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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대학에 대하여

알파고와 교육의 미래

by 격암(강국진) 2016. 8. 4.

16.8.4

알파고와 교육 1 : 과학의 시대

 

알파고와 교육이라는 제목은 그 자체가 하나의 질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제목이 왠지 싫었다. 그 제목을 인공지능과 교육이라던가 4차산업혁명과 교육이라고 바꿔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제목자체가 뭔가 피할 수 없는 모순의 냄새가 난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도기를 살고 있기 때문이며 오늘날 교육을 말할 때 역시 학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다.  뛰어난 인공지능이 등장하는 시대에 학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겸손일 것이다. 즉 어떤 개혁을 해서 새 시대의 과업을 학교가 모두 짊어지겠다는 생각을 학교는 버려야 한다. 학교는 점차로 그저 많은 교육 기관중의 하나로 남게 될 것이다. 이미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과도기란 과거가 미래를 만나는 시기를 말한다. 그러니 먼저 과거로 부터 우리가 물려 받은 것에 대해 말해보자.  현대인들은 이제 우리가 과학 기술없이 어떻게 살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설사 시골에서 작게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산다고 해도 그렇다. 일단 비료도 종자도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의 결과물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도 인공섬유로 된 옷과 신발을 입고 차를 타고 마트에 갈 것이다. 그들은 돌아 올 때 비닐봉지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 사람들이 사는 집에서도 수돗물이 나오고 세탁기와 냉장고와 가스렌지를 쓰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신문을 보고 티브이를 보며 택배까지 받고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한마디로 오늘날 과학기술은 우리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우리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여기 저기를 슈퍼맨처럼 날아다니듯이 과학기술에 둘러 쌓여서 자신이 과학기술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여러가지 기적같은 일을 해내며 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반대편까지 날아간다던가 에어콘으로 집을 시원하게 만든다던가하는 기적 말이다.

 

사람들이 과학기술에 의존하며 사는 시대는 교육없이 살기가 무섭다. 본인도 무섭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도 무섭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흉기를 들면 자기 자신도 다른 사람들도 위험한 것과 같다. 또 인간은 사회적인 협동을 통해서만 요즘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기도 하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사람들은 대중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가 가진 교육 시스템의 뿌리는 이렇게 시대적 요구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무교육을 통해 글을 배우고 지식을 배운다. 학교란 여러가지 역할을 한다고 선전되지만 기본적으로는 바로 과학시대를 살아갈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하철역에서는 철로로 뛰어들면 위험하다던가 주유소에서는 불장난을 하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파란불이 들어올 때만 길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교육받는다. 우리는 한 사회안에서 존경할 만한 시민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교육받는다. 기계는 인간의 힘을 증폭하기 때문에 과학의 시대에는 무지한 인간, 시스템에 통합되지 않은 인간은 무서운 일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뉴스에 가끔 나오는 끔찍한 범죄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교육은 차별을 만들어 냈다. 바로 교육받은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구분이다. 닐 포스트만은 그의 책 유년기의 실종에서 서구에서 아이라는 개념은 바로 대중교육과 함께 즉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일정 나이가 되면 학교에 가고 글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아는 것이 다르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일정 나이가 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구분이 생겼을 것이다. 말하자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를 제대로 살아갈 면허를 취득한 것과 같고 오직 그런 면허를 취득한 사람들만이 제대로 된 시민으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그런 시민이 되지 못한 아동은 성인의 보호를 받아야 하며 설혹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이라도 결정권에 제한이 있다. 투표권도 없고 재산권도 제한적이다. 아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소위 학벌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뿌리가 같다.

