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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키워드 여행

통영과 변산반도의 차이

by 격암(강국진) 2011. 4. 4.

11.4.4

나 자신도 그렇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불감증을 앓고 있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져도 느끼지 못한다. 보고 느낀다고 해도 그들의 감각은 매우 흑백 논리적이라 거기에는 섬세함이 없다. 섬세함이 없을 때 우리는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에 당하게 된다. 포크레인으로 라면을 먹기위해 젓가락을 쥔다고 해보자. 밥상을 뒤엎지 않으면 다행이요 옆사람 쳐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람들은 '아 바쁜 세상 섬세하게 살려고 해도 잘 안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바쁠까. 뭔가를 섬세하게 하지 못해서 그렇다. 우리는 왜 건강하지 못할까. 몸의 요구에 섬세하게 대응하지 못하기때문이 아닐까. 

 

이 섬세함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한국의 두 관광지 이야기를 한번 이야기해보자. 하나는 통영이고 하나는 변산반도가 있는 부안이다. 우리는 흔히 어떤 지역이 발전했는가 아닌가를 이야기할 때 거기는 아직 개발이 덜 되었다는 식으로 종종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근사한 리조트를 짓거나 놀이공원을 짓거나 강변을 정비하고 자전거도로를 놓고 하는 일을 많이 한 '개발된' 곳은 좋은 곳이고 그렇지 못한 곳은 나쁜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심한 사람일수록 실은 놀이문화라는 것에 대해 무지하고 경험이 없다. 뭐랄까 맛을 느끼지 못하는 미각에 문제 있는 사람이 식당의 음식맛을 논하며 거기는 그래도 푸짐하게 주지 저쪽은 양이 적어서 틀렸어 라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음식의 양이 음식의 질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더더구나 비만을 걱정하는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부안에 가면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이 있고 내소사라는 절이 있으며 채석강이라는 해변과 서해안 특유의 넓은 갯벌이 있다. 백합조개로 만든 백합탕이며 백합전이며 백합구이가 아주 맛이 일품인 곳이며 리조트도 잘만들어 진 곳이 있어서 결코 개발이 덜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순신장군과 한려수도로 유명한 통영은 봄철이면 도다리쑥국을 먹는 사람이 많고 맛있는 회집이 많다. 그러나 그 기본적 자원의 문제에서 크게 부안을 압도한다는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두 곳을 최근 모두 방문한 사람은 대개 이런 느낌을 받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통영에는 왠지 아무리 자꾸 와도 새로운 것이 또 있을 것과 같은 느낌이 드는 반면 부안은 한번 와보았고 유명한 음식도 먹었으니 다음에는 다른 곳에 가야지 또 올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느낌이다. 

 

이 차이가 지역경제에 끼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통영을 칭찬하고 또가고 싶다고 하고 친구를 데려오기도 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섬세한 것이 먹고사는 문제와 상관이 없겠는가. 통영이니 부안이니 하는 거대한 스케일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 통닭집을 해도 왠지 한번 먹으면 이젠 다른 곳을 먹어봐야겠다는 집이 된다면 잠깐 반짝하고는 시설비도 뽑기전에 열기가 식을지 모른다. 이래서는 항상 새로운 투자하느라 적자에 시달리고 삶이 팍팍할 뿐이다. 

 

그렇다면 뭐가 차이를 만드는가. 그 차이를 알고 싶으면 통영에서 튀는데 부안에서 그다지 튀지 않는 것을 느끼면 된다. 통영에 가면 올레길이 있다. 그 올레길은 뭘 잇는 올레길일까. 상당수가 통영에서 살았던 시인이나 소설가나 화가와 관련된 곳을 잇는 곳이다. 

 

통영에서 요즘 제일 화제가 되고 유명한 곳은 동피랑이라는 곳이다. 동피랑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고 권하지만 어찌보면 철거대상이었던 달동네 벽에 어린애 그림같은 것을 벽화로 그려서 만든 짧은 벽화거리일 뿐이다. 통영과 부안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근원은 향토역사관을 봐도 느낄 수가 있다. 

