 때문이다. 나의 매력 포인트는 웃음짓는

모습. 웃으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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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새신발 샀네?"

"엄마가 사줬어요." 동준이는 씩하고 웃는다. 눈이 보이질 않는다.

"자전거 타볼래?" 나는 자전거를 내민다.

                                ***

                                 *

오늘은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다. 새신발이 생겼고 무었보다 오랜만에


온가족이 즐겁게 맛있는 식사를 했다. 하지만 오늘같은 날은 한동안


없을 것이란 것과 엄마가 돈을 너무 많이 쓰셨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오늘 같은날 이런저런 걱정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는 어제


엄마가 많이 우셨던 것과 아버지와 엄마가 다투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완전히 하루를 기쁘게 보내기만 할수는 없었다.



어제의 일이었다. 엄마는 새로 사준 양말에 구멍을 내면 어떡하느냐고 나를


꾸짓으시다가 문득 양말에 구멍난 곳을 다시 보시더니 신발을 벗어 놓은 곳으로


뛰어가셨다. 그렇다. 내 양말은 내 운동화 바닥에 구멍이 났기때문에 구멍이


난것이었다. 엄마는 그걸보시더니 훨씬 훨씬 크게 화를 내셨다.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 누가 구멍난 운동화를 신고 다니라더냐." 하고 한동안 애기하셨다.


그리고 우시기 시작하셨다. 엄마는 뒷쪽 부엌으로 황급히 가셨지만은 문너머로


엄마의 우시는 소리는 너무나 잘 들렸다. 몇번이나 멈추셨다. 계속하셨다하면서


엄마는 꽤 오래 우셨고 나는 정말 어쩔줄을 몰랐다.



우리집은 가난하다. 시에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마을은 퍽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은 그중에서도 가난한 집이었다. 아버지가


다리가 편찮으셔서 일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난 엄마가


시커먼 운동화 말고 다른 걸 신고 다니시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운동화 바닥에 물이 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엄마에게 새신을 사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미안한 일이었다. 그신은 산지 두달밖에는 안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새벽부터 생선을 파시고 9살난 경순이와 7살난 동명이 그리고 나를


돌보신다.  그밖에도 엄마는 스웨터를 뜨는 일이나 체인을 잇는 것 같은 일감을


받아다가 시간이 날때마다 일하시는 것이다. 발이 조금 젖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그 구멍이 그렇게 빨리 커질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일이


이런 일들을 만들어 낼줄은 전혀 몰랐다.



아버지는 종종 어디론가에 다녀오시고는 하는데 그 곳이 어딘지 말씀하시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아버지는 어딘가에 다녀오셨다. 밤늦게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아버지는 엄마와 다투시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는 듣고만 계시다가 곧 다시 나가 버리셨다. 엄마는 나보고 문을 잠가


버리라고 하셨다. 나는 어쩔줄을 몰라서 울음이 나올것만 같았다. 엄마는 정말로


문을 잠가 버리셨다. 나는 오랬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좀 무서웠다. 아버지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새벽 2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셨고 나는 결국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자 일을 나가지 않으신 엄마는 아침부터 어디서 구해오셨는지 새 신발을


내게 내미셨다. 그것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짝 웃으시면서 말이다. 아버지도


돌아와 계셨다. 엄마가 문을 열어 주셨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아침을 먹을


때 자꾸 웃으셨다. 좀 어색한 분위기 였기는 했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


오자 엄마는 나가 놀으라고 하셨다. 여전히 엄마는 뭔가 굉장히 좋은 일이 있는


것처럼 웃고 계셨다. 난 괜찮다고 했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갑자기 나간다고


할것이 있는 것도 아니였다.



하지만 오늘은 철준이 아저씨를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나서 재밋게


놀수가 있었다. 아저씨는 과자도 사주시고 자전거를 타게도 해주셨다. 내게는


안장이 너무 높았지만 안장을 내리니까 그럭저럭 탈수가 있었다. 자전거를 타면


빠르다. 학교까지도 금방 갈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럼 한시간씩 걸을 필요가


없다. 아니다. 어차피 동생을 데려가야 하니까 자전거가 있어도 그걸타고는


학교에 갈수 없겠다. 하지만 자전거 타는 것은 재미있다. 나도 자전거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냐고 했더니 자전거 팔러 다니는 사람이란다.