 

이것은 단지 서구의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민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기본교육수준에 대한 기대치는 점차로 올라갔다. 나라마다 상황은 좀 다를 수 있지만 어느 나라나 일정수준이하로 교육받은 사람들은 대개 기피의 대상이다. 그들은 세상을 사는 규칙을 모르기 때문에 그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존중받을 가치가있다고 여겨진다는 뜻이다. 교육 수준에 대한 기대치가 한국은 특히 높아서 아예 처음 본 사람에게 몇년도에 대학을 들어갔는가를 물어보는 일이 종종 일어날 정도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해도 명문대를 졸업해야 한다. 국내 명문대가 아니라 미국 명문대라면 아마도 더 교육받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것이다. 학벌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지식을 쌓은 것을 하나의 성취로 인정하고 그 학벌에 대한 대접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지식의 구조를 반영한다. 그리고 과학의 시대에 지식은 수학과 물리학을 모범으로 삼아 성장했다.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는 과학은 엄밀한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고 믿어졌다. 이에 따르면 지식은 건축물과 같은 것이다. 하나의 단계는 그 이전의 단계를 토대로 해서 쌓아올려진다. 지식은 하나의 거대한 분류체계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먼저 몇가지 분야로 나눠지고 그 각각의 분야는 다시 세부 분야로 나눠지는 식이다. 지식은 본질적으로 계속 누적되고 옛날의 토대는 그 토대가 완전히 교체되는 혁명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한 변하지 않으며 쉽게 흔들지 말아야 할 권위를 가진다. 이러한 특징을 특히 잘 보여주는 수학은 많은 과학기술분야에서 기본적 도구로 사용되어져온 미적분이다.

 

과학은 단 하나의 객관적 세계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다. 이때문에 주어진 지식 시스템의 바깥에는 전혀가 아니면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착각을 만들기 쉽다. 과학자들은 온갖 혼돈끝에 논문을 쓰지만 그들이 최종적으로 쓴 것을 보면 논리적 전개는 지극히 당연하며 고려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경우는 전부 다 고려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지식의 최전선에 있는 경험있는 과학자들은 그런 착각에 빠져들지 않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지식 패러다임을 교육받고 전달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대개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강한 확신에 빠져든다. 그것은 주어진 이 지식 시스템의 바깥에는 전혀가 아니면 거의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이다. 적어도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의 시대에 모든 지식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객관적이고 유일한 틀 속에서 자기 위치를 가진다. 기계 속의 부품들은 각자의 위치에 있어야 자기의 역할을 하듯이 그 유일한 틀속에서 자기 위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지식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위험하고 피해져야 한다. 그것은 종종 미신이나 근거없는 소리로 여겨진다.

 

과학적 지식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이러한 배타성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아니면 세상의 대부분의 것은 지식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그것은 가르쳐 질 수 있는 것이며 적어도 대부분의 것은 지식으로 이해가능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현실이 꼭 그렇지 않다. 훌룡한 작가나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동안 학교를 다녀서 지식을 늘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즉 작가가 되는 법은 학교에서 가르쳐 질 수 없으며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책을 읽으면 작가가 되는게 아니다. 

 

