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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스토리 텔링과 한국의 집

by 격암(강국진) 2019. 4. 22.





지난 번 두 번의 녹음을 통해서 저는 한국의 주거문화가 시대의 변화를 쫒아가고 있지 못하는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주제들은 각각 사생활이란 면과 공동체 기능이었죠. 오늘은 세번째로 스토리텔링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현대 한국의 주거문화에 대해서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면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생활의 질을 따지는 시대에 집은 이야기로 짓는가 아니면 법칙으로 짓는가?


이 질문을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저는 우선 한 건축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건축가의 이름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로에입니다.  이 사람은 1886년에 태어나서 1969년에 사망했는데 본래는 독일 출생으로 나중에는 미국에 건너가서 활발히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의 학장이었고 미국에서는 일리노이 공대의 학장을 역임햇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로 철근 콘크리트 건물을 퍼뜨린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소위 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로 그가 한 유명한 말에는 더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기능을 알 수 없는 전통적 구조물같은 것을 싫어했다는 말이죠. 




이 사람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보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가 만든 대표작들의 사진을 보면 됩니다. 제가 보여드리는 것은 두 개의 건물인데 하나는 1930년에 체코에 세워진 빌라 투겐트하트이고 또 하나는 1958년에 미국에 세워진 시그램 빌딩입니다. 이 두개의 사진을 보면 우리는 이게 21세기에 지어진 건지 백년전에 지어진 건지를 알기가 힘들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르 코르 뷔지에와 함께 미스 반데어 로에는 오늘날 전세계를 채운 모더니즘 건축을 널리 퍼뜨린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도 이 사람의 대표작과 비슷한 건물들이 가득합니다. 미국은 특히 모더니즘 건축을 좋아했는데요. 저는 그게 아마도 미국이 역사없는 나라라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에 뿌리를 둔 미국이 역사를 따지기 시작하면 결국 그건 유럽에 대한 종속이 되거든요. 하지만 모더니즘 건축은 역사가 없지요. 깔끔합니다. 그걸 미국 사람들은 좋아했을 겁니다.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그래서 모더니즘 건축을 보면 과학을 생각하게 됩니다. 모더니즘 건축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역사성과 지역성이 없습니다. 뉴튼의 중력법칙이 런던이나 서울에서 다 똑같이 옳은 것처럼 모더니즘 건축은 객관성을 추구합니다. 예를 들어 기하학적 비례라던가 집의 기본적 기능같은 것이 그렇습니다. 모더니즘은 과학적 법칙처럼 역사성과 지역성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오늘의 녹음에서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한국을 아파트로 꽉 채운 한국인들은 이런 면에서 보면 가장 충실한 모더니스트입니다. 사실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때로는 한국에서는 이게 왜 이럴까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테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군사독재정권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군대라는 조직은 질보다 양이고 물질적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한국인들은 계속 군대막사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도 큰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기 보다는 법이 다스리는 나라였습니다. 왕도 유교적 논리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조선시대부터 한반도에 살 던 사람들은 모더니스트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유달리 거대한 시스템을 좋아합니다. 다양성은 배척되고 보편성이나 객관성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거대한 시스템에다가 모두를 전부 다 집어넣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좋아합니다. 종종 사람들이 군대에서처럼 일사분란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모더니즘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모더니즘은 과학의 법칙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모더니즘은 사실 정확히 말하면 과학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엉터리 경제학 이론을 맹신하는 것처럼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신에 가깝습니다. 전에 설명드렸습니다만 바로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썼죠. 칼 포퍼가 강조하듯이 과학이 과학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과학적 가설을 내놓을 때 그게 옳은지 아닌지에 대해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통상 과학으로 여겨지는 분야조차도 이 검증은 한계가 있는데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오면 실험과 검증은 불가능하거나 시간이 아주 오래걸립니다. 그러니까 집이란 이렇게 지어야 한다. 토목공사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해도 그 생각이 진짜로 옳은지 아는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실은 영영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당연하고 그럴듯해 보여도 사실 증명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모더니즘은 결국 과학인 것이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도한 믿음 즉 광신이 되기 쉬운 것이죠. 그래서 모더니즘이 위험한 것입니다. 


모더니즘의 두번째 문제점은 거대한 확신은 거대한 실패를 만든다는 점입니다. 모더니즘적인 것도 그 규모가 작을 때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확신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수정불가한 결과를 만들고 거대한 피해를 남길 수 있지요. 그야말로 거대한 확신이 거대한 실패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의 이런 위험을 경고해서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블랙스완과 안티프래질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쓰고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예언했던 나심 탈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해도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면 예상바깥의 문제가 생기고 그것이 큰 문제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시스템이 너무 크니까 그 피해도 엄청나고 고치기도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티프래질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에 그 내용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으니까 그걸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또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도 여러번 소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짧게 말씀드리면 그 답은 한마디로 베이지안의 방식으로 사고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지금 서있는 여기에서 출발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라는 겁니다. 보편성과 객관성에 너무 빠지지 말고 이성의 한계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특별함과 자신의 역사를 소중히 여기라는 겁니다. 우리의 선입견과 특이함이 바로 우리의 약점인 동시에 우리의 강점이고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모더니즘의 문제점으로 마지막에 말씀드릴 것은 저질의 생활입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법칙으로 말하면서 꼭 기억하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모더니즘은 역사성과 지역성이 없다는 말이었죠. 그런데 우리가 뭔가에 의미를 부여하고 뭔가를 느끼는 것은 상당부분이 바로 그 역사성과 지역성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즉 집으로 예를 들어 말씀드리면 이 집이나 이 집의 스타일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집은 다른 집과 뭐가 다른가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그 집에 대한 체험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10억짜리 집은 2억짜리 집보다 5배가 좋다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으로는 진정으로 높은 생활의 질이 나오지 않거나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왕이 먹던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은 것은 단순히 음식의 맛때문이 아닙니다. 왕이 먹었던 음식이라는 역사성과 지역성을 주는 이야기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로 스토리텔링이죠. 스토리텔링이란 혹은 이야기란 바로 체험입니다. 