내가 그럼 이 자전거 100원에 팔아요 했더니 웃기만 하신다. 진짜로는 뭘하는 사람


인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잠이 잘오질 않는다.


오늘은 어제의 일이 꿈처럼 여겨진다. 엄마가 우셨던 일도 부모님들이 다투셨던


일도 모두 꿈같다. 내일은 오늘의 일이 꿈같이 여겨질 것이다. 오늘 같은 꿈에서는


오래오래 깨고 싶지 않다. 언제 또 이런 꿈을 꿀수있는 날이 올지 모르니까 말이다.


하지만 역시  자야겠다.





3. 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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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재경. 그녀는 아담한 키에 소녀적인 분위기의 여자다. 윤기나는

머리결과 큰 눈이 내 마음에 들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 하긴 나한테 그녀에

게서 예쁘지 않은 곳을 찾아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문인 것이다.

그녀는 약해보일뿐 결코 약하지 않다. 그녀는 항상 똑똑히 자기의견을 말하는

여자이기도 하다. 내 생일날 그녀는 나에게 스위스에서 산 크리스탈 열쇠고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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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온몸에 땀이 흐른다. 이 언덕을 넘으려면 좀 더 힘을 내야한다. 한번 멈추면

자전거를 가파른 언덕길에서 출발 시키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니 멈춰서는

안된다. 잊어버려야한다. 지워버려야한다. 나는 이 말들을 마치 구령처럼

되내이면서 페달을 밟았다. 언덕은 구불구불 끝없이 길었다. 난 한번 멈추면

다시는 출발 할수 없을 것만 같았다.

                                 ***

                                  *

나는 말없이 재경 앞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미 그녀는 취해


있었다. 그녀는 정신의 고삐란 고삐는 이미 다 풀어 놓은 상태이므로 얼마 술을


먹지 앉아도  취기를 견딜수 없을 터 였다. '그만 혼자 마시고 나도 좀 줘.'


그제서야 그녀는 눈을 들어 아는 체를 한다. 그녀는 나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다.


나 또한  건드리면 무너져 버릴것 같은 그녀에게 무리하게 이것저것 묻는 다거나


하는 일을 피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연구소로 온지 한달동안 별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철준아. 나 내버려 둬.' '그렇게는 안되겠어. 왠 술을 이렇게 자주마셔.


그것두 혼자. 함부로 힘든 건 안다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이러면 몸만


축날 뿐이야. 내일이 되면 더 힘들 거라구.' '내일.... 난 말이야. 네가 앞에


있으면 정신 차린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야돼. 그런데 그게 참 힘들어. 그러니


까 철준아 나 그냥 내버려 두고 가.' '우리 친구 잖아. 서로 어려우면 돕고 그러


는게 친구지. 왜 내앞에서 괜찮은 척하려고 그러는 거야.그건...' '우리가 언제


서로 도왔니?' 언제 취했었냐는 듯한 매서운 말투였다. 그녀는 내가 이해 할수


없는 말로 내말을 자르고는 나를 쳐다 보았다.


'우리가 언제 서로 도왔냐고. 언제 내가 너를 도왔지? 넌 내가 바본 줄아나


본데 네가 나 좋아하는 거 모르는 줄아니?' 나는 갑자기 긴장했다. 우리의 대화


가 이런식으로 흘러가 본적은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조금 진지하다가도 내 시시


한 농담으로 흘러 들어가곤 했다. 이런게 아니였다. '넌 내가 바본 줄 아냐고.'