훌룡한 과학자가 되기위해서는 학교를 오래 다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가. 만약 훌룡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지식의 문제였다면 우리는 진작에 전세계가 훌룡한 과학자로 가득 차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있는 나라를 왜 부러워해야 하겠는가. 그런 인재를 자동차 만들듯이 만들면 되는데. 이게 안된다는 것은 분명한데도 아직도 정치가들이나 공무원들을 포함하는 많은 사람들이 화가나 작가와는 달리 과학자나 엔지니어는 그냥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은 가르쳐 질 수 있는 부분과 그럴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럴 수 없는 부분은 누가 가르치기 이전에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거나 체험에 의해 스스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이란 이미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에 가르쳐 질 수 없는 부분이란 역시 스스로 자기 안에 이미 있는 것을 발견해 내는 일을 요구한다. 물론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전에는 가르 칠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단순한 법칙을 따르면 되는 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지식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에 불과하다. 현실적으로는 우리는 언제나 체계화되지 않은 것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제대로 지식화될 때까지 기다려서 그 후에 글을 쓰겠다는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학교의 구조는 지식의 구조를 반영한다. 지식이 분류되듯 교육도 분야별로 나눠지고 각 교과목에는 그것을 전공하는 선생이 배정된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의 지식이 훨씬 커져도 기본이 되는 토대는 거의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는 놀랍도록 변하지 않는다. 사실 50년이나 100년전에 비하면 우리는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수십년전에 나온 수학의 정석같은 수학참고서가 여전히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쳐 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의 상당부분은 실은 바로 미적분을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준비를 시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대학도 종종 상황이 그리 다르지 않은데 예를 들어 서점에 가서 요즘 물리학과 학부수업에서는 어떤 교재를 쓰고 있는 가를 확인해 보면 그 책들의 상당수는 이미 수십년전에 나온 책이다. 백년전의 초등학교에서는 뭘 배웠을까. 결국 글쓰기와 산수가 그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이전보다 지식이 훨씬 더 많이 누적되었어도 지식의 논리적 계층적 논리적 구조는 그대로 이므로 지식을 유지하고 전달하는 학교도 그 기본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 누적되어감에 따라 학교교육은 인간을 억압하게 되었다. 배워야 할 것은 점점 늘어만 가고 졸업장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점점 줄어만 간다. 리영희는 대화라는 책에서 일제시대에 있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에는 중학교다니는 사람이면 이미 대우받았고 고등학생이면 지식인 행세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대학생이면 순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특수계층의 대접을 받았다. 요즘의 박사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같다. 

 

요즘 한국에서는 70%이상의 고등학생이 대학에 진학한다. 수백년전에는 농부의 아들은 그저 집안일을 거드는 것만으로도 생존에 필요한 교육을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날마다 밤늦게 공부해야하고 비싼 교육비를 내느라 빚까지 내야 하는 상황에 몰리지는 않을 뿐더러 그 교육 기간이 16년이나 20년이 걸리지는다. 과거의 사람들은 어쩌면 미래인들은 뛰어나게 발달한 과학기술덕분에 날마다 유유자적하게 살아갈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기까지꼬박 16년을 공부하면서 많은 고통을 받고 많은 돈도 쓰지만 취업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알파고와 교육 2 : 망의 시대

 

과학의 시대가 과거라면 이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그것은 망의 시대다.  망의 시대는 정보의 수집과 기록 그리고 분석이 새로워지면서 시작된다. 이것은 요즘 자주 언론에서 거론되는 4차 산업혁명도 그렇다. 과도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어느 정도 망의 시대에 진입했다. 요즘 차에는 대부분 네비가 달려 있다. 그 네비들은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목적지들을 알고 있으며 현재 교통상황도 고려해서 경로를 찾는다. 우리는 그냥 전화를 걸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자동화 기술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 핸드폰에서 나오는 신호는 여러가지 다른 경로를 통해서 우리의 대화상대방과 연결될 수 있는데 그 중의 최적의 경로를 기계가 찾아서 연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검색엔진을 이용하여 정보를 찾는 것에 익숙하고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우리가 어떤 고객인가를 분석해서 우리에게 어떤 물건들을 광고삼아 보여줄까를 자동적으로 결정한다.

 

정보가 수집되고 기록되는 그리고 분석되는 방법이 바뀐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당연하고 사소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다시 과거를 돌아 보면 이것들을 사소하게 볼 수가 없다. 과거 인쇄술같은 것을 통해 정보의 수집과 기록 그리고 분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을 때 인간의 학문은 폭팔적인 성장을 달성했고 사회는 바뀌었다. 서구의 종교개혁도 결국 대중이 직접 전체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성경을 모두 모아서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출판하는 것이다. 정보가 그렇게 기록되고 배포될 수 있을 때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는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책을 쓰고 출판하는 시대가 아니라면 과학의 발전은 있을 수 없었다. 과학의 발전도 정보누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정보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수집되고 기록되고 분석되었다. 이제 망의 시대에는 기계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고 분석한다. 엄청난 수와 성능의 센서들이 개발되고 설치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실시간으로 모아들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바로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 프로그램들에 의해 분석될 것이다.

