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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쓰고 읽기

글쓰기는 왜 절박한 일일까.

by 격암(강국진) 2019. 6. 13.

2019.6.13

행복은 흔히 주관적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것은 한마디로 내 마음에 따른 것이라는 뜻인데 그걸 믿기란 힘드는 일이다. 행복이 내 맘대로라면 누구나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대개 그런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행복은 어떤 객관적 요소에 달린 것이라는 이론을 믿게 된다. 재산이라던가 직위라던가 어떤 명예같은 것에 행복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맘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근거나 기회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세상의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심지어 무신론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아무렇게나 선택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믿음이 저절로 마구 솟아나지는 않는다. 또한 어쩌다 믿음이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에 빠져 살다보면 어느새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믿음은 공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도전을 받을 뿐만 아니라 노력으로 성취되고 유지되는 어떤 것으로 그걸 위해서 우리는 댓가를 치뤄야 한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지불하는 댓가보다 보상이 더 크기를 기대할 뿐이다. 

 

체계적인 믿음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철학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나는 철학따위 복잡한 것은 모른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 그들이 말하는 철학이란 대개 인류사에 있었던 여러가지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한 역사적 지식들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지식은 꼭 필요한 것도 아니고 어설픈 지식은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도 많다. 문학작품에 감동하는 것과 문학평론을 외우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듯이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을, 그것도 외국어로 번역되고 수백에서 수천년이나 지난 생각을 몇줄을 외워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위험이 크다. 

 

반면에 삶을 사는 방식이나 삶과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는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누구나 가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은 정글이라던가 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같은 것도 굉장히 의미있는 철학이며 결국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던가 배부르고 따뜻하면 그게 행복이라던가 남에게 잘난척하고 갑질하며 살아도 문제가 없는 것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믿으면 그것도 철학이다. 즉 우리가 세상과 삶에 대해서 가지는 모든 기대와 이해와 이론은 전부 철학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고 믿는다. 내게 어떤 불행이나 행복이 있을 때 그것이 전생으로부터 온 결과라고 믿는 것도 철학이지만 세상은 본래 이유없는 일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며 따라서 세상일에 너무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철학이다. 사람은 로또에 당첨되었을 때 -부자집에서 태어났다거나 어쩌다 사람을 잘 만나거나 유명해져서 성공하게 되었다거나 하는 일이다- 나는 본래 이럴 운명의 사람이며 이런 사건이야 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잘 보여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것은 그저 오고 가는 것이니 이런 것때문에 내면의 나를 바꾸거나 해서는 안되고 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것도 다 철학이다. 

 