그녀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재경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았다. 항상 침착했는데... 그녀는 눈물을 닥아내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눈물은 계속 나오고 있었다. '넌 분하지도 않니? 사람도 아니야? 내가 너


필요 할때 마다 불러내고 필요 없으면 무시하고 그래도 화나지 않아? 네가 좋아


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 칭찬을 하고 그러면 화도 내고 그래야지. 그리고 다른


여자 찾아야지. 그렇게 계속 날 생각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 바보야.' 나는 아무


할말이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그 모든 위장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 그리고 내가 준 구닥다리 열쇠고리도 버리고 네가 셔츠 밑에 끈으로 묶어서


걸고 다니는 작은 종도 버려. 그리고 다른 것도 다 버려. 그렇게 별거 아닌것들


몸에 휘감고 다니는 네 모습 정말 보기 싫어. 넌 좋은 여잘 만날 자격


이 있어. 나 같은 여자 말고 말이야.' 그녀는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 켰다.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난 널 이용 했어. 난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면서


너를 계속 불러냈어. 외로와서 말이야. 널 이용한거야.' '그건.. 쓸데없는 얘기야.


넌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나 한테 그랬잖아. 그러니까 네 잘못이 아니야.' '아냐.


난 파렴치한 여자야. 버림받아도 싼 여자. 항상 널 이용하려고 하는 여자.'


그녀는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불행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당연한 업보인지 중얼거렸다. 그녀는 잘못한게 없는데도


누군가가 그녀를 욕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격는 상심을 될수있으면


그녀가 나쁜 여자이기때문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화가 치밀었다. 누가 나의 보물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었는가.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 한가. 난 주변의 몰려든 시선도 있고 해서 그녀를


어떡해서 든지 술집에서 끌고 나오려고 했지만 결국 그건 30분 정도의 실랑이가


필요했다. 난 그녀를 그녀의 아파트로 데려 갔다.



'철준아. 그럴 필요없어. 조금만 더 있다가.' 아파트에 도착할 무렵 그녀는 어느


정도 감정과 술기운을 정리하고 있었다. 난 말없이 그녀의 식탁 반대편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누구를 좋아한다는 건, 그리고 꿈을 꾼다는 건


정말 더러운 일인 것 같애.' 재경은 새로 냉장고에서 꺼낸 캔 맥주를


따면서 말했다. '그건 집착일  뿐이야.  그것도 아무 의미도 이유도


없는 바보같은 집착일 뿐이지.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집착."


그녀는 맥주를 들이켰다. "나 너한테 호감가지는 후배나 동기


여학생들도 알고 있었어. 넌 나쁘지 않아. 아냐. 민재보다 더 나은 것 같애.


생각해 보면 네가 더 성실하고 착해. 넌 잔재주 를 피우지 않아. 민재는 항상


뒤로 도망갈 명분을 만들어두지. 그래서 언제나 어떤 행동을 해도 민재를 공격하는


건 쉽지 않아.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사람이야.' 그녀는 맥주를 다시 들이켰다.


'하지만 네게도 문제가 있어. 넌 왜 나를 민재에게 밀어 보낼려고 했지? 왜


나에게 고백하지 않은 거야. 넌 항상 뒤에서 맴 돌았지. 혼자 술먹는 너에게


내가 동정심으로 사랑고백을 먼저 해야 했던거야? 넌 민재 만큼 나를 행복하게


해줄수있다는 자신감이 왜 없지? 민재는 이 여자 저 여자를 함께 만나면서도


자신은 항상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믿고 있는데 말이야.'



그건 가슴 아프게 옳은 지적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만 했다. 난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수년간이나 자신에게 말하고는 했었다. 비록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녀에게 고백 했어야 했다.  하지만 항상 후회는 내게 있어


너무 늦은 것이 었다. 특히 그녀가 민재로 부터 행복을 찾지못한 지금 나는 나의


과거를 더욱 더 가슴 아프게 후회하고 있었다. '기억나니? 너 유럽가기 전에 서원에


놀러 같다가 비가 왔었지. 왜 비 맞고 처마 밑에서 같이 서있었잖아.' 그랬었다.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놀러간 그날 우린 묘한 분위기에 휩싸인적이


있었다. 땅에서는 내린 비가 다시 안개로 변해 올라오고 있었고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한동안 있었다. 그러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뿌리


치지 않았다. 그저 나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음없는 서원에서 듣는


빗소리가 그런일을 만들어 냈는지 모른다. 비에  젖은 그녀는 소름이 끼치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이상은 아무 짓도 하지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입술을 대는 순간 그녀는 더이상 그녀가 아닐것만 같았다. 난 손을 잡고 있는것으로


충분히 좋았다. '그때 네가 나를 안았다면 우리 과거는 많이 달랐을 지도 몰라.'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맥주를 들이 켰다. 그리고는 맥주캔을


우그러뜨려 소리를 냈다.  '하긴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만.' 잠시 우리 대화에는 공백이 생겼다.  갑자기


벽에 걸린 시계가 12시를 알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젠 늦었다라고


말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것 처럼.  '나 피곤해서. 이만 잘께.' 진짜 축객령이다.