 

도구 없이 인간이 기억하고 구분할 수 있는 것에는 큰 제약이 있다. 우리가 정치판에는 진보와 보수가 있다고 말하고 사회에는 부유층 중산층 빈곤층의 세가지 사람들이 있다는 식으로 이분법이나 삼분법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10분법이나 백분법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눈에는 세계가 자연스럽게 2분법이나 3분법의 구조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데 이것은 우리의 인식능력과 기억능력의 한계때문이다. 과학의 시대에 인간은 수학을 써서 이 한계를 극복했다. 그냥 수학없이 볼 때는 세상은 혼동에 가득 찬 것같았는데 수학적 질서를 통해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발견해 낸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과학기술문명이다. 그것은 수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수학없이 현대문명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수학은 인간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데이터 분석을 하는데 있어서 컴퓨터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수만명분의 데이터를 처리하고 특히 아주 큰 차원을 가지는 데이터를 처리하려고 하면 수학적 연구도 꼭 필요하지만 결국은 컴퓨터를 써야 한다.

 

알파고 같은 기계학습을 통해 이뤄지는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로 세상을 보는데에 있어서 수학이라는 도구를 쓴다라는 한계를 넘어간다. 그것은 아주 큰 데이터에서 인간이 수학적인 도구를 써서 파악한 어떤 질서를 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찾아 낸다. 인간은 바둑을 두는 법을 분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알파고는 큰 데이터에서 이기기 위한 바둑을 두는 법을 찾아 냈고 세계 최고수급인 이세돌을 이겼다.

 

이러한 데이터분석은 하나의 토대위에 또 하나의 토대를 쌓아가는 지식이 아니다.  우리가 적분을 하려면 극한을 알아야 하고 극한을 하려면 수열을 알아야 하는 식으로 쌓아올린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바둑을 잘두기 위한 이론을 기초부터 쌓아올려가지 않는다. 그것은 곧바로 데이터와 행동의 관계를 질문한다. 즉 어떻게 바둑알을 두는 것이 가장 이길 확률을 높이는 수인가 하는 것이다.

 

또다른 예를 위해 유전자연구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특정유전자가 특정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특정유전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특정질병을 일으키는가를 전부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질병을 가진 사람들의 데이터를 분석해본 결과 그들에게서 어떤 유전적 특징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왜에 대한 질문하기를 상당부분 멈춘다. 우리는 관계를 발견하는데 더 집중한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우리는 진지하지 못한 태도라거나 진짜 혁신을 가져올 수 없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어리석은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정성적으로 말했을 때 갈릴레오나 뉴튼이 과학혁명을 시작할 때도 비슷한 일을 했다. 뉴튼은 중력법칙이 왜 그런 일을 하는가를 질문하기를 멈췃다. 돌이 왜 바닥으로 떨어지는가를 묻지 않고 돌이 떨어지는 운동의 수학적 기술에 집중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중력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고 그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수학의 발전을 포함하는 지식의 누적량이 증가함에 따라 큰 성공을 가져왔다.

 