 

 

 

 

보는 사람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 이 모든 것들안에는 뭐가 있을까.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있을 뿐이다. 최고의 인기장소라는 동피랑은 유명한 그림을 모아놓은 것도 아니고 유달리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작품도 아니다. 다만 자기를 표현하는 인간들의 허술하지만 솔직한 자취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문인들이며 예술가들의 자취를 논하고 있는데 그것도 결국 인간이다. 인간이 거의 없는 것은 과학논문이다. 그런데 문학작품은 줄거리가 똑같다고 같은 평가를 받는게 아니고 어떤 것은 거의 줄거리랄 것이 없는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읽으며 독자가 필자를 느끼는 것이다. 어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이 소설은 꼭 연필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말이 소설의 줄거리에 영향을 주는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을 단순 요약과 다르게 하는 것은 이런 문장에 표현된 인간이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부안에 없는 건 뭘까. 표현된 인간이다. 인간적 교류다. 인간적 교류라고 해서 무슨 거기 현지의 사람들과 얼싸안고 춤이라도 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기계적 임무에만 충실할 때 사람은 어떤 면에서 기계일 뿐이다. 그저 물건을 파는 상인일 뿐인 사람, 그저 지역의 유명한 음식을 팔 뿐인 사람은 자판기와 차이가 없다. 

 

나는 친절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유럽풍의 멋진 펜션이나 까페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며 그 점원은 매우 잘 친절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 그런 곳이 깊이를 획득하지 못했을 때 그런 곳은 그저 한번 가봤으니 알겠다라는 곳을 넘지 못한다. 엄청난 돈을 들여도 그저 그뿐이다. 

 

깊이를 획득했다라던가 섬세하다는 표현은 매우 애매하다는 불평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호텔이나 음식점을 하면 잘하겠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난 아마 못할것이다. 난 음식점이나 호텔쪽으로 장인이 되고 싶은 강한 욕망이 없기에 완전히 몰입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깊이라던가 섬세함은 사랑을 요구한다. 깊이라던가 섬세하다는 것은 거기에 완전히 몰입한 장인이 되어 자신을 잘 표현했다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의 싸구려 복제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점에 가고 어떤 펜션에 갔을때 거기서 아름다운 인간을 느끼면 우리는 또 가고 싶어진다. 인간은 결코 한번에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인간을 표현한다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갔더니 마스크를 쓴 것같은 무표정한 사람들이 채소를 팔고 있더라고 하자. 그런 사람이 예절교육을 받아도 우리는 왠지 딱딱함을 느낀다. 메뉴얼대로 움직이는 로봇같아서 어떨 때는 먹고살자니 억지로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싶어서 오히려 대접받는게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라. 이 사람과 예술같은 것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꽃을 보건 봄날의 들판을 보건, 새를 보건 무지개를 보건 어떤 감상도 느끼지 않을 것같다면 그 사람이 서툴게나마 시 한 수 써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 자기를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문제는 한국에 그런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안 그런 사람이 찾기 힘들정도 아닌가 사실? 서울 강남에서 수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길 양편으로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고층 아파트를 보게 된다. 내가 거기서 보는 것은 그저 인간의 탐욕과 몰개성화뿐이다. 그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이 표현된 거주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을 그 안에 끼워 맞춘 돈의 덩어리다. 고층 아파트단지가 아름답다고 관광지가 되는 일이 있던가. 이젠 한국 드라마에서도 독일마을이니 프랑스마을이니 해서 한국에 지어진 외국인들이나 교포가 지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는 일이 흔해졌다. 

 

문화나 감성을 배부른 자의 특징쯤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그래서는 모두가 배고파지고 모두의 삶이 빈곤해진다. 주거환경의 문제에서 노는 것, 아이들 교육문제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자신이 표현되기 보다는 습관화되고 누군가를 복제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의 다양성은 오히려 메말라가는데 선진국이 되겠다고 하는건 무슨 말인가.  

 

우리는 모두 연습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 자신으로 사는 연습이다. 적어도 가끔은 습관적으로 하던대로 살지 말고 그렇다고 파격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에게 그래서 너는 뭘 원하는데, 너는 뭐가 좋아보이는데 하고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왠지 그러고 싶어서 오랜동안 듣지 않았던 음악을 틀어보거나 꽃을 한송이 사서 꽃병에 넣어보거나 아내와 다정한 시간을 오랜만에 한번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늘 입던 옷이 아니라 조금 다른 옷을 입을지 모르고 그렇게 해서 늘 묻던 질문이 아니라 조금 다른 질문을 주변사람에게 할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늘 하던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나 해보게될수도 있으며 그것이 물꼬가 되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우리가 불감증에 걸려있던 어떤 시각이 살아나면서 완전히 새 새상이 열릴지도 모른다. 

 

멋진 관광지의 차이가 반드시 투자한 돈의 차이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멋진 소설이나 수필은 중심을 지키면서도 자기를 표현한 여유나 파격이있어야 완성된다. 멋진 삶도 그런것이 아닐까. 이같은 것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것인데 세상을 보면 아주 심하게 잊혀져 있다는 느낌이다. 그 결과는 빈곤한 삶이다. 정신적으로는 물론 물질적으로도 그렇다.  의미나 가치적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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