'그래. 그래야지.' 나는 일어났다. 그녀는 왠지 겁에 질린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피곤한 것이었을까? 나는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아파트 문을 열기직전에


나는 그녀를 뒤 돌아 보았다.  '재경아' '응?' 그녀는 피곤한 얼굴을 들어 나를


쳐다 보았다. 세수할때 머리칼에 묻었던 물기가 아직도 조금 남았다. 오늘도 그녀는


그때 서원 처마밑에서 처럼 아름다웠다. 오늘도 그녀는 그날처럼 순결해 보엿다.


오늘의 눈빛도 마찬가지 였다.  그녀를 안고 싶었다. 이번엔 8년전처럼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이 어떠 할까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난 그 빌어먹을 사려 깊음이 이젠 너무 싫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그녀를 들어 무릅위에 올려 놓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나에게 몸을


기댓다. 그녀의 머리칼이 기분좋게 내 뺨에 와 닿았다. '편해?' 그녀의 끄덕거림이


느껴졌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철준아. 가지마. 나


혼자있는게 너무 무서워. 너무 무서워서 끔찍한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애.'  나는


그녀를 더욱 보듬어 안았다. 그녀의 따스함이 전신으로 전해져 왔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때는 여름이었지만 왠지 밖에 나가면 얼어 죽도록 추울 것만


같은 밤이었다.





4. 사랑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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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름은 지수녕. 나이는 설흔 다섯 아니 여섯. 내 용모는 엉망이다.

머리는 흐뜨러져 있고 옷은 더럽고 주름은 왜 이렇게 많은지.

나는 생선행상을 하는 세아이의 엄마다. 항상 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나의 소망은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

남편이 힘을 내는것. 하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너무 약한 여자라고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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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주머니, 여기 싸게 민박하는데는 없나요. 잠만 자는 데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가 바닷바람에 흔들린다. 시골아낙이라기

에는 어울리지 않는 왠지 이지적인 향기. 그게 그녀였다.

'민박은... 글쎄요. 잠만자는 거라면 우리집도 가능한데요. 한번

가보실래요?'

                                 ***

                                  *

내가 중학교  다닐때의 일이다. 나는 곰순이라고 부르던 개를 한마리 키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밥을 주고 개장을 치우고 하는 일을 내가 도 맡아 했던 것이다.


앞발을 잡아 일으켜세우면 곰처럼 보인다고 해서 곰순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나였다. 나는  곰순이를 좋아했고 곰순이도 나를 잘 따랐다. 곰순이는 검정털과


흰털이 얼룩덜룩하게 난 개였는 데 참 귀여웠다. 곰순이는 나를 보면 언제나


혀를 내밀고 헥헥 거렸다. 바로 위의 오빠와 5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이유로 집안에서 가장 어린 나는 같이 놀 사람이 없었다. 유일한 친구는


바로 그 곰순이 였다. 우린 마을 여기저기를 같이 쏘다녔다.



어느 바람부는 밤이었다. 왠일인지 곰순이가 시끄럽게 짓어대기 시작했다. 난


마루에 나가 곰순이를 조용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하려던 참이었다. 아버지가


그놈의 개 팔아버려야 겠다고 하시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그건 그냥


홧김에 해보는 말씀이라고만 나는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 안일


한 생각이었다. 곰순이를 좋아한다면서 그렇게 무신경 했다는 건 변명할수 없는


잘못이었다. 다음날 집에 돌아왔을 때 곰순이는 이미 없었다. 난 며칠을 조용히


울었다. 나를 믿고만 있었을 곰순이를 생각하면서. 그 시골에서 개가 팔려간다는


것은 잔인하게 도살되는 것을 뜻했다. 날 믿고 있었을 곰순이를 생각하니 울음이


멈춰지지 않았다. '시끄럽다. 원래 개가 늙으면 고기가 질겨져서 값도 못받아.'