이렇게 볼 때 논리적 중간단계의 이해를 포기하고 곧장 관계를 발견하기로 눈을 돌리는 것은 또다른 큰 발전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번 왜를 포기하는 대신 많은 관계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모으고 그것을 분석해서 그 안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알파고의 성공은 바로 우리가 그런 단계에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망의 시대에서는 객관적이고 유일한 세계관은 존재할 수 없다. 망의 시대라고 해서 우리가 논리적 연관성이나 일관성을 모두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기초적인 사실에서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는 포기된다. 우리는 다만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가지며 그 안에서 우리의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찾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들이 하나의 체계안에서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지는가를 답하는 것은 우리들의 첫번째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으면 대단히 좋은 것이지만 못해내도 좋다. 주가를 예측 해서 돈을 벌 수만 있다면 그 안에서 작동하는 질서가 인간의 본성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것을 이해못해도 일단은 큰 문제가 아니라는 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책임하고 또 비효율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전제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렇다. 수학은 과학의 언어라고 한다. 수학을 포함해서 많은 섬세한 언어의 발전이 없이는 데이터를 모아 봐야 그것은 그저 혼란만 가져올 것이다. 관찰은 바로 과학을 만들지 않는다. 이러한 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과학의 신봉자는 비이성적 광신도로 보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아주 빨리 수집되고 그 데이터를 다시 놀라온 속력으로 분석해 낼 능력없이는 망의 시대의 접근 방식은 별로 생산적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가능해져 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바로 알파고가 보여주는 미래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한 것이지만 우리가 이미 과도기적인 시대를 산다고 해도 본격적 망의 시대가 내년이나 10년뒤에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무인자동차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망의 시대가 본격화될 것이며 그 이전에도 사람들은 지속적인 변화의 압력을 받을 것이다. 본격적 망의 시대에는 오늘날 과학이 인간과 결합하여 인간이 과학없이 살 수 없듯이 망은 인간과 결합하고 인간은 그것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망과 결합한 인간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기적으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행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책을 쓴다던가 음악을 작곡하고 건물을 짓는 일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의 일을 망속의 인공지능이 저절로 처리하는 시대에는 하나의 영감이 구체적 실체로 만들어 지는 일이 거의 즉석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 시대에도 지금의 종교가 그러하듯 과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학벌을 따지지 않는 탈권위주의적 사회이며 교육비 걱정이 없는 사회다. 지식의 발전과 유행의 변화가 그냥 빠르다는 말정도로는 표현할 수 없이 일어나는 사회다. 우리는 이미 그런 시대에 진입했다.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버드를 다니다가 중퇴한 빌게이츠가 전세계에서 가장 부자인 곳이다.

 

알파고와 교육 3: 교육의 미래

 

모든 기관은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대개 자신의 존재이유를 키우려고만 할 뿐 그것을 스스로 제한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즉 망치를 일단 든 사람은 모든 일을 망치로 해결하려고 할 뿐 망치를 내려놓거나 연필을 든 사람이 일을 하도록 양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학교 개혁안은 학교가 받아들이기 참 힘든 것이다. 이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면 그것은 학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른 부분들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거나 학교가 자기가 할 수 없는 역할을 하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이 다른 분야들을 오히려 억누르기 때문이다.

 

학교는 과거와 미래가 가지는 차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다. 학교의 구조와 권위는 지식의 구조와 권위를 반영하여 만들어 졌다. 우리가 새로운 시대를 위해 학교를 개혁하겠다는 생각은 서양의 중세시절 종교를 가르치던 신학교나 조선시대의 서당이 과학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하겠다고 하는 생각만큼이나 무리일 수 있다. 나는 종교가 무익하고 무능하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학과 과학이 가지는 근본적 원리의 차이가 둘을 동시에 다루는데 있어서 충돌을 만들어 내며 따라서 그것을 하나의 기관에서 가르치려고 할 경우 얼마가지 않아 그 둘의 충돌을 완화하는 것에 모든 자원이 낭비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망의 시대에 어울리는 학교로 학교를 개혁하겠다는 생각들은 지금의 학교가 할 수 있는 것들만을 포기하는 일이 될 뿐 새로운 이득은 뭐하나 얻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학교와 교사는 권위를 잃어버리는데 그렇다고 학생들의 지식이 늘어나는 것도 창의력이 길러지는 것도 아닌 이상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공자 맹자나 가르치던 사람들에게 새로 수학과 영어를 배워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하면 교과과정이 어떻게 왜곡될까?

