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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가해자와 피해자, 다수자와 소수자

by 격암(강국진) 2019. 12. 9.

어제는 한 독립영화의 이야기를 보다가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한 여성감독이 만든 그 영화는 여성이 겪는 폭력의 실상에 대해서 보여주는 면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에 나오는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폭행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면서 저는 너무 세상 쉽고 거칠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일단 그 영화는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이미지를 줍니다. 왜냐면 그 영화속의 세상에서는 남성들은 거의 예외없이 여성에게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남자는 가해자고 여자는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저는 남자라서 그런지 이런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사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남자는 사실 폭력적 현실의 피해자다. 그들은 폭력남편도 아니고 남에게 폭력적으로 협박해 본 경험이 한번도 없거나 거의 없다."


남자의 사정은 여자보다 더 나쁜 면도 있습니다. 여자가 폭력에 당하면 그건 주변에 즉각 알리고 호소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은 왠만큼 맞고 왠만큼 협박당하는 것은 호소도 못합니다. 그런 일로 겁쟁이 처럼 구는 것은 오히려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듣거나 남자라면 그정도 맞는 것은 맞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에게 너 죽을래라는 협박을 하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이 못됩니다. 하지만 여성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심각한 협박으로 받아들여지죠.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걸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지적하는 것은 이겁니다.


"이 영화는 왜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사람을 가른 후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말하는 것같을까? 그렇게 하는 것에는 분명 단점이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장점이 있는가?"


단점은 분명합니다. 모든 남성을 다 가해자로 만든다는 것이죠. 이건 사실 인종차별이나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인식이 만들어 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평균적으로 말하면 남자가 여자보다 몸이 크고 체력이 좋을지 모르지만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설사 교도소에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해도 흑인이나 가난한 사람이 백인과 부자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차별인식입니다. 윤리적으로도 잘못되어있지만 논리적으로도 잘못된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착한 사람이니까요. 범죄자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다는 명제와 가난한 사람은 범죄자이다라는 명제는 같은 게 아닙니다. 


게다가 이런 구분은 폭력의 메카니즘이랄까, 폭력의 기제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폭력은 왜 일어날까요? 이걸 여성 남성의 눈으로 보면 폭력이 여성 남성간에만 일어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얼마전에 땅콩회항사건으로 유명했던 조현아나 그 동생 조현민 그리고 그 엄마 이명희를 생각해  보십시요. 그들은 모두 힘없는 여자입니다. 거기서 갑질당하는 남자는 육체적으로 더 강한데 왜 그런 갑질들을 당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여성이 남성에 협박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사실일 수 있습니다. 상담소나 경찰서에서는 늘상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폭행당한 여성이 오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을 법합니다. 누군가가 내 주변에서는 그런 걸 거의 못봤다고 하면 그 사람은 너는 현실에 있지않다. 인구적으로 보았을 때 대다수의 여성들은 지금도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는 지적을 당할 수 있으며 그런 주장은 그 자체로 진실일 것입니다. 여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홍보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서 멈춰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걸로는 충분한 세상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여성이 남성에게 협박당하고 폭력에 시달린다는 문장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다수자와 소수자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남성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다수의 남성은 폭력범으로 비판받는 것은 억울 합니다. 이럴 때 소수는 중요하지 않아, 다수에게 이것은 진리야 라고 밀어 부치는 것이 과연 21세기에 적합한 논리일까요?


다수가 중요하지 소수가 중요하지 않다면 외국인 인권이며 성적소수자 인권은 왜 챙기는 겁니까?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 흑인이 전혀 안 나오거나 동양인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해 왜 지적하고 비판할까요? 소수따위 가볍게 날리고, 사실상 희생자인 사람들을 가볍게 가해자로 만드는 정신으로 과연 21세기에 좋은 세상 만들 수 있을까요? 박근혜나 최순실이나 이명희같은 여자들에게 연약한 인간의 이미지를 주면서? 


그럴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점점 중요해지는 이유는 21세기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언제나 때로 소수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고 무식하게 크게 크게 다수만 보면서 일을 처리하면 말그대로 소수의 사람만 피해를 보는게 아닙니다. 우리는 돌아가면서 다 언젠가는 소수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당하게 되는 것이죠. 99사람이 너하나만 피해보면 된다면서 여러분의 집과 땅을 빼앗으면 나는 소수니까 당연하지 할겁니까? 거대한 토목공사해야 하니 소수자인 너의 피해따위는 중요하지않다는 말에 수긍할 겁니까? 그게 21세기의 좋은 세상입니까?


현대 사회에서는 사적인 복수를 법으로 금합니다. 내 아내나 부모를 죽인 범인이라도 내가 사적으로 보복하면 저도 사법처리가 됩니다. 범죄에 대한 처벌은 사법기관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정의를 복잡하게 처리할까요? 왜냐면 사적인 처벌을 막지 않으면 법시스템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혼자서 재판하고 처벌내릴 테니까요. 그래서 느리고 억울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공정할 수도 있는 법시스템을 우리는 참고 견딥니다. 분하지 않아서 사적 복수를 안하는게 아닙니다. 복잡함을 참고 섬세함을 추구하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단순무식한 정의는 피해자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여러가지 사상을 배우고, 이데올로기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쓸모가 없는 것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닙니다. 종종 피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보편관념은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심지어 그 그늘을 보이지 않게 합니다. 


오늘아침에도 결혼하는 것은 여자가 손해라서 결혼을 안하겠다는 한국여성들이 많다고 하는 내용이 기사화되었더군요. 개인적인 차원에서 말할 때 그 자체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확실히 손해라면 결혼은 안하는게 본인과 그 상대 남자 모두를 위해 좋습니다. 다만 현실을 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저 특정한 한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이지 나라는 여자가 저 남자와 결혼을 하는게 아닙니다. 어떤 행동은 목적을 가집니다. 결혼을 안하는 것이 나라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성이라고 불리는 집단 전체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까? 어떤 선택도 틀릴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기꺼이 목숨을 바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고민한게 아니고 세뇌당한거라면 그건 불행입니다. 대충 대충 남이 던지는 국가니 가문이니 여성이니 하는 보편단어에 휘둘리다 보면 자기가 없어집니다.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택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우리가 뭘 버리고 뭘 가지게 되는지, 지금 자기가 버리고 있는 자기것이 뭔지는 깊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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