이것이 울면서 곰순이가 간곳을 물어보는 딸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낑낑거리며 끌려갔을 곰순이의 모습은 내 머리 속을 항상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나 자신이 배신자라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었다.



내 어린 시절은 항상 그런 일들로 채워 졌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었인지 알지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은 채 나의 일을 결정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충분히 갈수있었던 내가 상고를 가는 게 낫다고 결정 할때도 나에게


의견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시골집을 떠나 수원에 있는 오빠집으로 가야한다고


할 때도 그저 통고가 있었을 뿐이었다. 부모님과 오빠들은 내 직장을 결정할때도


그랬고 지금은 남편이 된 건수씨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라고 그럴때도 그랬다. 난


이해 할수가 없었다. 내게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왜 나에게는 아무런 자유도 주지 않고 간섭하려고 하는 것인지 정말


알수없었다. 그렇게 하면 스스로 높은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인척 할수있으니까


인가? 그래서 내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을 아침밥상에서 잠시한 생각으로


툭툭 결정해 버리는 것일까? 부모님과 오빠들은 한번 입에서 내 뱉은 말은


고집스럽게 번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나의 생각과 말들은 '철없는 것'이었고


'니 까짓게' 라는 말만 나는 수없이 들어야 했다. 그렇다. 그 시절 나는 항상


'니 까짓게' 였다.



그래서 난 건수씨와 도주를 해버렸다. 타협은 있을 수없었다. 난 건수씨와 있기를


바랬다. 건수씨는 내 생각과 말을 존중해주는 얼마안되는 사람들중 하나였고


내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더 작은 수의 사람들중 하나였다. 건수씨가


나의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물론  부모님과 오빠들은 이해 할수없었다. 그들


이 선택할  나에게 적당한 짝이란 보고 싶지도 않았다. 난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후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기화로  다시 집안 과 소통을 하고 지내


던 어느날 건수씨가 사고로 다리를 잃은 것을 두고 나는 이런 위로를 들었다.


'봐라. 부득부득 우겨서 결혼하더니 뭐 좋은 일이 있나. 다 어른 말이 옳은 건데'


그렇듯 고집스런 사람들이었다. 나쁜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다시는 친정집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수원에서 깨끗한 옷을


입고 경리일을 하던 그 시절보다 행복하다는 걸 결코 이해 할수없을 것이다.


건수씨는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심지어 한분 계시는 어머니에게 까지


폐를 끼쳤다. 나와의 일이 아니면 건수씨는 다리를 잃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런 건수씨와 같이 있는 것이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결코 이해 할수 없었다. 그를 만난 후 이제까지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내


생일 선물을 사가지고 들어오는 걸 잊는 일이 없는 그런 남자와 함께 사는 것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들은 결코 이해할수 없었다.



내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제는 울었다.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데 별것도 아닌일에 크게 울고 말았다. 최근엔 일이 힘에 겨웁다


라는 생각이 좀 들었었다.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준이가 부모때문에


조금이라도 비참해진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수없는


일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이것 뿐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난다.


그래서 어린아이 답지 않게 속이 깊은 동준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그나이에는 고집도 피우고 조르기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동준이는 그러는


법이없다. 오늘은 억지로 동준이 앞에서 많이 웃었지만 그애가 내 우는


모습을 금방 잊어버릴지는 알수없다. 세상 걱정모르고 사는 아이였으면 좋겠다.


아니 세상 걱정하지 않게 키울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듯 속 깊은 아이를 아들로


둔것은 나와 건수씨의 복일 테지만 말이다.



