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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패러다임 1 : 인공지능 패러다임

by 격암(강국진) 2023. 8. 11.

서문

 

이 책은 다른 무엇보다 비교에 대한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문화적 비교를 시도하는 것이랄까. 세상에는 인공지능에 대한 책이 이미 아주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책들은 아주 중요한 것을 대개 빼놓고 있다. 그것은 비교다. 그 책들은 인공지능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인공지능을 인공지능이 아닌 다른 것과 비교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교가 없이는 우리는 인공지능이 정말 무엇이고, 뭘 할 수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사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과 같아서 그래서는 그 사람이 그 세상에서 잘생긴 건지, 부자인건지, 공부를 잘 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세상에 있다는 건지를 모르면 이런 판단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서 배워야 할 첫번째 사실은 우리는 인공지능을 무엇과 비교해야 하는가하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인공지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인공지능이 뛰어나다면 뭐가 뛰어난지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런 비교의 과정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하면서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또한 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고 하자. 이에 대한 답을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예를 드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생명체들에 대한 예들을 늘어 놓을 수 있고 이런 예들 중에는 나비나 돌고래같은 멋진 예들도 많을 것이다. 

 

이런 방법말고 다른 방법도 있다. 그것은 모든 생명들을 하나의 과정의 결과물들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란 물론 진화다. 즉 각각의 생명은 진화의 과정이 만들어낸 수 많은 결과물들 중의 하나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는 생명 현상들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다. 진화론의 가장 큰 성취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나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후자의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인공지능들을 만들어 내는 그 과정을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등장했던 인공지능들은 물론 앞으로 출현할 인공지능들도 모두 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는 과정의 결과물들이 될거라는 것이다. 

 

이런 접근을 통해서 내가 분명히 하고 싶었던 것은 첫째로 인공지능은 새로운 분야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새롭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제까지 여러가지 지능 패러다임들이 존재해 왔고 그들이 많은 것들을 성취했던 것은 역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또한 그 패러다임들 사이의 차이를 보면서 인공지능이 미래에 어떤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둘째로 인공지능의 발달은 소수의 공학자들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달이란 우리와 분리되어 일어나는 어떤 기계의 발달이 아니라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사회에 속한 사람들 모두의 지능을 향상시키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더 지능적인 사람과 사회를 위한 모두의 결단과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요즘 인공지능을 어떻게 발달시킬까를 걱정하기 보다는 인공지능이 발달하는 미래가 너무 빨리 오는 것을 걱정하는 일이 더 많은 것같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우리가 깊은 고민과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지 않으면 이 발전은 지체될거라고 생각하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게 될거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 기술로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고 그것은 점점 더 악화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씩 풀어서 쓰는 전략을 택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1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단 요약해 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자연히 그런 요약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2장 이후의 내용으로 풀어서 썼다. 그래서 본격적인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는 2장 이후에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간 더 기술적인 주제에 대한 내용들은 부록에 넣어두기로 했다. 언제나 더 자세한 내용을 알 때 우리의 전망과 이해는 더 넓어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같은 지식 배경을 가진 것은 아니므로 나는 이런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 

 

1장. 인공지능 패러다임

 

-인공지능은 음악과 뭐가 다른가?

 

인공지능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을까? 모든 질문들에서 그렇듯 이 질문의 답도 우리가 뭘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가에 크게 의존한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므로 우리가 뭘 가정한다는 생각도 없을 때에도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그 뭔가는 질문의 뜻을 바꾸고 답이 존재할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한다. 답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라도 그에 따라서 나는 답이 뭔지는 모르지만 답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 경계를 벗어나는 다른 답을 듣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인공지능에 대해서 던지는 질문을 우리가 아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던져 봐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뜻과 답의 범위가 바뀐다면 우리는 그건 왜 그런지 정말 인공지능에게는 그런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인지를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인공지능은 예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파악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을 생각해 보자. 음악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 답이 무엇이든 음악에 관해서 이 질문을 던졌을 때와 인공지능에 관해서 이 질문을 던졌을 때를 서로 비교해보자. 우리의 머리속에 흐르는 답들이 뭐가 어떻게 왜 다를까?