 

나는 지금 이순간에도 학교는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창의력같은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학교에 대한 오해일 수 있다. 학교는 애초에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라 그것을 죽이기 위해 만든 곳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키우기 보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답들을 머리속에 넣어주기 위해 만들어 진 대량생산을 위한 공장과 비슷한 곳이다. 그것을 위해 세상에 대한 지식을 여러개로 분류하고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구분을 만들고 우등생과 열등생의 구분을 만들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같은 등급을 만든 것이다.

 

이것을 절대 학교에 대한 비하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런 일은 그런 일의 가치가 있고 창의성의 가치는 때로 지나치게 과장된다. 우리가 과도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학교들을 다니면서 배울 수 있는 지식 체계는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것은 여전히 배울만한 가치가 있고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다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되었다. 언젠가 우리가 진짜로 강력한 인공지능 기계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오고 지금의 과학기술이 그러하듯이 그 인공지능과 우리가 뗄레야 뗄수 없는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될 때 지금의 학교는 지금의 신학교와 같은 위치로 변할 것이다. 즉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기관이며 미래를 열어간다기 보다는 특정한 수행의 전통을 지키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으며 여전히 학교가 가장 중요한 교육을 제공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학교도 자신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할 때 오히려 그들은 여러모로 실패할 것이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고 남의 일을 방해만 하게 된다. 기존의 학교는 많은 가능한 교육기관중의 하나로 남으려고 해야지 시대적 과업을 모두 해결하는 이 시대의 단 하나의 교육기관이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국의 대학교 교육이 지금의 고등학교식으로 간소화, 평준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평준화된 대학교 시스템에서는 졸업에 필요한 지식을 확보하면 그것으로 졸업 학력을 인정받는다. 일정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모두가 가까운 대학에 가서 강의를 들으면 되도록 해야 한다. 명문대와 비명문대의 구분은 필요없다. 평준화가 이뤄진 고등학교를 보라. 현재의 교육시스템이 인재를 골라내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 집착이 너무나 많은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다. 쓸데 없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고 있다. 대학졸업장은 운전면허증이나 컴퓨터 기사 자격증 같은 증명서이기만 하면 된다. 교육과정은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거나 더 새로운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간소화되고 더 중심적인 분야로 축약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초중고 단계도 마찬가지지만 대학의 개편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현재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큰 변화가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오랜 시간동안 개선되어온 것이다. 그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인재를 키운다던가 뽑는다던가 창의력을 키운다던가 하는 일로 쓸데없이 교과과목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님뿐 아니라 학생들을 큰 결과없이 괴롭히는 일만 된다. 더 필요한 교육은 학교 말고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 할 수 있도록 학교는 자신의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 특히 단순지식암기는 그렇다. 하지만 의무교육에서 강조했으면 싶은 것도 있다. 이와 같은 것들도 학교바깥에서 가르칠수도 있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우선 수학과 과학의 교육 그리고 고전 인문학 작품에 대한 소개는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폭팔의 시대에 오히려 보편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가치는 더욱 중요해 졌다. 비록 그런 지식들은 취업이나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데에는 큰 도움이 안될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이득을 주는 지식들이다. 하지만 당장 뭘 주는 것같지 않기 때문에 대개 자율적으로 학습하게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무교육에서 조차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들의 삶은 지나치게 흔들리고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기도 서로간의 소통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버릇들이기도 중요하다. 무엇을 읽을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은 두번째 문제다. 일단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긴 글도 읽는 버릇이 있으면 관심있는 것들을 계속 읽어서 배울 수 있을 것이고 쓸 수 있으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어릴적에 의무적인 교육으로 버릇을 들이지 않으면 영영 재미를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무슨 명작을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쓰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은 내적인 일관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망의 시대에 자기를 지키는 것은 꼭 필요하므로 쓰기를 어느 정도라도 시키는 것이 옳다.

