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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민주국가와 편견

by 격암(강국진) 2018. 11. 29.

2018.11.29

사회계약설을 주장한 홉스의 책 리바이어던이 나온 것은 1651년의 일이다. 홉스는 가톨릭교회라는 종교적 권력이 세상의 불화와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했고 종교적 집단이 사회적 권력을 가지는 것을 비판하고 반대했다. 따라서 그는 국가는 교회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권력자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군주를 지지할 필요가 있었다. 

 

 

국민으로 이루어진 리바이던을 보여주는 표지

 

그런데 사람들은 왜 스스로의 욕망을 추구한다는 자연적 주권을 권력자에게 양도할까? 교회권력으로 부터 해방된 국가를 리바이어던에 비유한 이 책에서 홉스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전쟁을 이야기한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서로와 전쟁을 벌이는 상황은 모두를 비참하게 할 것이다. 이런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은 개인들이 계약을 맺고 개인의 주권을 국가에게 양도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이다.  

 

국가란 이렇게 탄생한다고 하는 것이 사회계약설이다. 국가가 개인들의 계약의 산물이라고 하는 사회계약설은 무엇보다 권력은 신에 의해서 주어졌다는 왕권신수설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로크나 루소는 홉즈와는 좀 다른 강조점을 지닌 사회계약설을 주장했는데 로크는 재산권과 시민의 저항권을 강조하고 루소는 절대군주에 대한 절대복종이 아니라 시민이 시민 스스로에게 복종하는 사회계약을 주장했다. 어느 것이건 사회계약설은 오늘날의 민주국가를 만드는데 있어서 그 기본적 논리가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국가들은 실제로는 시민들이 모여서 자신의 주권을 국가에게 양도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시작된 것들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다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같다는 논리에 속았던 것이고 사회계약설은 권력이 신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왕권신수설과 마찬가지로 허구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사회계약설은 종교집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논리로 개발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왕권신수설따위는 아무도 믿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사회계약설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혹시 어떤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역사적 사실이 뭐가 중요하냐, 우리가 그렇게 믿고 합의하면 되지라고 말하면서 사회계약설을 옹호할 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사회의 기초로서 그것을 들어왔기에 그런 관점에 중독되어 있으며 그것을 당연한 것, 그것을 건드리는 것을 무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때 왕권신수설이 그런 위치에 있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참거짓이전에 사회계약설에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특히 21세기가 되면서 점점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같다. 우리는 민주국가를 세워온 역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몇백년전의 유럽사람이 했던 것보다는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선입견을 버리고 사회계약설이란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즉각 그것에서 기괴한 점들을 한두가지 발견한다. 사회계약설속에서는 마치 인간이 영원의 삶을 살고 국가는 매일 매일 우리가 새롭게 다시 만드는 빵이나 신발같은 물건이나 몇년마다 하는 전세계약의 결과물처럼 느껴진다. 국가는 인간의 계약이라는 행위의 결과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확실히 인간은 국가보다 더 오래되었고 먼저일지 모르지만 개인은 그렇지 않다. 국가는 개인의 수명보다 훨씬 길게 존재한다. 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났고 한국에서 친구를 만들고 직장을 구했으며 한국어를 쓰면서 교육받고 성장했다. 오늘날은 국적을 바꾸는 일도 많지만 그래도 그것이 인터넷 공급업체를 바꾸는 일이나 전세집을 옮기는 것처럼 간단한 일일 수는 없다. 하려면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국가의 시스템과 전통안에서 태어나고 그 사회에 적응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국가를 계약의 결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억지다. 우리는 애초에 그렇게 자유롭지 않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기로 선택한 적이 있는가? 중국인들과 미국인들은 자기 선택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자기 선택이 아닌데 무슨 계약인가? 국민의 의무가 사회적 계약의 결과라면 이건 마치 내가 계약서에 도장찍은 기억이 없는데 넌 계약을 했으니 이런저런 의무가 있어라는 말을 듣는것 같지 않은가?

 

사회계약설은 무엇보다 한 국가가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물질적 정신적 자산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다. 계약이나 거래란 그 자체가 뭔가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그것은 규칙에 대한 합의거나 기껏해야 양쪽으로 뭔가가 교환되는 것이다. 비교를 위해서 국가를 하나의 집으로 생각한다고 해보자.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없어도 집은 존재한다. 그러니 그 집에 사는 행위를 국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에서는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집이 얼마나 안락하고 좋은 집인가 하는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국가를 계약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두 사람이 만나서 악수를 하는 것같은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그건 그냥 두 사람간의 '합의'다. 개인을 넘어서는 실체가 없고 계약을 하는 사람들 이외의 존재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마치 원주민이 살고 있는 미대륙에 도착해서는 나는 미국을 발견했다고 외치는 유럽인을 보는 것같다. 