어떤 사람은 노후를 준비하면서 잔뜩 재산을 쌓은 후에 죽을 때까지 그 돈을 가지고 해외여행을 다니지 못할까를 걱정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제 자신에게는 창의력과 감수성이 다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를 걱정한다. 인생에 꿈과 감동이 없다면 그것은 더이상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보기 싫은 사람들 비위나 맞춰주고 사는 삶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삶으로 가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자살로 보여지는데 그들은 반대편을 보면서 둘 다 서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도 다 철학때문이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얼마나 납득하고 있는가에 크게 좌우된다. 현재의 우리 삶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서 어떤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무너지고 있다고 할 때 우리가 확실한 대안이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건 마치 내가 돈이 필요한데 누군가가 돈다발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는 거나 마찬가지다. 불만 피하면 저 돈이 그냥 남을텐데 아까운 것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이런 걸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는 정치다. 독재시대나 이명박 박근혜같은 권위주의정부시대에 나같은 사람은 우울했다. 왜냐면 나는 우리에게는 대안이 있다고 믿으며 우리가 더 잘 살 수도 있다고 믿는데 쓸데없이 공포가 조성되고 부패와 갑질을 만연하게 하며 문화와 자연과 국가의 재산을 파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화도 나고 우울할 때도 많았다. 이 무슨 낭비인가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하지만 물론 이 반대로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은 반대로 노무현이나 문재인 시대가 낭비의 시대이며 비합리의 시대라고 믿는다. 그래서 화도 나고 우울도 한 모양이다. 걸핏하면 탄핵이야기가 나오고 대국민 사과따위를 하라고 대통령에게 요구하기도 하며 국회의원이 자기 일을 하기를 거부하고는 한다. 그리고 어느 시대에나 이런 법을 이렇게 고치면 천국이 올텐데, 이런 사람들을 이렇게 눌러버리면 세상이 조용할텐데라고 하면서 답답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불행과 우울은 우리의 이론, 우리의 집착, 우리의 철학, 우리의 기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으면 곤란하다. 철학은 그같은 것이다. 우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이해가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가 있다. 지금이 겨울인지 여름인지를 착각하면 옷을 틀리게 입을 수 밖에 없지만 계절을 맞게 파악해도 옷의 선택은 틀릴 수 있다. 이 착오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희노애락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속에서 둔해지고 철학을 잊어버린다. 작은 우물안에서 세상을 잊어버린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철학이나 어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저절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잠들게 하려고 한다. 우리를 위대하지 못하게 한다. 작고 시시한 사람이 되게 한다. 이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그걸 하려는 노력속에서만 달성되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별 일이 없으면 일상에 빠지는 우리는 자꾸 작아진다. 화재가 위험하다는 것을 이해해도 불이 안나면 안전의식이 자꾸 흐려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우리를 깨어있게 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깨어 있는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이런 사람들은 드물기도 할 뿐만 아니라 이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어떻게 남이 우리의 인생을 끝없이 챙겨줄 수 있겠는가. 사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잠든 사람들에게 둘러 싸인다. 그들은 모두 그저 이런 저런 것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어서 때로는 축사에서 그저 먹이나 먹고 살아가는 닭이나 돼지같은 인상을 줄 때조차 있다. 

 

이것은 오늘날 특히 위험한데 오늘날은 워낙 다원화된 사회고 복잡한 사회이며 국제적으로 연결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둔감해지고 단순화된 감성으로 나만의 우물에서 살기가 어렵다. 남이 이렇게 한다고 그냥 따라하고 작년에 이랬다고 해서 올해도 그럴거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안락하게만 살았던 땅콩회항의 조현아 남매가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지금은 창의적이되고 남과 달라지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세상과 시대에 대한 넓은 안목이 녹슬지 않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공무원한다고 나도 공무원하고 다른 사람이 카페한다고 나도 카페하는 식으로는 우리의 삶은 위기에 쉽게 위기에 빠져든다. 그렇다고 무조건 튀려고만 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이에 대해 단 한가지의 처방이 있을 수는 없다. 확실한 처방이 있을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산책과 독서 그리고 글쓰기만큼 좋은 처방은 없다고 생각한다. 평범해 보이는 그 일들은 지속적으로 하기는 참 어려운 일들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철학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하게 되는 일 즉 둔감해지는 일을 막는 일이고 그것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댓가다. 

 

나는 그 중에서도 글쓰기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편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사고를 정비하게 만든다. 모르던 것을 알게 할 뿐만 아니라 알던 것도 잊지 않게 해준다. 이 세상이 어떤 곳인가를 잊지 않게 해주고 그걸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우리가 뭘 기대해야 할지를 잊지 않게 해준다. 세상은 우리에게 끝없이 세뇌를 하려고 한다. 서너명만 모여서 똥을 황금이라고 해도 개인으로서 그런 믿음에 저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글쓰기는 자신을 지키게 해주고 자기의 철학을 지키게 해준다. 내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해준다.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의 세상은 살만한 세상인가 아니면 위태로운 세상인가. 위태로운 세상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이에 대한 질문을 멈추는 순간이 실질적으로는 삶이 끝나는 순간일 것이다. 식물인간처럼 영양공급받으며 숨만 쉬는 것을 살아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이래서 절박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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