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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by 격암(강국진) 2020. 5. 13.

20.5.13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은 자주 던져지는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질문은 한가지를 전제한다. 그것은 바로 국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가 무엇이냐고 묻는 본질론적 질문은 이렇게 그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선언하는 효과가 있다.

 

우리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산다. 게다가 세계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고 역사적으로 한반도만 봐도 조선에 고려에 고구려등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러니 국가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것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나도 사실 국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는 국가의 존재에 대해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두가지란 국가란 존재의 연속성과 추상성이다. 먼저 연속성에 대해 말해보자. 조선과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나라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국가라고 부름으로써 우리가 그들 간에 어떤 공통점과 연속성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을 고백한다. 예를 들어 국가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국가란 "일정한 영토를 보유하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을 가진 집단"이라고 나와 있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조선과 대한민국이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성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정의는 결코 확실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주권에 대해 말해보면 설사 어떤 사람들이 주권을 주장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주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일제때 상해임시정부는 제대로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주권을 가진다라는 성질은 엄밀히 말하면 주관적인 성질이다. 주관적인 성질이 어떻게 확실하겠는가. 

 

주권은 국가의 존재라는 질문이 포함하는 연속성 문제의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이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았겼을 때 왜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연속해서 존재한다고 믿는가? 전두환의 국적이 대한민국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는 혹시 국가에서 산적집단이 되고 만 것은 아닌가? 미국이 청와대를 점령하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도 우리는 여전히 대한민국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것인가? 

 

내가 각별히 관심을 가지는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봉건제의 국가와 현대의 민주국가를 모두 국가라고 부를 수가 있는가? 그것은 전혀 다른 원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직이 아닌가? 그런 걸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왜 동아리 같은 것은 국가라고 부르지 않는가? 미래는 어떤가? 우리는 정말 앞으로도 우리가 지금 국가라고 부르는 그런 조직안에서 살게 될까?

 

이 모든 혼란을 털어버리고 그런 건 당연한 거라며 국가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믿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리고 실용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기조차하다. 다만 우리가 너무 쉽게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폭탄과 감옥을 가지게된다. 그것은 바로 당연하지 않은 것을 맹신하는 폭탄이고 우리를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창살로 가두는 감옥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 평생 단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두 사람을 국적에 따라 당연하다는 듯이 차별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실용적으로 필요한 일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런 판단에 대해 일말의 의구심도 없을 때 우리는 비인간적이고 비합리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폭탄이고 감옥이다. 

 

국가란 마치 내 앞에 놓여 있어서 내가 만질 수 있는 얼음조각처럼 생생한 실체라는 믿음이 극단적으로 강할 때 우리는 맹신자가 된다. 하지만 국가란 개념은 본래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가족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시큼한 레몬을 맛볼 수 있다. 이런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체험과 감각을 주는 것을 실체라고 말하고 바로 그 실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추상이라고 말한다면 국가야 말로 인간이 만든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너무도 크고 복잡한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추상성은 흥미롭고 중요한 일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봉건국가와 현대국민국가를 생각해 보자. 봉건국가는 기본적으로 계층적 구조를 가진다. 즉 왕밑에 귀족들이 있고 그 귀족이 다시 지역을 다스리는 식이다. 천부장 밑에 백부장 백부장밑에 십부장이 있는 식이다. 이러한 계층적 구조는 한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존재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현대적 의미의 국민국가라는 개념을 믿지 않을 거라는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과 능력은 제한되어져 있다. 그러니까 내가 직접 만나고 경험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수란 지극히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일개 졸병이라면 나는 십부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십부장의 통솔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는 판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설사 백부장이나 천부장의 명령을 따른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따르는 십부장이 백부장의 명령을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봉건국가의 신뢰구조란 먼저 왕이 귀족과 신뢰관계를 가지고 다시 귀족이 그 중간 관리층과 신뢰관계를 가지며 중간관리층은 다시 그 아래의 일반 백성들과 신뢰관계를 가지는 식으로 구성되는데 이런 구조는 사람들이 오직 직접 대면을 통해서만 신뢰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거대 조직을 만들자면 계층적 구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는 "미친 사람들"이 아주 많다. 그들은 국민국가니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개념을 근거로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의 명령에 따라 세금도 내고,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하며 죽도록 일하기도 한다. 현대국가는 지극히 복잡하므로 그 국가의 일부를 이루는 시장경제에서의 돈의 개념만 생각해 보자. 우리는 뭘 근거로 돈은 생생한 실체라고 믿는가? 지금 이순간에도 각국의 정부는 돈을 마구 찍어대고 있는데? 그래도 우리는 월급을 받고 상점에서 물건값을 치룰 때 돈이란 생생한 실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렇기에 국가경제는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한국의 국민이라는 말은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내가 불교도나 기독교라는 말과 비슷하다. 즉 그 말은 본래 누군가가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을 지극히 현실적인 실체로 느낄 정도의 강력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추상적인 개념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요즘은 미디어를 통해 또 긴 의무교육기간을 통해 이 추상적 개념을 반복해서 머리속에 집어넣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하거나 거부한다. 시스템을 이해하거나 세뇌되는데 실패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봉건국가적인 개념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은 마치 서울같은 대도시에 풀어놓은, 교통신호따위는 믿지 않는 원숭이와 비슷하다. 교통사고는 필연적이다. 그래서 민주국가의 시스템은 그들에 의해 파괴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시스템에 세뇌된 사람들이야 말로 원숭이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시스템에 세뇌된 사람들은 한푼의 값어치도 없는 말에 속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만들어 내는 추상적인 단어가 그들을 지배하게 만든다. 