 

미국이나 중국이 얼마나 큰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사우디 아라비아같은 나라가 유전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가를 생각해 보자. 유럽이 실시하고 있는 복지시스템도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국가는 아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들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중국인 청소부와 미국인 청소부는 같은 노동을 해도 다른 월급을 받고 다른 복지혜택을 받는다. 유럽인들의 부유함은 지금의 유럽인들의 근면때문이 아니라 상당부분이 식민지시대에 전세계를 수탈하면서 축적한 물질적 문화적 자산때문이다. 국가가 단순히 계약의 결과라면 누가 선진국 국민이 아니고 가난하고 독재가 있는 나라의 국민을 선택한다는 말인가. 학비가 공짜인 유럽에서 대학에 가지 뭐하러 비싼 등록금내면서 공부하는 한국사람이 되는가. 

 

사회계약설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 그것은 사회계약설이 극단적으로 인간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인구밀도가 높게 살아온 한중일같은 극동아시아 사회와는 달리 사회적 관계나 사회적 전통과 전승이 가지는 실질적 가치를 다 무시하고 사회의 시작이 단지 개인이다. 거기에는 개인을 넘어선 세계나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기초적인 요소로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만이 세상의 중심이며 언급되지 않은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 이미 이 사람 것이 아니면 저 사람 것이다. 인간과 개인의 재산권이 강조되는 것은 언뜻 보면 좋게만 보이지만 뒤집어 보면 공공의 것, 자연의 것을 상당히 과소평가하는 행위다. 

 

예를 들어 여기 공공의 우물이 있다고 해보자. 이 우물은 마을의 생명줄이다. 이 우물때문에 사람들이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사회계약설의 관점으로 가면 이 공공의 우물의 중요성이 거의 잊혀진다. 마치 그것은 특정인의 개인 소유물이어야 할 것같거나 우물이 그 사회공동체의 존립에 핵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라는 점이 잊혀지고 있는 것같다. 하지만 우물로 살아가는 사회공동체의 기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은 그 우물의 공공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우물마을에 멋 옛날에 우물이 마을 사람들을 만들었다는 신화가 있다고 하자. 이 신화는 언뜻 비과학적인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따지고 보면 사회계약설보다 마을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설명일지도 모른다. 우물을 무시하는 쪽이 바보라는 것이다. 우물이 마을사람들을 만들었다는 신화적 설명은 그 우물이 모두의 것이며 이 마을의 생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사회기원의 핵심에 두지만 사회계약설같은 것은 모든 것을 그저 우리의 환경에 상관없이 개인의 선택의 결과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런 관점이 지금의 지구환경파괴라는 결과를 만든 것아닐까? 그런 관점이 잔혹한 부자들의 탐욕을 자명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계약설은 하늘이며 바다며 땅에 대해 말이 없다. 사회계약설은 우리 모두는 알몸으로 이 세상에 왔으며 알몸으로 죽을 것이고 우리가 가진 것은 어떤 의미로 모두 세상에서 빌려온 것이라는 생각이 없다. 국가란 그저 인간의 합의다. 국가를 다시 한번 집으로 말해보자면 사회계약설은 임대계약에 대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말하면 그 임대계약의 계약서는 임대계약서인데도 그 집의 규모가 어떤지, 문제가 생기면 하자보수는 어떻게 하는지 등등의 모든 것들을 그저 사람들이 합의해서 한다는 정도로 정리한 것이다. 

 

사회계약설이 오늘날 비현실적이 된 것은 다른 무엇보다 세계의 사회공동체들은 문화건 물질이건 많은 것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부모를 잘만난 소위 금수저들이 부모덕에 잘 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난민이 탈출해 나오는 나라의 국민들이 계약을 잘 못해서 지금 저러고 있는 것인가? 몇백년전에 비하면 지구의 인구는 폭증했고 공공의 것이 점점 더 중요해 지고 있다. 미국에 들어가서 살겠다는 사람들을 최류탄가스로 몰아내고 대기의 질이 나빠서 숨쉬기도 어렵고 환경파괴로 기록적 폭염피해를 보는 세상에서 국가란 개인들의 계약의 결과라는 설명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다. 

 

국가란 오히려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게임이나 언어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쳐야 하고 고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떠나서도 홀로 존재하는 집같은 것이다. 한국어가 한 한국인 개인을 떠나 존재하는 문화적 유산이듯이 말이다. 사회계약설처럼 언어를 정의하는 것은 한국어란 한국인들간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통수단이라고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부실한 말이고 오해를 만들기 쉬운 말인가. 우리가 하루아침에 한국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오늘부터는 영어를 쓰기로 약속한다고 영어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도 그렇다. 이론적으로는 국가란 국민들의 선택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이지만 국가를 단순히 개인의 총합, 개인의 계약이라고 보는 관점은 현실의 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국가가 서비스이며 시스템이고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물질적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의 핵심에는 국가가 어떤 개인의 소유가 아닌 공공의 것이며 인간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고 아끼고 보존하며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강조가 있다. 사회계약설은 개인을 너무 강조한다. 그러다보니 개인적 소유에 대한 제약이 없고 현실적으로는 많은 것을 공유할 수록 매력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꾸 부자들의 배만 불린다. 개인의 계약으로 만들어 진 국가에서 모든 것은 누군가 개인의 것이 되고 마는 것처럼 보인다. 토지공개념에 대한 반대의 뿌리는 사회계약설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계약설이 말하는 관점에서는 국가는 성장하고 키워져야할 것이 아니다.  국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와 전쟁을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덕분에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은 회사들이 점점 더 국가같아지고 있다. 오히려 회사가 생태계 운운하면서 그 회사의 직원이나 소비자를 포함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회사는 단순히 주주의 것이 아니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성장시켜야 하는 도구로 따라서 피드백이 있는 소통이 굉장히 강조되게 된다. 애플이 이렇고 테슬라가 이렇다.  