 

마지막으로는 가난한 삶 혹은 최소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자동차에 의존하는 것이 우리의 다리를 약하게 하고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것이 아이들의 정신을 약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과학과 정보기기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최소한의 것을 가지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과도한 물질적 풍요가 학생들의 삶을 쓰레기통처럼 만드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학교가 그 역할을 감소시킨다면 사교육비가 증대되는등 사회적 부작용이 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별도의 공공기관들을 만들면 될 것이다.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학교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시대의 논리를 반영해야 한다.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지식에 의존해서 풀었고 따라서 학교는 지식의 구조를 반영했다. 학교는 기본적으로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전체 지식 시스템을 전문분야로 분류한 구조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훨씬 더 즉흥적이며 기존의 지식분야에 대한 분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그것은 공학이나 철학같이 이미 있는 학과의 구분을 가지고 있지 말아야 한다. 이미 학제간연구가 필요한 뇌과학과 같은 분야의 연구는 바로 전통적인 학과구분때문에 한국에서 제대로 연구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분야에서 그럴 것이다. 따라서 학과분류에 얽매일 때 남는 것은 매우 시대에 뒤진 연구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대학이 되는 것뿐이다.

 

또한 이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어떤 고정된 과정을 고정적으로 가지고 한번 만들어지면 십년이고 백년이고 존재하면서 졸업생을 배출해서 학연을 만들어 주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는 평가도 없고 따라서 학점도 없으며 졸업장도 없다. 새로운 교육기관들은 그때 그때의 질문에 대해 여러분야의 사람들이 참석해서 토론하고 답을 찾는 워크숍이나 하나의 주제에 대해 어떤 사람이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TED강연 같은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교육이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모여서 여는 문제풀이 모임같은 것이다.

 

전통적인 학교교육은 분류된 답들이 중심이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그 답들을 쓰게 될지 모르는채 최대한 많은 남의 질문에 대한 답들을 외운다. 또 시험이나 연습시간에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계속 해서 푼다. 새로운 교육은 질문 중심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질문이며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게 뭐라고 부르는 것이든 상관없다. 게다가 심지어 답보다 질문이 더 중요하다. 제대로 된 질문을 가지게 된다면 답은 언젠가 나오게 되거나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질문이 올바르지 않으면 답이 아무리 멋져도 실상 쓸모나 의미는 별로 없다.

 

사회가 지원해야 하는 것은 도서관이나 논문 서비스같은 정보분야의 지원과 장소나 조직분야의 지원일 것이다. 그런 서비스속에서 학생들은 마치 어린 시절부터 벤쳐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들처럼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을 내고 그것을 키워서 더 또렷한 답으로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장소가 아니라 자유로운 협업을 통해 배우고 실제적 성과를 내는 장소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교육기관은 사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실은 이것이야 말로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대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백년 이상전의 과거에, 언젠가 유럽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던 대학, 아직 전문화의 피해를 받지 않았던 대학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돌아가고 싶은 대학이다. 즉 대학을 제대로 개혁하면 우리는 학교라는 틀 안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을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프랭크 도나휴는 최후의 교수들이라는 책에서 미국대학의 실상을 그리고 오찬호는 진격의 대학교에서 한국대학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대학의 현실은 그런 이상과는 이미 한없이 멀어졌다. 미국과 한국에서 대학들이 가지는 문제는 당연히 같지 않고 한국의 그것이 더 나쁘지만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결국 대학이 댓가를 바라는 돈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대학은 기업화되어가고 학문은 세속화되었다. 요즘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학문이 이상을 위한 것이 아닐 때 그것은 이미 말기적인 것이다. 지식의 최전선이나 앎과 무지의 경계에 서는 게 아니라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학은 취업을 위한 지식과 기술을 배우는 곳이 되었다. 대학에는 분명 그렇지 않은 역할과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이 취업학교라는 부분과 아주 위선적인 동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교육적 측면에서건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조건에서건 모순은 누적되었다.

