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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키워드 여행

한국문화 탐방기 : 멈추지 않으면 성취가 없다.

by 격암(강국진) 2011. 8. 3.

대학에 이런 말이 있다. 


멈추는 것을 알아야 정해지는 것이 있고, 정해지는 것이 있고 난후에야 차분해 질수 있으며, 차분해 지고 난후에야 평안해질수 있고 평안해진 후에야 사려할수 있으며 사려한 뒤에야 성취가 있다. 


(김미영의 대학중용 번역에 따르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출곳이라고 했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이라고 했다. 전문번역가의 번역이 옳겠지만 나는 여기서 이렇게 쓰는게 마음에 들어 약간 고쳐서 인용했다. 이렇게 썼을때 보다 내마음에 드는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원한다면 대학을 표절한 나의 문장이라고 불러도 좋다.)


흔히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람들이 좀 더 좋은 것을 찾는데에 있어서 너무 빨리 빨리를 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다시 느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창의성이 없고, 인간이 없고, 정체성이 없고, 주인이 없는 문화는 자생가능한 문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먼저 천천히 천천히를 실시해야 한다. 천천히 가야 빨리가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근래의 10여년간 한국은 전국이 개발되면서 변화의 몸부림을 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올래길을 만들고 멋진 펜션들이나 리조트를 짓고, 물놀이장은 물론 각종 음식점들이 새로 개발된다. 공원도 좀더 조성되고 여러가지 문화행사며 축제도 많이 열어서 이제는 왠만한 곳이면 일년에 몇번은 행사를 하는데 관광수입을 올리는 것이 지역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생각한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지방자치단체와 일반 시민들이 모두 힘을 모아 보다 재미있고 즐거운 지역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을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다보니 경쟁도 심해서 찜질방이며 식당, 펜션, 리조트도 전국최고수준의 시설을 자랑하는가 싶더니 불과 몇년만에 또다른 곳이 생겨서 끝없이 자본을 먹어치우는 것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결국은 대기업이나 큰 체인이 진출해서 개인사업자들을 압도하는 것같은 일도 벌어지는 것같다. 


그런데 거기에서 망각되어지는 기본적인 질문이 있다. 들으면 고루한 말일지 모르나 그건 바로 '좋은게 뭔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게 뭔지 너무 쉽게 알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좋은 것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현재에서 그 좋은 것으로 빨리빨리 가지 못하는 게으름, 혹은 돈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알기 쉬운 그 좋은 것이란 대개 카피 즉 남의 것의 복사라는 것에 문제가 있다. 파리에 가보고 라스베가스에 가보고 동경에 가본후에 야 여기 좋네 하고 우리 동네에 제2의 파리, 제2의 라스베가스, 제2의 동경을 만들려고 하거나 그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된 거리를 만들려고 하는것이다. 


이렇게 국제적인 수준으로가지 않아도 그렇다. 어떤 펜션 스타일이 유행한다 싶으면 그게 좋다면서 우 하고 유행을 쫒아가는 일도 있는 것같다. 한마디로 유행에 민감하다.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은 남이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삼아 복제를 잘한다는 이야기다. 


늘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이 부분이 미묘하고 어려운 부분이다. 복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복제가 좋다는 것도 아니다. 복제를 하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거기에는 복제를 하냐 안하냐에 상관없는 또다른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을 가르키는 단어들이 정체성, 창의성, 감수성, 주인문화, 자생력같은 것들이다. 


