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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대학은 왜 망할 수 밖에 없을까?

by 격암(강국진) 2019. 1. 14.





오늘은 대학은 왜 망할 수 밖에 없을까하는 주제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말씀 드릴 것은 대학이 망한다고 할 때 대학이 모두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전혀 없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좋은 예는 종교시설들입니다. 우리는 사방에 절이나 교회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종교의 영향력은 모두 사라지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자신들의 인생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질문들의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전과 비교하여 말하자면 종교는 망했죠. 오백년 천년전에는 우리는 종교에서 주로 답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종교시설이 곧 지식과 교육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종교 단체의 선지자 격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쓴 성스러운 책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했고 아니면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직접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진리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신적인 존재없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므로 종교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예전만큼 종교에서 답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학문이고 이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쉽게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 때 이성에서 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의 교회나 절이 바로 대학인 것이죠. 대학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육과 지식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이 망한다고 하는 것은 대학이 지금의 교회나 절처럼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중대한 기관으로 남겠지만 어느 모로 보나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되고 특히 더이상 새로운 지식과 교육의 중심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세는 이미 상당부분 진척되었습니다. 교회나 절의 권위가 이전같지 않듯이 대학의 권위도 이미 이전과는 같지 않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대학이란 혹은 나아가 교육기관들이란 그저 돈을 벌게 해줄 직업을 구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전수해 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학이나 학문이란 본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학은 적어도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주는 전인교육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직업학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50년전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대학 졸업생의 절반이 실업자거나 대학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고졸실업자보다 대졸실업자의 수가 더 많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의 70% 이상의 사람이 가는 곳이 대학이며 그래서 이제는 단순히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심지어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도 취업문제로 고민이 깊습니다. 대학생이면 우리 사회를 이끌 엘리트라는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힘들지만 대학에 합격한 것을 인생의 큰 고비를 넘긴 것으로 여기는 시대는 사실 이미 끝났습니다. 대학졸업장의 가치는 이미 크게 떨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여러가지로 설명을 할 수가 있겠죠. 하지만 우리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유를 봐야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학의 한가지 중대한 기능은 생산되거나 발견된 지식을 저장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정보를 축적하는 것은 금새 그 양이 어마어마해 집니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지식을 압축하여 저장할 이론을 만드는 것이 또한 대학의 중대한 역할이었습니다. 진화론이나 뉴튼역학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론이 있으면 아주 많은 정보를 간단하게 저장할 수 있고 심지어 아직 관측되지 않은 사실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세상이 명쾌하게 보이게 되죠. 하지만 이렇게 이론을 발전시켜도 지식의 양은 점차로 증대됩니다. 그래서 19세기의 독일대학을 시작으로 대학은 전문화를 했습니다. 지식이 너무 많으니까 분리를 해서 전문가가 각 분야를 담당하게 한 겁니다. 하지만 대학의 기본적 기능은 같았습니다. 지식을 생산하고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죠.