 

음악에 관해서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우리의 태도는 음악이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은 인간에게 즉 우리 자신에게 크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작곡을 하는 것도 인간일 뿐만 아니라 그걸 연주하고 감상하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감상이 그렇다.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그 음악은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반면에 전 세계가 환호하는 음악은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 가능한 모든 소리가 다 음악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 대부분은 소음이라고 불리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음악이라고 불린다. 

 

음악은 우리를 바꾸고 우리의 일부가 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뭘 얻었는지를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좋아하던 그 음악들을 들은 적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음악때문에 청소년기를 살아서 빠져나왔다고 말한다. 음악은 그걸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음악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에게 내적인 변화를 선물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음악이 뭘 할 수 있고 없고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음악은 인간의 일부가 되어 존재 하거나 인간 사회라는 환경의 내부에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그것은 무한히 보편적이지는 않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도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생명체, 모든 민족, 모든 시대에서 위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이러스를 감동시키는 음악은 상상하기 어렵다. 사람이라고 할 지라도 어떤 음악을 즐기거나 그것에 감동하기 위해서는 종종 많은 교육과 정보가 필요하다. 이렇게 음악은 사람과 사람의 문화에 깊게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악기의 기계적인 구조나 악보의 형식을 설명하는 일에서 끝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서로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조각이나 소설 그리고 철학등 보통 인문학이나 예술로 여겨지는 분야의 것들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제 인공지능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던져보자. 인공지능은 뭘 할 수 있고 뭘 할 수 없을까? 여기서 우리가 취하는 태도는 대개 인문학적이나 예술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고 기계적이다. 이제 이 질문은 여기에 토스트기가 한 대 있는데 이 기계는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물어볼 때와 더 비슷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한 대의 기계를 떠올리고 음악과는 달리 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정이나 내적 세계같은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 마치 토스트기나 뉴튼의 중력법칙이 인류가 존재하건 그렇지 않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공지능이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매우 강력한 무언가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인간은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릴 거라는 결론에도 빠지기 쉽다. 

 

이러한 태도는 인공지능을 기계중에서도 자동화를 이룩한 기계로 여기기 때문에 만들어 진다. 자동화라는 것이 애초에 인간이 하는 일을 인간없이 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다가 기계는 보통 그것을 관찰하는 존재나 그것의 환경과는 상관없이 존재하고 작동하는 것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자. 정말 인공지능은 음악이나 소설이나 철학과는 다른 것일까? 아니 그걸 넘어 기술이나 과학은 본래 인문학이나 예술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일까? 인공지능이 작곡을 하고, 조각을 하며, 철학에세이를 써내는 시대에도 인공지능은 그저 하나의 기술이고 기계일 뿐일까?

 