예를 들어 광안리 바닷가를 이야기해 보자. 광안리 바닷가에 가보면 바다에 떠있는 유람선이며 아름다운 광안대교와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야경에 압도될 지경이다. 사방에서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은 즐거이 술과 차를 마시고 폭죽놀이도 하고 바닷가를 거닐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여기저기 거리공연도 있다. 이곳은 좋은 곳이다라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정체성, 창의성, 감수성, 주인문화, 자생력이 없다. 문화를 진짜문화와 가짜문화 두개로 흑백으로 가를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열대의 사막에 석유팔은 돈으로 인공적 스키장을 만들어 소수의 지역민과 부자 관광객들이 즐기는 것을 가르켜 스키문화라고 말할수가 있을까? 분명 그것은 가짜문화라고 불러야 할것이며 오일달러같은 돈이 솟아나는 구멍이 없으면 유지될수 없을 것이다. 즉 연비가 무척이나 나쁜 자동차처럼 비효율적인 구조다. 정체성, 창의성, 감수성, 주인문화, 자생력이 없다면 그것은 가짜문화다. 


문화는 하나의 생명같은 것이다. 제대로된 생명이 아니라도 우리는 온갖 유지장치를 달아서 비싼 댓가를 치루면서 유지시킬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효율이 나빠서 유지되기 힘들거나 착취같은 비극을 숨겨서 유지된다. 예를 들어 가격을 떨어뜨리기 위해 껍데기만 화려할뿐 실제로는 저질의 음식과 음악일 뿐이거나 거기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엄청난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다던가 하는 현실말이다. 


사람들이 흔히 경제성장을 위해 흔히 하는 짓이 있다. 돈을 푸는 것이다. 거품이 일어나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경기가 좋아지면 여러가지 투자가 일어나서 그러다보면 새로운 산업이 일고 경제가 발전할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보장된 것은 아니고 이런 일을 자주하면 결국 거품붕괴가 오고, 물가폭등이 오고 경제공황이 온다. 일분에 백미터 뛸체력밖에 안되는 사람이 무리해서 3백미터 뛰다가 심장에 무리가 와서 쓰러지고 결국 천천히 뛰는 것보다 못하게 되거나 심하면 죽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이엠에프를 겪으며 그 참혹함을 경험했다. 


문화도 그렇다. 우리가 거대한 다리를 이용하고, 큰 빌딩, 공원시설, 리조트 같은 것을 짓는 것은 말하자면 문화발전을 위해 돈을 뿌리는 부분에 해당한다. 그러나 돈을 잘못뿌리면 문화가 부흥하는게 아니라 문화 공황 즉 문화가 죽는 일이 생긴다. 거기에 정체성, 창의성, 감수성, 주인문화, 자생력이 없기 때문이다. 


도데체 그게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제의 광안리 바닷가에 가보라. 문화는 변화하는 것이므로 나는 광안리 바닷가가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번에 갈때는 아스팔트만 있고 숲이 없는 광장같은 그곳에 풀이나고 나무가 자라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재만 보면 화려하기만 할뿐 결정적인것이 빠져있다. 


거기에는 한마디로 사람이 없다. 사람이 버글대지만 사람이 없다. 광안리에는 광안리가 없고 부산도 없고 심지어 한국도 없어보인다. 정치적인 색체가 있어서 조금 그렇지만 봉하마을 노무현 전대통령 묘지와 통영의 동피랑의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 전대통령의 묘지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작은 박석들에 사람들이 자기 메세지를 담아 박아 놓은 것이다. 통영의 최고 인기지가 되어 있는 동피랑은 대단한 명작은 아니지만 여러가지 개성이 있는 벽화를, 즉 여러사람의 손길, 한국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그림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게 내가 말하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의 예다. 


창의성과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한국적인것이라고 말하면 무조건 한복입고 가야금 뜯는 걸 말하는 줄아는데 그게 아니다. 한복과 가야금도 좋고 중요하지만 그런것과 상관없는게 있다. 똑같이 커피한잔을 만들어 먹어도 분명 한국인이 먹는 커피가 있고 프랑스인이 먹는 커피가 있다. 