 

현대국가, 현대사회는 복잡하다. 그렇다면 그 복잡한 문제는 누가 어떻게 풀 것인가? 사법부나 국회가 푸는 가? 법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여기에 자유주의의 논리가 등장한다. 보이지 않는 시장의 손이 저절로 사회문제를 다 알아서 해결한다는 논리없이는 국가가 망하지 않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정말 시장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가? 왜 항상 인간과 인간이 만든 규칙밖에 보이는 게 없는가. 이쯤되면 왜 현대사회가 지나친 시장주의로 인간을 오히려 착취하는 사회가 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혹시 우리가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 시대에 뒤진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국가를 모두가 같이 짓는 성이나 모두가 같이 개발하고 있는 게임 혹은 한국어같은 공공재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접근은 그 기초부터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하천과 숲을 생각해 보자. 깨끗한 하천과 숲은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다. 국가란 곧 숲이고 하천이라고 하는 관점에는 그 안에 들어가서 살 인간은 그 숲과 하천을 보존하고 가꿔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는 개인들간의 더 좋은 계약이 아니라 더 좋은 숲과 더 좋은 하천이 곧 더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고 숲과 하천은 국가가 어느 개인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누구의 소유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숲에, 한국어 문화에 사람들을 초대해서 다같이 더 좋은 숲, 더 좋은 언어를 만들어 보자고 할 뿐이다. 지금도 나중도 그것이 어떤 개인의 소유가 되지는 않는다. 

 

오늘날의 기술수준은 이미 모든 국민들이 풍족하게 살고도 남을 것을 생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가장 부족한 것은 공유의 정신이다. 즉 개인이 이득을 올리는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사회적 계약의 파기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모두가 공공재를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막고 있다. 모두가 모여서 성을 만들면 모두가 좋은데 그 성이 누군가 개인의 배를 불릴 것같으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는 곧 공공재라는 생각이 부족하다. 하지만 오늘날 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환경이나 교육, 의료, 인터넷 환경과 주거등 많은 것들이 사실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공유와 공공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것이 되고 있다.

 

세계가 문화적으로 통합되어 가는 지금 국가는 언어나 회사나 게임같이 우리가 참여하여 이득을 볼 수 있으며 옮겨 다닐 수도 있고 심지어 하나에 전적으로 종속될 이유도 없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삼성이 한국기업이고 애플은 미국기업이라는 식의 구분이 지금 이 시점에서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언제까지 맞는 말이기만 할까? 이미 그런 구분의 선은 상당히 흐려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언젠가는 나는 한국인이라던가 일본인이라던가 독일인이라는 선도 더 흐려질 것이다. 

 

이미 전보다는 훨씬 더 그렇다. 유럽은 통합되었고 세계 경제와 문화도 점점 더 통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핸드폰에 스무개 나라의 부품과 노동이 들어간다면 그 핸드폰에 국적이 있을까? 어느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5개 6개 나라의 문화적 영향과 복지 혜택이 있었다면 그 아이가 어느 한 나라만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점점 더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 서울에 지방자치단체가 있고 부산에 지방자치단체가 있는 가운데 내 주소가 서울로 되어 있어서 내가 공식적으로 서울시 주민이라고 하자. 주거 이전의 자유가 있고 여행이나 출장이 아주 흔한 세상에서 그리고 전국이 문화적으로 균일한 한국어 문화권인 세상에서 내가 서울시 주민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나. 

 

부산사람은 서울사람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이 아닌거 아닐까? 부산시를 단순히 지금 부산에 사는 사람간의 계약에 의해서 만들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런 세상을 살기에 준비가 부족한 아닐까? 요즘같이 이동성이 세상에서 한국사람은 어떤 의미에 전국에서 동시에 산다. 서울이 살기 좋으면 서울로 가고 부산이 살기 좋으면 부산으로 간다. 그리고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것의 핵심중의 핵심은 결국 공공재다. 문화고 사회기반시설이며 환경이다. 수도물의 수질이 엉망이 되고 대기질이 엉망이 되고 교통난과 주거난때문에 살기가 너무 나쁘면 거기 사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생각만 하고 있으면 그런 지역은 결국 망할 것이다. 다가올 미래에는 부산과 서울의 관계나 한국과 미국의 관계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국가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사회계약설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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