 

등록금은 한없이 비싸지는데 그들이 받는 교육의 가치는 의문시되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상당수가 계약직 강사로 고등학교 선생님보다 노동조건이 나쁜 상황인 것이다. 교수들도 논문을 생산하는 기계이며 여러가지 관리 업무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종신재직권을 얻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교수가 되기위해 대기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더 그렇다. 기업이 직원을 써서 일하는 것보다 대학원생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더 싸다는 것이 대학이 존재하는 한가지 이유일지 모른다.

 

오찬호는 대안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도나휴는 두가지 조언을 한다. 하나는 대학교육에 대해 대중이 가지는 과도한 기대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도나휴는 대학교육은 사상의 차원에서건 돈을 버는 방법의 차원에서건 그렇게 엄청난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라고 말한다. 또하나는 대학노동의 실상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고강도의 노동착취를 당하면서 하버드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명예에 빠져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물론 모든 것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으며 대학은 그 안에서 일하는 훌룡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좋은 일들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과 학계는 너무나 비대하고 복잡해져서 마치 망하기 직전의 대제국을 연상시킨다. 사회적으로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이 지불되고 있는데 그 내부적 복잡함과 전통적 권위에 대한 허영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껍데기는 화려한데 속은 이미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도나휴는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교수라는 것은 이미 멸종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대학 시스템은 그저 어떤 일들이 좋아서 하고 있는 사람들의 평등한 동호회라기 보다는 상당 부분 이익과 형식맞추기를 위한 것이 되었다. 이것은 미국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인 한국에서 그 폐해가 훨씬 심각할 수 밖에 없다. 자기의 관심에 따라 자유롭게 사고하기 보다는 그저 시스템이 시키는 일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만이 살아남을 때 과연 전체적으로 지식의 발전이라는 것이 더 빨라질까? 논문 인플레이션은 점점 심해져왔고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왜냐면 논문을 요구하는 것이 시스템이고 논문을 써야 살아남는 것이 학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진짜 가치있는 생각을 할 여유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대학은 이미 내가 앞에서 말한 과학기술을 가르치는 연구중심대학이 되려는 신학교처럼 내적인 모순에 그 에너지를 상당부분 낭비하고 있다. 

 

오늘날 사업분야를 보면 인터넷을 통한 여러가지 서비스들이 순간적으로 결합되어 새로운 비지니스가 탄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결제 시스템이나 택배시스템같은 것들이 이미 따로 존재하므로 그런 것들을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와 순간적으로 조립하여 새로운 비지니스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비지니스의 여러 부분들을 아웃소싱해서 새로운 비지니스를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력으로 만들어 낸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꿈꿔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은 한 중학생이 자신이 꿈꾸는 주택을 이야기하자 그 아이디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클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으고 업자가 고용되고 실제로 집이 지어지는 꿈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생기는 이득이 자동적으로 분배되고 참여한 각자의 이력서는 자동으로 갱신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물론 꼭 주택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제를 해결한다던가 순수히 돈을 벌기 위한 제품 판매사업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할 때 여기서 사람들은 경쟁하기 보다는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중학생이 상하수도 배관이나 금융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사실은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참여할 이유가 될 뿐 그 중학생이 비판받을 이유가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런 식으로 집이 지어지는 것이 이뤄진다면 그 중학생은 물론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런 경험이 많이 쌓이면 그 중학생은 훨씬 더 대단한 건물을 설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진학상담교사의 진로상담이란 필요없는 것이 되거나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 시대는 학교를 졸업하면 뭘 할 수 있는가를 상담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있는 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하는 시대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망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떤 학교를 졸업하거나 어떤 직위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주 어설프고 부분적인 아이디어라도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상당 수준까지 진행해보거나 심지어 마지막 단계까지 실행해 볼 수가 있다. 망속에서 제품디자인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3D프린터로 출력되는 미래는 멀지 않았다. 그리고 미래의 교육이란 바로 그런 실행 그 자체다. 이것은 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알파고 시대의 미래 교육이다. 물론 그때가 본격적으로 올 때까지 우리는 어설픈 과도기도 열심히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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