 

추상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는 쪽이 어리석은 것일까 아니면 그걸 거부하는 쪽이 어리석은 것일까?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답은 없다. 현대국가는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복잡한 이데올로기를 거부하겠다는 것은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하지만 비극을 만들어 내는 잘못된 이데올로기는 얼마나 만들어지기 쉬운가. 정치가들이나 시민운동가들은 얼마나 자주 공허한 말들을 하는가. 우리는 얼마나 반복해서 인간이 만든 관념이란 그저 관념에 불과하며 결코 확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가. 예를 들어 시장경제의 실패나 현대사회에서의 정체성 위기가 만들어 내는 우울증같은 것을 통해서 말이다. 

 

현대국가는 추상적인 관념이며 따라서 엄청난 교육과 많은 사회적 인프라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국민의 대부분이 문맹일 때 그들은 국가가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한계를 가질 것이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모든 추상적 관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문화도 물론 중요하다. 한 사회의 문화는 다시 말과 글에 반영되는데 그들의 말과 글이 보편성을 추구하는데 한계가 있다면 그 사회의 시민들이 생생한 실체로 여기는 국가란 결코 현대국가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국가란 요즘 인기있는 킹덤이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말처럼 밥에 불과하거나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다.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지식의 누적속도는 날로 더 빨라져 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세상의 복잡성은 하루가 다르게 증가한다. 이런 세상에 어울리는 조직은 당연히 더욱 더 복잡해진다. 그렇게 하지 않는 국가나 사회는 경쟁에서 지고 쇠퇴할 뿐이다. 

 

그렇다고 할 때 과연 민주주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코로나 사태가 보여주는 현실중의 하나는 이 세계의 많은 나라는 바보들을 그들의 대표로 뽑았다는 것이다. 아베나 트럼프가 하는 짓을 보라. 이게 왜 이럴까? 누가 누구를 뽑는가? 누가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의 맹신자가 되어 현실에 존재하는 시민들을 보는데 실패하고 있는가? 집단으로서의 국가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 가열찬 교육으로 그게 되나? 서구의 지식인들중에는 서구 모델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말은 서구 문명이 말하는 국가란 개념은 무너지고 있다는 뜻이다. 코로나 정국이 보여주듯이 작동이 안된다. 

 

국가란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 질문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을 논하는 것은 지금 이 글에서 거론하는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국가란 탁자위에 놓여진 사과처럼 단단한 실체라는 믿음을 전제하는 면이 있다. 조선이 이렇다던가 몽테스키외가 이렇게 말했다던가 미국 정치의 구조는 이렇다던가 하는 것을 논하는 것은 이런 함정이 있다. 인간을 잊어버리고, 같지 않은 것을 같은 것으로 뭉뚱그려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답들과 함께 이런 메타적인 정황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순간에도 국가란 사실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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