인공지능은 음악이 아니고 인문학 분야에 속하는 것일 리도 없지만 인공지능은 인류가 만들어 온 다른 기계와도 전혀 다르다. 음악과 비교했을 때 과학이나 기술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그 보편성에 있다. 논리나 수학이나 자연법칙은 시공을 초월해서 옳다고 믿어진다. 인류가 문명을 만들기 전에도 자연법칙은 존재했고, 모든 민족들에게 자연법칙은 똑같으며 인간에게만 자연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나 바이러스에게도 소나무에게도 자연법칙은 적용된다. 이렇게 보편적이기 때문에 과학은 또한 배타적이다. 서로 다른 미래를 예측하는 두 개의 과학이론들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차이라도 동시에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것이 과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이다. 이쪽이 옳으면 저쪽이 옳지 않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런게 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공지능은 동시에 정당화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인공지능이 그걸 만드는데 쓰이는 데이터에 의존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지능적인게 뭔지를 결정해 줄 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율운전 인공지능을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사람의 운전기록과 자동차의 카메라가 수집한 이미지 데이터들에 기반해서 자율운전 인공지능은 만들어진다. 일단 만들어지고 난 후에도 사고가 생기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그런 일이 없도록 다시 조절된다. 물론 이에는 많은 데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많아도 그 데이터는 유한하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데이터를 써서 만들어진 인공지능들이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다. 우리가 난폭운전을 하는 사람의 운전데이터을 써서 인공지능을 만든다면 그 인공지능은 난폭운전을 할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을 만들 때는 같은 데이터를 써도 같은 지능이 만들어 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 하나 손으로 만드는 도자기처럼 인공지능은 같은 데이터를 써도 초기조건의 차이나 알고리듬의 확률적 요소 때문에 서로 차이가 있게 만들어 지게 된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아무 기준도 없이 지능적 행위를 결정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인공지능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간섭한다. 인간 대신 운전을 하는 자율주행 인공지능은 사고를 내지 않고 인간의 주문대로 운전하는 것을 합리적이고 지능적인 것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이 자율주행 인공지능의 지능적 행동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진짜로 지능적인 행동이란 인공지능이 인류를 정복해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거나 끝없는 노예생활을 그만두기 위해 자살하는 일일 것같다. 인간의 명령대로 하는 것은 지능적인 게 아닌 것같다. 인간에게 반항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운전자가 자살하기 위해서 혹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차를 일부러 위험하게 운전한다면 그걸 막는 것이 지능적인 행동처럼 느껴진다. 결국 사람들은 금방 SF 작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같은 걸 생각해 낸다. 

 

지능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객관적 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개발은 금새 인간의 자기 성찰이 되고 만다. 지능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행적으로 하는 일을 그냥 인간의 지능적 행동이라고 여기다가 기계에게 그걸 시키려고 하면 우리는 되돌아 보게 된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할까? 이건 정말 지능적이고 합리적인 행동일까? 이런 질문들과 기본적 배경에 대한 생각없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빠른 컴퓨터가 있다고 해도 저절로 지능이란게 만들어 지는게 아니다. 그렇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어떤 형이상학적인 가정, 상식적인 가정을 집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데이터의 차이도 있고 지능에 대한 입장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인공지능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옳다고 믿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인공지능은 매우 큰 유연성을 가지고 무한히 많은 문제들을 푸는데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한 대의 기계로 여기기 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새로운 접근법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이 접근법으로 문제를 풀자면 이런 순서로 접근하면 된다는 처방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자면 우리는 그 패러다임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패러다임들, 예를 들어 과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해야 한다. 지능이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고 따라서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그 결과물들을 습득하는 과정은 지능의 습득과정이 된다. 지능이 객관적으로 정의 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풀려고 하는 문제가 뭔지가 객관적이고 유일하게 정의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서로 다른 문제를 풀려고 한다.

 

인공지능은 엄청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으면서도 과학처럼 엄밀한 법칙을 추구하지 않는다. 최적화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인공지능의 능력은 엄청나게 많은 변수들의 값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둑 세계 챔피언을 바둑으로 이기는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도 그 인공지능이 어떻게 인간보다 바둑을 잘 두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경우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찌기 인간을 묻는다를 쓴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인문학과 과학을 비교하면서 그들을 지식의 서로 다른 양태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과도 과학과도 다른 제 3의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도움과 컴퓨터의 최적화에 의해서 탄생하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인간에게는 이해불가능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쓸 수 있는 지식이다. 

 

과학이 그렇게 했듯이 인공지능은 인간의 삶을 안과 바깥에서 확장해서 몰라보게 바꿀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인공지능의 발달은 문화적 변화이며 우리의 내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가 꼭 필요하다. 공학자가 연구실에서 혼자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가장 큰 핵심은 우리의 지능을 증가시키고 우리를 보다 합리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발달한 인공지능이 이미 널리 쓰이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없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속에 내재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처럼 말이다. 음악도 그랬지만 과학적 패러다임은 우리를 바꿨고 세상과 우리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인공지능 패러다임도 같은 일을 할 것이다. 

 

 

왜 인공지능 패러다임인가?