이렇게 지식이 축적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대학에서 답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질문이건 우리는 그 질문의 답이 저 대학안에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성의 교회나 이성의 절안에 말입니다. 대학은 이같은 분명한 이유로 교육과 지식 저장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방식이 점점 더 잘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문화를 해서 학과를 만드는 속력이 정보가 생산되는 속력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뇌과학이 중요해 진다면 우리는 응당 대학에 뇌과학학과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던 분류들 그러니까 기존에 존재하던 학과들은 당연히 변화에 저항합니다. 학과의 일부가 잘라져 나가서 통합되어 새로운 학과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학과에 좋은 일이 아닐 뿐더러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가끔 학과통폐합 문제로 시위가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변화가 반드시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학과가 대표하는 대학의 전통적 구조를 바꾸는 일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은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뇌과학을 가지고 세상이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어도 뇌과학학과가 간단히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뇌과학전공 박사학위자가 간단히 배출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빨리 변하면 변할 수록 이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그러면 이건 마치 21세기에 조선시대적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차별하는 것처럼 되는 겁니다. 누가 연구비를 받아야 할까요. 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까요. 학과의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경직된 대학의 구조는 오히려 연구나 교육을 억압합니다. 저는 수학이 싫어서 문과로 갔는데 경제학과에 진학하는 바람에 망했다는 이야기를 30년전부터 들었습니다. 경제학은 통상 문과로 여겨지는데 왠만한 이과 학과보다 수학을 더 많이 쓰기 때문에 물리학과인 저에게 수학을 물으러 오는 경제학과 박사과정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말하자면 지식의 생산장치가 지식을 보내는데 저장장치가 저장을 잘 못하는 상황인 겁니다.  이 말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지식의 저장장소로서의 권위가 대학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고 대학이 질문에 답하는 능력이 점점 더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세상의 정보는 너무 많아서 이론화가 어렵습니다. 이제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해서 대학의 구조가 그것을 쫒아가기 어렵습니다. 대학은 점점 사회의 질문에 답하는 능력이 떨어져가고 권위가 추락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뭘할까요?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만 현대인은 지식검색을 하죠. 구글을 하고 다음검색을 합니다. 여전히 인터넷 속의 지식을 폄하하는 시선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판이 틀린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추세를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는 분명 합니다. 지식은 이제 점점 더 하드디스크에, 네트워크에 축적되고 있습니다. 대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답을 구하고 싶으면 전문가보다 검색을 하는 쪽이 더 정확하고 빠른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전기차에 대해 배우고 싶으면 자동차 관련 전문학과에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곳의 교수님들도 학위를 할 때는 전기차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대학교수나 의사도 특정 주제에 대해서 가장 최신의 변화에 대해서 다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일반인이 검색하면 더 잘아는 경우도 많이 생깁니다. 대학교수도 연구에서 실적을 내기위해서 점점 더 극단적인 전문화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반론적인 질문에 대해서 답할 수 있는 능력이 날로 떨어져 갑니다. 사실 박사학위할 때 전공한 것을 넘어서 학문적 연구의 범위를 넓히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사람의 학습능력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21세기에 어떤 키워드가 있다면 저는 그것을 한계라는 말로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에는 자원이 무한대인줄 알았죠. 무한한 발전이 가능한줄 알았습니다. 공해문제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모두 미국인들만큼 소비를 하면 지구가 견뎌내질 못합니다. 지구가 한계에 이른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한 발전을 꿈꿀 때와는 다른 사고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대학이라는 구조도 지식을 받아들이는데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더이상 기적적인 이론화를 통해서 복잡해 보이기만 하는 이 세상을 명쾌하고 단순하게 보이게 만들 그런 변화가 가능할 것같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살자면 문제를 만나고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때로는 종교에 의존하고 때로는 대학에 의존할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게 느껴집니다.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빅데이터라는 변화는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학문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몇년전에 알파고가 인간보다 바둑을 더 잘 두게되어서 화제가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테슬라에서 자율운전 프로그램 개발을 주도하는 안드레제 카파시 (Andrej Karpathy)는 인공신경망을 가르켜 새로운 종류의 프로그래밍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C나 파이선같은 컴퓨터 언어가 아니라 인공신경망의 수없이 많은 변수들로 프로그램을 짭니다. 


문제는 그 프로그램이 성공해서 그것이 바둑을 잘두게 되어도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바둑두는 법을 이해한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그냥 정보를 외우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건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의 수준에서 인공신경망이 바둑을 잘두는 규칙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답을 주죠. 이렇게 바둑을 두면 이세돌을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왜 그렇게 두면 바둑을 이긴다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정보가 축적됨에 따라서 점점 더 많은 답들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왜 이 주식을 사야 하는지, 왜 이쪽으로 진학해야 하는지, 왜 물건을 이렇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인공지능은 답을 줄겁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습니까? 언젠가는 당신이 말하는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를 인공지능에게 가르쳐 주면 인공지능이 여기저기로 이사가라고 말해 줄지 모릅니다. 방대한 데이타에 따르면 가장 그런 일이 가능한 지역은 여기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제 정리해 봅시다. 왜 대학은 망할 수 밖에 없을까요? 문제는 질문이고 답입니다. 우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대학이건 종교건 사실 어떤 의미로 그것들은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에 도달하는, 살아갈 방향을 찾고, 돈을 벌 방법을 찾는 수단이죠. 우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점점 더 대학은 그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답은 점점 더 많이 네트웍으로 부터 옵니다. 그건 꼭 구글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학의 전문화 구조가 없는 자유로운 네트웍에서 흘러다니면서 만들어진 답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더 대학 바깥을 많이 봐야 합니다. 스티브잡스나 빌게이츠나 엘론머스크가 했듯이 말입니다. 


아직은 빅데이터 시대의 교육이 어떤 것일지 확실한 윤곽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분명 대학을 정점으로 하여 초중고등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교육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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