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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전주 생활

전주 신시가지의 비밀공간과 설계의 실패

by 격암(강국진) 2019. 3. 29.

해리포터에 보면 일반인들은 볼수 없는 비밀의 골목이 나온다. 그 골목안으로 들어서면 마법의 거리가 나오거나 마법의 기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도 그런 곳이 존재한다. 비록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있는 그런 골목들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해리포터의 상상력도 어쩌면 도시계획의 실패에서 나온 버려진 공간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는 전주 효자동 3가의 일대는 조금 특이하게도 4층 원룸의 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맨 윗층은 가장 큰 주인세대라고 해서 베란다와 옥탑층을 가진 복층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아래 층들은 크고 작은 세대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은 방하나짜리 원룸이고 큰 것은 방이 두개에 거실이 따로 있는 쓰리룸세대도 있다. 이런 건물들이 이 일대에는 천육백채나 있다고 들었다.  




이곳에는 이런 건물들이 바둑판 모양으로 늘어 서 있는 가운데 길들이 나 있는데 아래에 언급할 십자로 난 사람전용길 두개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길은 인도가 없는 2차선 차도다. 이렇다 보니 차도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이 차도를 그냥 인도처럼 걷는다. 이건 그냥 골목길이지 이걸 차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일전에 우리 집앞에서 나를 추월하려는 택시와 접촉사고가 났을 때 경찰이 와서 중앙선 침범 운운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런 말에 어이없어 했는데 사람들이 중앙으로 걸어 다니고 차도 중앙선 침범을 안하는 것이 불가능한 골목길에서 사고가 나니까 중앙선 침범때문이라고 하면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게 진짜 차도라면 이 동네 사람들은 모두 무단횡단하지 않고는 집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현실과 법은 이렇게 큰 괴리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주택단지에도 인도가 있기는 있다. 일단 각 블록마다 어린이 놀이터 공원이 하나씩 만들어져 있다. 그것은 외우기 쉽게 효자 3호 어린이 공원같은 식으로 이름이 지어져 있는데 그러니까 이런 공원이 1호에서 7호까지 여기 저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로 확인해 본 결과 이 공원들을 중심으로 십자의 보도전용도로가 나 있다. 그리고 이 도로를 제외한 모든 도로는 인도가 없는 2차선 차도다.


효자3호 어린이공원 주변의 블록길이 유일한 보행자전용 길이다.


아마도 여기 주택단지를 설계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차를 피해서 어린이 공원에 접근해야 하므로 유일한 보도를 어린이 공원 주변에 설치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이 어린이 공원으로 가는 보도가 바로 내가 말한 신비한 비밀공간이다. 나는 벌써 여기에 4년 이상이나 살았는데 이 길을 제대로 본 것은 아주 최근의 일로 일부러 의지를 가지고 찾지 않으면 눈치를 채기 힘들정도로 숨겨져 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보행자 전용길이 있기는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 이유는 사진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길의 현황은 이렇다.



이 길들은 그렇게 좁은 길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거의 아니 전혀 다니지 않는다. 그나마 이게 낮에 찍었기에 이렇지 밤이면 이 길을 가고 싶어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다. 일단 닭이 먼저 인지 달걀이 먼저 인지 모르겠지만 그 길의 입구를 차와 쓰레기 수거함이 막고 있어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를 잘 인식하기가 어렵다. 언뜻 보면 그냥 남의 집 주차장의 일부같다. 게다가 깨끗히 청소된 차도쪽에 비해 이 보행자 길은 쓰레기로 채워져 있고 중간 중간 정말 차로 채워져 있다. 이러니 이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 길의 존재를 알아챈 이래로 이 단지를 설계한 사람을 정말 많이 욕했다. 공원도 별 쓸모가 없지만 그곳으로 가는 이 길도 정말 말도 안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그렇게 좁지는 않지만 이 길 양 옆으로 세워진 건물들이 이 길쪽으로 입구가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창도 없다. 그것만으로도 이 길은 으슥한 느낌이 들 수 밖에 없는데 거기에 쓸모없는 가로수들을 심어서 시야를 가리게 만들어 놓았다. 덕분이 이 길은 훤한 대낮에 걷기에도 왠지 기분이 껄끄럽다. 이곳이 우범지대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 이 가로수를 전부 제거하고 군데 군데 벤치라도 가져놓기만 해도 이 길은 길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할 것이다. 


법에 따르면 사람은 인도로 다녀야 하고 차는 차도로 다녀야 한다. 그런데 인도도 만들지 않고 모든 골목길에 떡하니 중앙선 차선까지 잘 그어놓았다. 이 말은 차들로 하여금 이 인도도 없는 골목길에서 여기는 차도니까 쌩쌩 달리라고 하는 말이다. 


그나마 약간 있는 공용공간이며 길인 보행자전용길과 어린이 공원을 보면 그걸 살리기 위한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원이 공원같으려면 단순히 그 공간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상가같은 다른 시설도 있어야 매력이 있을 것이다. 어린이 공원으로 가는 길을 이왕 이 주변의 유일한 차없는 길로 만들고 싶었다면 그 길을 매력적이게 만들어야 했었다. 그랬다면 아이들이 그 길을 오고갈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 길 자체를 일종의 광장이나 놀이터처럼 썼을 것이다. 이왕만들려면 길은 좀 더 넓어야 했고 벤치나 평상같은 시설도 있으면 좋았을 것이고 무엇보다 다른 건물들로 통하는 입구가 어느 쪽으로 생기는지, 그 길위에 상가는 좀 있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덕분에 차없이 다닐 수 있는 유일한 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주 비밀의 공간이 되어 버려져 있다. 차도는 깨끗한데 그곳은 더럽다. 지금도 아이들은 차가 달리는 길을 따라 걸어서 초등학교에 등교한다. 아마 그 아이들도 그 아이들의 부모도 이 근처에 이런 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것보다는 더 깊은 생각을 가지고 단지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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