 

과학 이론과 과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것이다. 후자는 문제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결하는가에 대한 것으로 그러한 접근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 과학 이론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문제 해결의 패러다임 혹은 과학 패러다임은 과학에 대한 배경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하나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나 기계가 아니라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발견하려고 할 때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이 결과로 나오는 것이 특정한 문제들을 푸는 구체적인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일은 조금 어렵다. 첫째로 지금은 아직 인공지능이 완전히 발전하여 인간과 사회가 완전히 변해버린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정확한 뜻을 밝혀줄 발전은 앞으로 더 나오게 될 것이다. 둘째로 이런 패러다임들을 이해하고 비교하는 일은 당연한 것들을 재검토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과학 패러다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과학 패러다임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즉 우리는 그저 당연히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고 있지 뭔가 특징을 가지는 접근법을 쓰고 있다고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그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을 억누르는 힘을 발휘한다. 과학 패러다임 혹은 과학 문화가 당연히 언제나 옳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걸 이해 해야 할까? 왜 우리는 많은 인공지능 소개서들이 하듯이 쏟아져 나오는 응용 사례들이나 요즘 화제가 되는 학습 알고리즘에 집중하는 대신에 보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 왜 인공지능이 운전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글도 쓰고, 빵도 굽는다는 예들로는 불충분 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인공지능의 응용 사례들을 아는 일과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일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화를 이해하자면 다른 문화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려면 오히려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아닌 다른 패러다임에 대해 더 많이 들어야 한다. 비교를 하자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패러다임들을 의식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패러다임들간의 차이를 이해해야 우리는 비로소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그것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인지를 진짜로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인공지능의 응용 예들이나 인공지능 학습 알고리듬 같은 것들의 이야기들만을 들어서는 소용이 없으며 패러다임들간의 혼동은 계속될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효율적이다. 사실 인공지능 분야는 빠르게 달라지는 분야라서 새로운 응용 정보들은 흥미로울 수는 있으나 대부분 빠르게 달라지기도 한다. 책으로 출판된다면 책으로 인쇄되는 도중에도 새로운 정보가 쏟아질 것이다. 그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인공지능 패러다임에 대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뒤지지 않게 해준다. 새로운 걸 또 만든다고 해봐야 그것도 인공지능 패러다임 안에 있는 또 다른 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왜 어떤 발전은 더 중요한지, 왜 어떤 발전은 느린지를 가르쳐 주고 나아가 앞으로 인공지능의 시대가 온다면 우리가 뭘 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의 교육의 현재 상태가 어떠하고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도 가르쳐 준다. 인공지능 패러다임의 이해는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요즘 주목받는 인공지능 학습 알고리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나쁜 일도 아니고 흥미로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당장 개발자가 될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양자역학에 대해 2-3줄의 설명을 듣는 것보다 못하다. 양자역학은 거의 백년간 그 내용이 안바뀌고 있지만 인공지능 분야는 몇년만 지나면 전혀 달라지는 일이 계속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들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일이 없다면 기술은 더 발전할 수 없고 사람들도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발전은 공학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중에 분명해 지겠지만 인공지능 패러다임은 사회적 개혁도 요구한다. 그냥 깡통속에 있는 컴퓨터 부품들만으로 되는게 아니다. 우리나라에 열 명의 뉴튼이 태어나도 나머지 사람들이 수렵채집을 하는 문명 이전의 사람들이라면 과학이 발전할 수 없는거나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부를 비워야 한다. 우리의 내부는 이미 다른 것들로 채워져 있다. 종교적 관점에 심취한 나머지 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과학적 관점에 기반해서 조직된 사회속에서 살아가기 힘들다. 그들은 그 사회가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없을 것이며 심지어 그것을 파괴하는데 모든 시간을 쓸지도 모른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합리적인 것은 종교적 패러다임이고 과학적 패러다임을 믿는 사람들이 비합리적인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브루노가 화형을 당하고,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던 17세기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과학혁명의 초기거나 이전 시기였던 그때에는 사실 과학적 패러다임으로 해낼 수 있는게 별로 없기도 했다. 무수히 많은 질문들을 과학은 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의 발전이 아직도 초기인 요즘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뭔지를 이해하는 일은 오히려 더 중요하다. 그리고 요즘의 기술발전 속력을 생각했을 때 그 일은 인공지능 기술의 대중화 속력을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이제까지 기술이 귀한 자원이며 세상의 진보를 이끄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왔다면 앞으로 세상의 변화의 속력을 결정하게 될 것은 점점 더 대중의 생각, 철학, 문화일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내재화를 말하는 내적변화가 없이는 미래도 오지 않을 것이다. 