감수성이 있는 인간이란 어쩌면 매우 쉬운 것이다.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자기를 표현한다. 그것은 정말 미묘한 차이일수 있다. 좀 시끄러운 음악보다 약간 조용한 음악에 조금더 점수를 준다던가, 짭짤한 걸 좋아해서 피자를 약간 더 짜게 만드는 일일수 있다. 카페에 책을 읽는 공간을 조금더 신경쓴다던가 그저 서로 인삿말 한마디 더하고 테이블 크기가 약간더 커지거나 작아지는 것일수 있다. 놀러가는데 이왕이면 나이든 부모님과 같이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더 큰 것일수 있다. 이것들은 미묘한 차이다. 그러나 일단 자기가 표현되고 그것이 모이고 어떤 관성을 가지게 되면 나중에 보면 전혀 다른게 된다. 한국의 짜장면이나 김치 같은 베스트셀러 음식이 되는 것이다. 대장금같은 명품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뭐야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실은 복제를 하는 쪽이 언제나 쉽다. 내 느낌은 저기 밑에 미묘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항상 침착하고 느리고 천천히 느끼질 않으면 그 느낌은 숨어버린다. 마치 설탕과 프림을 너무 탄 커피속에서 커피 그자체의 맛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걸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걸 놓치면 나는 내가 뭔가를 결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가치판단은 누가 나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며 내가 느끼는 쾌락이란 나의 감성이 아니라 근거가 없는 환상에 기초한 거품같은 것이고 마약이 사람을 황폐하게 하듯, 결국 우리를 황폐하게 한다. 날마다 즐거운데 어느날 문득 돌아보면 왠지 공허하다. 


얼마전에 나는 홍대문화가 죽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홍대거리가 인기를 얻게 되자 자본이 투입되고 점점 화려해 지는 가운데 홍대 거리를 애초에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었던 문화가 죽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과 자본이 있다. 그들이 들어가면 문화는 자생력을 잃고 매우 비효율적인 시스템으로 바뀐다. 그렇게 되고 언젠가 자본이 빠져나가면 폐허만 남는 것이다. 마치 아이엠에프의 축소판이다. 


자생력 자생력하는데 그게 뭔가하고 말할지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정체성, 창의성, 감수성, 주인문화, 자생력은 이런 문맥에서 다 같은 말이다. 부산이라면 부산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 단지 과도한 기대치로 환상에 빠진 사람들이 좋아하는게 아니라 조용히 천천히 자기를 들여다볼수 있고 부산 전통문화, 사회문화를 몸에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게 진짜다. 진짜 부산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자갈치시장터와 파전같은 것에 있다. 


그런게 왜 자생력이 있을까. 부산에서 파전을 만드는 것은 쉽고 싸지만 부산에서 완벽한 뉴욕브런치를 재현하는 것은 비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산의 관광지는 전부 시장터처럼 만들라는 것인가. 아니다. 젊은 세대는 지저분한걸 싫어한다. 전통은 항상 발전적으로 수용되어야 한다. 발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감수성이다. 창의력은 본래 남이 보지 못하는걸 보는 능력이고 그것도 감수성이다. 


아. 모르겠다. 좋은게 좋은거 아닌가하고 성질급한 사람은 말할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대학을 인용했던 것이다. 천천히 느껴야 느낄수 있다. 와 좋다라고 하지만 그리고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자기는 왠지 늘상 다른 곳에 가지 않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화려한 비키니를 보고 와 하지만 왠지 자기는 매일 다른걸 입고 그게 더 편하다. 자기가 자기를 살필 필요가 있다. 양식타령을 매일하지만 왠지 늘상 자기는 김치비빔밥을 먹는다. 화려한 곳에 감탄하지만 왠지 늘상 조용한 곳을 찾는다. 머리가 환각을 헤매는 동안 몸이 진실을 알려준다. 몸이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몸과 머리가 서로 다른 것을 볼때 비극이 생긴다. 그러지 않으려면? 성현이 이미 답을 말해주지 않았는가. 다시 대학의 한구절을 읽으면서 명상이라도 해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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