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신시가지 밤산책 단상

별거 아니지만 고마운 것이 있고 그걸 또 미처 생각이 나질 않아서 못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밤산책이 그렇다. 요즘은 연일 전국이 매우 덥다. 전주도 예외가 아닌데 그러다 보니 낮에 어딜 나가서 산책을 하는 일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요즘같은 날이면 밤산책이 고맙다. 

펄펄 끓는 더위도 밤 12시가 되면 수그러들고 어디선가로부터 솔솔 찬기운이 섞인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더위를 피하느라 집에 갇혀 있었던 몸을 빼내어 거리로 나서보면 그 바람이 너무 기분이 좋다. 그 바람을 느끼면서 골목을 돌아서면 편의점 앞의 의자에 사람들이 앉아서 맥주를 앞에 놓고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쯤이면 아 진작에 나올 걸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여름도 밤산책을 아직 몇번 못했다. 언제나 이런 저런 시시한 일들이 있고 밤산책이 이렇게 고마운 것이라는 생각은 기억속에서 가물 가물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밤마다 나올 것을 생각하면서 나는 꽃집을 지나가고 분식점을 지나가고 일본식 주점앞을 지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걷다보니 밤산책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산책이라고 해봐야 한2-30분 걷는 정도지만 이 산책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 개인적인 사정말고도 아주 여러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우선은 밤산책이건 낮산책이건 산책을 한다는 것이 요즘은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가 사는 모습은 이제 걷는 것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집을 나서면 걷지 않는다. 걷는다해도 대개는 버스정거장이나 지하철까지 걷는 정도고 그나마도 안하고 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이 많다. 사람이 풀밭을 걸으면 길이 생기듯이 사람이 걸어다녀야 그 길가가 점점 걷기에 좋아지는 법인데 애초에 사람들이 걸어다니질 않으니 동네에서 사람이 걸어다닐 산책로를 찾기가 쉽지 않다. 쓰지 않는 길은 음산해지기 마련이다.

또 산책을 조금만 해봐도 알 수 있듯이 산책의 최대의 적은 자동차다. 백미터 걸을 때마다 찻길을 만나고 건널목앞에서 우두커니 서서 신호를 기다려야 한다면 그런 길은 산책로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은 길을 자동차에게 빼앗긴 곳이 많아서 그런 곳이 아주 많다. 게다가 자동차는 매연과 소음을 낸다. 그러니까 차가 많이 다니는 찻길옆의 인도는 도저히 산책로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 곳도 사진을 찍어놓으면 때로 아주 멋져 보이지만 그런 곳은 실제로 가서 걸어보면 걸어다닐만 하지 않다. 

밤 산책은 조건이 더 까다롭다. 도시에 산책로가 드물다고 해도 잘 찾아보면 산책로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밤산책이라면 왠만하면 내 집에서 바로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밤에 차를 몰고 어딘가로 가서 산책을 한다는 것은 번거롭다. 게다가 설사 얼마 타지 않는다고 해도 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밤산책의 풍미를 망치고 만다. 차는 5분을 타도 어딘지 모르게 우리를 긴장시킨다. 

게다가 낮에는 쓸만한 산책로인데 밤에는 그렇지가 않은 경우도 많다. 밤산책을 하자면 아무래도 등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등도 없는 어두운 숲길을 밤에 걷는 것은 좀 무리다. 그렇다고 해도 화려한 등불로 가득찬 찻길은 또 산책로가 되질 못한다. 그러니까 밤에 산책하기 위해서는 가로등이 적절히 있으면서도 차가 많이 다니지 않는 길이 있어야 한다. 그런 조건을 갖춰도 사실 여자로서는 혼자 밤산책을 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이다. 

밤산책은 어려운 것이지만 해보면 참 근사하다. 밤이면 도시의 소음이 줄어들기 때문에 아주 차분한 기분이 든다. 게다가 적당히 어두운 조명때문인지 도시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일 때가 많다. 밤에 봐서 멋없어 보이는 가게는 거의 없다. 사람이 북적이는 주점은 그 북적이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보이고 아무도 없이 점원만 가게를 지키고 있는 커피숍은 또 그 나름대로 사무치게 낭만적으로 보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심지어 편의점 앞의 파라솔 의자앞에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 동네사람을 만나도 왠지 낭만적이고 왠지 반갑다. 약간의 자극만 있었다면 왠지 인사를 건네고 싶은 분위기다. 

본래 한국 사람은 여름에 밤산책을 많이 해서 그걸 밤마실이니 납량이니 하고 말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는 그 환경이 밤산책에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차가 없었고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걸어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윤오영의 하정소화라는 글만해도 바로 여름철의 밤산책에 대한 것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자동차에게 길을 빼앗기지 않았고 이런 저런 제약으로 인해서 오히려 밤이면 여유가 있었던 것같다. 핸드폰은 커녕 집전화기도 없었던 시절에 집에 돌아오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랬던 한국이 이제 마을은 거의 없어지고 아파트 촌으로 변했다. 자동차가 많아져서 한집에 차가 두대가 있는 경우가 요즘은 아주 흔하다. 사람들이 걸어다니질 않으니까 동네의 구멍가게들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길은 더 어두워졌고 무서워졌다. 

어릴 적에 등화관제 훈련을 하자 도시가 어두워지고 별들이 잔뜩 보이게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다들 티비를 보면 웃고 있던 그때에 사실은 밤하늘에 별들이 그렇게 멋지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미세먼지 탓인지 등화관제를 해도 밤하늘이 그때처럼 멋있지는 않다. 밤산책도 정말 드문 일이 되었는데 우리 삶의 호흡이 예전보다 훨씬 더 빠른 것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네를 한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뭔가 아주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이다. 밤산책을 즐길 수 있는 삶, 그런 게 멋진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