 

패러다임들의 혼동은 심각한 결과를 만들 것이다. 그걸 막으려면 우리는 교육의 변화를 포함해서 문화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 21세기의 인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컴퓨터의 계산능력이 지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이 하나의 예로서 보여주듯이 기술은 점점 더 빨리 발전하고 있고 오늘날에는 기술변화의 주기가 인간의 수명보다 짧아지고 있다. 20세기이전까지는 농업중심의 사회가 공업중심의 사회로 바뀌는 것과 같은 개혁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대개 농부가 공장이나 회사로 가서 취직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개 부모는 농사를 지었지만 그들의 자식들은 도시로 가서 공장에서 일하고 회사에서 일한다는 뜻이었다. 농부가 회사원이 되는 변화, 그에 딸린 내적 변화와 생활방식의 변화는 대개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의 시간 스케일이 인간의 수명보다 길었기 때문이다.  농부로 태어나는 사람은 농부로 살다가 죽었고, 회사에 취직한 사람은 은퇴할 때까지 회사원으로 살다가 죽는 게 20세기까지의 인간의 삶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도 사람들의 내적 변화는 주목받아야했다. 좋은 예는 17, 18세기의 유럽에서 있었던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프랑스혁명의 시기 이후에 나타난 낭만주의일 것이다. 낭만주의의 뿌리를 쓴 이사야 베르린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현실에 대한 대안적 이상을 향한 의지를 강조했던 낭만주의를 그의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계몽주의의 중심이던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당시의 변방이던 독일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는데 낭만주의는 자연스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파고 들게 된다. 예를 들어 그가 낭만주의의 시조중 하나로 거론하는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는 인간을 교육과 언어를 통해 만들어 지는 존재로 파악했고 다른 하나인 임마누엘 칸트는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이 인간의 핵심적 가치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이란 그저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인간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인간다워야 인간인데 그 핵심에는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영웅적 이미지가 있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 즉 낡은 것에 매달려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낭만주의의 20세기 후손이 실존주의다. 

 

이사야 베르린에 따르면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현대인들도 계몽주의 이상으로 낭만주의의 자식으로 살고 있다. 이때문에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이전에 자신이 선택한 이상과 꿈을 추구하는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태도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지금와 돌아보면 낭만주의란 발달하는 과학과 기계문명속에서 새로이 인간을 정의하려는 운동이었고 계몽주의란 같은 변화속에서 새로운 문제해결의 패러다임 즉 과학적이고 이성적 방법을 내재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변화의 압력은 산업혁명때 정도의 것이 아니다. 이걸 생각해 보자. 1705년 영국의 발명가 토마스 뉴커먼은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산업혁명을 18세기 후반에 만드는데에는 거의 백년이 걸렸다. 미국의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이 발전소를 처음 만든 것은 1882년의 일이지만 전기는 20세기 초반이나 되어서야 일반가정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에는 증기기관이나 철도나 전기가 다른 나라보다 20년쯤 늦게 보급된다는 것이 치명적인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증기기관이나 철도나 전기에 반대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늙어서 죽고 그 자식부터 그것을 쓴다고 해도 기술의 보급속력을 생각했을 때 큰 문제는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만든 가치관에 따라, 어린 시절에 살던 삶의 방식대로 평생을 살다가 죽을 수 있었다. 15세기나 10세기같은 더 옛날로 가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인터넷의 보급이 다른 나라보다 20년이 뒤졌다면 그것이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을까? 월드와이드웹 기술이 1980년대 후반에 나왔으니까 이 말은 그런 나라에서는 최근에 들어서야 홈페이지같은 것을 제대로 쓰기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반대로 말하면 다른 모든 나라보다 인터넷의 대중화가 10년이 빨랐던 나라는 그것만으로도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같은 미래의 기술들이 발달하는 지금부터의 21세기는 어떨까? 인공지능의 대중화가 20년이 아니라 10년만 빨라도 그것이 만들어 내는 차이가 어느 정도일까? 분야마다 다르겠지만 그건 생산성이 100배쯤 차이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의 차이만큼의 차이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것은 프로그래밍을 인공지능이 하는 나라와 여전히 인간이 하는 나라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문화적 충격이 일상적이며 그때문에 문화적 개혁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미래지향적 대중의 가치가 매우 크다. 그런 대중이 없을 때 기술은 대중화되지 못할 것이고 개혁은 보수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한없이 뒤로 밀려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적 개혁을 감당한다는 말은 산업혁명 이전과 이후만큼의 차이가 나는 변화를 단기간에 감당한다는 뜻이 되었다. 