사고 이후 건수씨는 많이 황폐해져 갔다. 한 10여개월을 집에서 두문불출하던 건수씨


는 내 생일날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생일 선물을 사들고 왔다. 난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빨개지도록 그날은 울었다. 난 건수씨가 드디어


일어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 일년간 그는 점점 더 초췌해져만 갔다. 면도도


하지 않고 항상 표정없는 얼굴 뿐이다. 그는 아직도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건수씨가 다시 밝게 살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어제는


신체에 결함이 있는 사람이 당신 뿐이냐면서 제발 힘좀 내라고 소리까지 쳤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화가 났다. 아니 답답했다. 그를 다시 밝게 만드는


일을 나는 왜 할수없을까. 건수씨가 빨리 밝게 웃는 것을 보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이 일을 하며 살아도 좋다. 그날이 우리 가족이


온전히 행복한 가정이 되는 날일 것 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이 곧 올것을


믿으며 살고 있다.





5.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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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수가 내 이름이다. 난 그냥 보통 사람이다. 한가지 보통이지 않은게 있다면

다리하나가 의수라는 것 정도 일까. 나는 항상 좀 지저분하다. 면도도 하는 일이

드물다. 이건 직업상의 제약이 있기때문이다. 나의 꿈은 수녕이 좀 더 편하게

사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잘자라는 것.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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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걸뱅이 짓을 하는 거였습니다." 나는 내가 잠시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별과 달이 맑은 밤.

우리 두남자 사이에는 잠시 적막이 흘렀다.

                                    ***

                                     *


"어느 날 이었읍니다.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메모 한장 남겨 놓고 그녀는 미국으로


가버렸더군요. '미안해. 민재가 지금 날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결국 난 민재 이외


에는 아무도 사랑할수 없는 것 같아. 날 잊어. 난 결국 네가 나한테 원하는 것을


줄수없어. 이게 서로를 위해서 좋아. 미안해.' 그게 마지막 이었읍니다. 결국


난 민재의 대용품 이상은 될수없었던 거죠" 그는 긴 이야기를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해줄 말은 없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더러운 손을 그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무었보다 그가 우리집에서 묵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 밤 내가 집을 나와 이 언덕을 찾기 전까지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초면이라는 점도 고려 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 것 이외에 나는 다른 어떤 할말이나 행동을 찾아내지 못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내입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던  내 살아온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결혼을 해본적이 없는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건, 스스로가 더러운 욕정과


실수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린시절 나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생부터  더러운 듯한


내가 싫었다. 어머니가 손가락질 받는 직업인 다방마담을 해서 나를 키우는 것도


싫었다. 그 모든 현실이 싫었다. 때문에 나는 너저분한 타락의 길로 쉽사리


들어서고 말았다. 나는 비참할 뿐인 현실로 부터 도망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사생아라는 기억은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나는 그 문제에 몰두했었다. 돌아보면 끔찍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한 친구가 죽었다. 술을 먹고 벌어진 패 싸움 끝의 결과 였다. 그건 명백한


개죽음이었다. 그건 너무 무의미했으며 너무 억울한 죽음이었다.  난 두려웠다.


친구의 죽음 만큼이나 나의 그것도 무의미 할까하는 생각때문이었다. 나도 평범한


남들이 누리는 것 만큼의 사랑과 행복은 가져보고 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기생충처럼


살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지 않겠다라는 결심과 함께. 그리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 당당하게 혼자 힘으로 자립하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전문대학을 졸업할 무렵만 해도 난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은 내 노력으로 다 극복


할수 있다고 자신했다. 누구에게도 기댈 필요 없으므로 누구에게도 조롱당할 염려


는 없으리라 자신했다. 나는 다짐했다.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으리라


누구에게도 조롱당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결국 현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수녕의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아버지는 안계십니다.' '어머니는 다방을 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해야


할때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수녕의 아버지는 더 물어


볼것도 없다는 태도였고 우리는 서둘러 만남을 끝냈다. 나는 그날저녁 오랫동안


마시지 않던 술을 정신을 잃어버리도록 마셨다. 수녕은 헤어지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여자였다. 내게도 구원이 있다는 걸 알려준 여자였다. 나같은 놈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여자였다. 우리는 헤어질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달아났다. 어머니를 수원에 남겨둔채 그렇게 나는 수녕과 잠적해 버렸다.



물론 지금도 나는 수녕과 결혼 한것을 내 평생의 가장 큰 행운으로 생각하지만


우리의 잠적으로 인해 나는 평생 가슴에 사무치는 죄를 어머니에게 짓게 되었다.