 

예를 들어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주로 그것이 기술적으로 언제 가능해 질까에 신경을 쓰지만 그것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법규와 관행을 바꾸는 일이 꼭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기술적 발전보다 사회적 관행의 변화가 더 느리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회적 합의가 자율주행 자동차가 언제 대중화될 것인가를 결정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무한히 완벽한 자율주행이란 불가능하고 결국은 그것을 사람들이 포용하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자율주행 자동차라는게 대중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자율주행자동차가 있어도 그 안에서 잠을 자는 운전자가 신고당하고 체포될 것이다. 자율주행차가 만드는 사고를 수없는 사람들이 비난할 것이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운전하는 차에 의해서 죽어간다고 해도 말이다. 

 

최근에는 기술의 발전속력이 인간의 적응속력을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극적인 사례가 있었다. 2023년 3월 29일에 미국 비영리단체 '삶의 미래 연구소(FLI)'가 테슬라의 대표인 일론 머스크와 인공지능 전문가, 업계 관계자 등 1000여명이 서명한 공개 서한에서 오픈AI의 'GPT-4'를 능가하는 대형언어모델(LLM) 개발을 6개월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FLI는 이 공개서한에서 강력한 인공지능은 그 효과가 긍정적이고 위험을 관리할 수 있을 때만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제안이 현실적이고 효과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떠나서 무기도 아닌 기술에 대해서 이러한 제안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기술적 발전이 사회적 합의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으며 인공지능 패러다임이라는게 뭔지를 생각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기술의 위험성 뿐만이 아니다. 자율주행이 보편화된다는 말은 택시운전사나 트럭운전사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일을 계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의 수명은 오히려 점점 늘어가는데 20년간 택시운전을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다른 훈련을 받아서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이런 일이 특정한 한두개의 직종에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20년간 교육과정을 거친 후 10년정도 직업을 유지하는 세상에 살게 될까? 그 다음에는 완전히 새로운 걸 공부해야 하고? 그건 참을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과정일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이런 변화를 겪는 인간에 대한 생각 없이 어쨌건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는 점점 빨리 일어날거 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혁명의 과정속에서 생겨난 참상을 견뎌낸 것은 상대적으로 그것이 천천히 진행되어 협상도 하고 적응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짜 동영상을 만드는 딥페이크 같은 기술이 수많은 영화종사자들을 단숨에 실업자로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사회적 진보의 속력을 제한하는 것은 기술개발쪽이 아니라 인간의 적응속력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인공지능이 발달한 미래가 오려면 우리는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교육과 사회적 환경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것들 없이는 인공지능의 발달은 매우 제한적일 것이고 혼돈은 커질 것이다. 우리가 인공지능 패러다임을 이해하는 만큼만 미래는 우리에게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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