한해만에 어머니를 다시 찾아 갈때만 해도 나는 화를 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놈이었다.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우셨다. 미안하다고 만


계속 말하시는 어머니는 불과 한해 만에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위어 계셨다. 어머니


는 하염없이 우시기만 하셨다. 그리곤 이 못난 아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씀만 계속


계속하셨다. 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눈시울이 젖어들곤 한다. 나는 왜 그렇게


나 바보같은 놈이었을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날 우리모자는 통곡을 하고 말았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아온 것을


그때야 깨달은 것이다. 어머니가 조금만 더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해를 더 사시지 못하셨다. 내가 없던 일년간 어머니는 이미 산 사람이


아니였다고 한다. 결국 어머니는 나때문에 돌아가신 것이다. 어머니는 끝까지


아버지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고 돌아 가셨다. 돌아가실 때도 미안하다는 말


뿐이셨다. 피눈물나게 죄송스러운 이 불효자에게 말이다.



난 뺑소니 차에 치어 왼쪽 다리가 날아간 그날 밤에도 어머니 생각에 술을 마셨었


더랬다. 뺑소니라고는 하지만 아마 내가 취중에 길 중간으로 뛰어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운전사의 잘못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리가 없어지고, 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은 그대로 남고, 나는 산다는 게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아득바득 잘살아보겠


다고 몸부림치던것도 모두 우습게만 보였다. 난 방구석에 쳐박힌 산 송장이 되었다.


허무한 일이었다. 허무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내이며 나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다시 살아 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것은 수녕과 아이들 때문이었다.


정신차려보니 집안형편은 거지꼴이었고 수녕은 곧 쓰러질것처럼 창백한 모습으로


나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난 이래저래 몹쓸 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병신이된 내가 어떻게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해야하나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수녕의 생일이 되었다. 난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 수녕의 선물을 사고 싶었


다. 수녕이 내게 준 돈도 있었다. 하려고 하면 빌릴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있어


내힘으로 벌어서 작은 것이나마 수녕에게 선물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침부터 포항시로 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단돈 천원


이라도 벌수없을까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하지만 해가 저물어가도록 돌아다녀서


내가 알게 된것은 병신이 되었으면 돈이 있어 장사를 하거나 특별한 기술이라도


있어야한다는 사실뿐이었다. 해가 져버리고도 나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하루종일


먹은게 없었고 의수를 이끌고 걸어다녔기 때문에 꽤 피곤해야 정상일텐데도 나는


절망적인 마음 밖에는 느끼는 것이 없었다. 그냥 죽어버려야 할까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한가지 일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그건 내가 평생하지 않겠다는


 일이기도 했다. 그때 수녕과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바라보며 평생을 살아오신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깨달았다. 안되는 건


없었다. 내가 할수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내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수녕의 남편이기 때문이다. ?

의수위의 바지를 걷어 올리고 나는 천천히 거리에 앉았다.


그렇게 나는 거지가 되었다.



그렇게 이천 6백원을 벌어 나는 수녕에게 줄 꽃 몇송이와 아이들에게 줄 과자


두봉지를 샀다. 엄밀히 말하면 포항시로가는 버스비는 수녕이 준 돈으로 냈기


때문에 난 돈을 번것은 아니였지만 수녕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는 난 내가


한 일을 기뻐했다. 가슴한쪽이 황량해졌지만 다른 가슴한쪽은 더욱 더 부풀어


올랐다. 그 이후로 난 거의 1년간을 가족 몰래 구걸을 하며 지냈다. 500만원을


모아 장사를 시작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다른 일거리도 있었다. 돈을 빌릴수도


있었다. 악몽에 시달리도록 그 짓이 싫었다. 하지만 이것이 아내에게 더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간의 구걸생활로 해서 수치심에는 적응되었다. 하지만


나는 표정없는 남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무표정하게 길거리에 앉아있어야만


하는 구걸생활의 결과였다.



철준에게 눈을 돌렸다.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의 얼굴에는 두줄기 눈물자욱이


생겼지만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오히려 입가에는 미소가 서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담담히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내 눈가에도 물기가 서려왔다. 왜 이렇게


산다는 건 힘이 드는 일일까. 너무 많이 욕심을 부렸는가? 그게 너무 과욕이었을까?


그냥 보통의, 소박한 행복을 원한다는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까? 꼭 이렇게


산다는건 힘드는 일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그리웠다. 나는 어머니에게


매달려 불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애처럼 그렇게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싶었다. 이게 뭔가. 이게 뭡니까라고. 그가 나를 돌아 보았다.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찡그린 웃음이었다. 나는 그가 정겹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이해해 준다. 나도 그가 이해가 된다.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수 없고


그도 그의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이지만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는 건 가끔은


그 어떤 현실적인 보상보다도 소중하다고 느껴진다. 외로움이 한겹 줄어드는


느낌이랄까.


갑자기 후레쉬 불빛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나를 찾아나선


수녕이었다. 우리는 눈물자국을 지웠다. 그리고  웃으며 수녕을 맞았다.


수녕이 이상하게 생각했음에도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있고 싶었다. 잠시라도 그렇게 위로 받고 싶었다. 우리는


친구였다.





6. 바다의 마법이 끝나면.


해는 서쪽으로 진다. 그래서 동해바다에는 불타는 저녁놀이없다. 마지막 빛으로


하늘을 불사르고 화려하게 하루를 마감하는 서해와는 달리 동해바다는 안개가


끼듯 사라진다. 그건 마치 마법이 끝난 것과 같다.  하루동안 봤던


그 바다가 환상이나 착각속에만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아도 바다는 항상 거기에 있다. 보이지 않아도 내가 두고온 기억이


항상 거기에 있듯이.



동해바다를 떠나는 날 전야에 나는 소주와 김치찌개를 위한 돼지고기 한근을 사서


스스로 작별회를 열었다. 건수 형은 노래를 불러대며 실컷 마셨고 오랜 만에


그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본 형수님은 눈물 겨워했다. 나는 비록 비밀을 지켰지만


형수님은 곧 그것보다 훨씬 기쁜 건수형의 선언을 들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


으므로 그녀는 더 더욱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믿었다. 난 건수형에게 큰절을 했다.


그건 그의 헌신에 대한 진심어린 경의였다. 그 냉정한 얼굴의 사내는 누구보다


큰 사랑을 하고 있었다. 부모란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자 고향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들었다.  한사코 사양하는 건수형 부부에게 나는 강권을 하여


내 자전거를 동준이에게 선물로 줄수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방황은 끝이었다.


난 그 자전거는 더이상 타고 싶지 않았다. 나보다는 동준이가 그 자전거를


타는 것이 합당했다.



그 이후 한 몇달간은 난 포항 시내에 나가지 않았다. 시민극장이나 죽도 시장


구석에서 건수형을 만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건수형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 인것 같았다. 건수형은 음식점을 개업하는 게 새로운 꿈이 되었다고


지난 겨울 내게 말했다. 지금은 형수님과 포장마차를 하고 계신다. 한해도 안되어서


괄목할 만한 성장이 아닌가. 난 항상 건수형 가족에게 뒤지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차창 밖으로 나는 동해바다 쪽을 바라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동해바다가


그너머에 있을 쪽을 말이다. 지금도 바다는 그대로 저기 멀리에 있을 터 이지만


나는 많이 바뀐 것만 같다. 그게 정말 나였을 까? 아직도 바다는 그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 까? 갑자기 어깨를 치는 손길이 있다. '이봐. 운전하다가 뭘


그렇게 정신이 없나?' 그렇다. 나는 지금 직장 동료들과 멋지게 한잔하러


가는 길이다. 가서는 정치얘기도 할테고 기괴한 엽기적인 사건얘기도하다가


여자얘기도 하며 낄낄대고 술을 마시게 되리라. 나는 사회에 복귀한 것이다.


나는 연애도 하고 싶다. 멋진 여자에게 멋진 대사를 읖조리고 싶다. 나는


사랑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친구를 돌아 보았다. 웃는 표정이다.


뭐가 그리 좋은 것일까? 나는 말햇다. '그냥. 아주 옛날생각이 좀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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