스토리텔링이나 생활의 질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것을 부자들의 사치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까지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은 여행도 유행이 바뀌고 있습니다. 전에 처럼 패키지 여행가서 숨가쁘게, 최대한 많이 보는 여행이 요즘은 인기가 줄었습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 그림 5초동안 보고 박물관을 떠나는 식의 여행은 이젠 인기가 없다는 겁니다. 한국사람들이 좋아하는 여행이 무조건 그냥 많이만 보는 여행에서 깊이 있게 보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5개를 본 여행이 2개를 본 여행보다 좋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이미 양적인 것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또 우리는 미디어의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상극이랄 수 있는 것이 바로 로맨스입니다. 사회가 객관성을 강조하고 비개인화될 수록 사람들은 사랑의 체험에 더 목말라 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는 유독 사랑이야기로 채워지는 일이 많습니다. 메디컬 드라마도 법정드라마도 모두 사랑 이야기가 되고는 하는 일이 많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파트의 나라인 한국에서 만드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특히 사랑 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파트가 얼마나 나오는지. 요즘 드라마에서 부자는 단독주택이나 저층고급빌라에 살고 가난한 주인공은 옥탑방에 삽니다. 아파트는 실종되었습니다. 아직은 스크린 안에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아파트는 이미 보기도 싫은 주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아파트를 고급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사방에서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게 왜 그런지. 그것과 모더니즘은 어떤 관계가 있을것인지. 그리고 그렇게 변한 세상에서 과연 우리의 주거는 어떻게 변하게 될런지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집은 이야기로 짓습니까 아니면 법칙으로 짓습니까?


우리가 가치를 따질 때 단순히 양적인 것에나 신경쓰고 있는 것은 사는 건 그저 배부르고 등따스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쌀밥에 고깃국먹는 것이었던 시절에는 이게 맞는 말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생활의 질을 따지는 시점이 되면 이제 이야기가 전혀 다릅니다. 제가 말하는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은 곧 체험입니다. 즉 우리가 뭔가를 느끼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체험이라는 것은 환상같은 면이 있습니다. 그것의 상당부분이 주관적이고 관념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을 볼 때도 건폐률이나 용적률이 어떻고 녹지 면적이 어떻고 하는 것은 기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건 어떤 때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서울의 집값을 뉴욕이나 런던과 비교하면서 서울의 집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몇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를 이야기하는데도 용적률과 건폐률이야기만 하는 것도 여러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공원같은 집이 좋은거라면 왜 서울에 살까요? 강원도 산골에 살면 다 녹지이지 않습니까? 뉴욕이나 런던과 서울집값이 비슷해야 한다는 것은 서울이 한때 세계의 경제수도였던 뉴욕이나 런던이 가지는 역사와 의미를 비슷하게 가진다는 뜻도 되는거 아닐까요? 예를 들어 얼마나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가 뉴욕이나 런던을 배경으로 했습니까? 또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왜 집값이 싼 외국으로 이사가지 않습니까? 동경의 집과 어디 가난한 아프리카의 집을 비교하면서 건폐율 따져서 아프리카에 있는 집을 가지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있습니까? 


요즘 한류열풍이 있어서 외국인들이 한국에 관광오는 일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보고 체험하는 것은 건폐율과 용적률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화나 드라마속에 있던 나라를 직접 본다는 것이 즐거운 것입니다. 한국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유명한 배우나 정치인 혹은 재벌 가문에서 어떤 지역에 부동산을 사면 그건 큰 화제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한국 사람들이 돈과 유명세가 모이는 곳에 가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대주택 사는 사람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어디 용적률과 건폐률이야기가 있습니까? 이 모든 사고방식은 150억에 팔린 미국의 옛날 책 한권을 그저 종이더미로 보는 관점입니다.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으로 세상을 보는 나머지 앞에서 말한 체험을 잊어버린 겁니다. 스토리텔링은 체험입니다. 이야기는 체험입니다. 


저는 미국의 뉴욕 맨하탄에서 4년간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그 거대한 미국이 실제로는 텅 빈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미국이 역사가 짧아서 그렇습니다. 미국인디언의 역사는 미국에서 거의 느껴지지가 않으니까요. 물론 미국은 엄청나게 큰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멋진 곳들의 사진들을 모아서 보면 미국이 멋진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인이 거기에 살아보면 그 멋지고 좋은 것들은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멋진 것이 하나 있나 싶으면 다음 번 멋진 것은 천킬로미터쯤 바깥에 있는 식입니다. 


결국 한 나라를 채우는 것은 이야기고 문화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사는 것과 유럽에 사는 것은 체험이 크게 다릅니다. 한국은 어딜가나 오래된 인간의 역사와 문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산에 갈 때마다 한국같으면 이 산밑에 동동주와 파전을 파는 집이 있을 텐데 여기는 참 가게가 드물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했습니다. 한국에 살 때는 그런게 축복인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길고 풍부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는데 20세기 내내 그걸 다 지우고 무시하는 모더니즘에만 몰두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동네가 왜 효자동인지 왜 반포인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가진 집과 마을을 꾸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제가 보기엔 그건 보물을 가진 사람들이 그걸 싹 불질러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수천년에 걸쳐서 우리의 선조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가난해도 나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다시 말해서 값싸게 생활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는데 그걸 다 가져다 버리는 겁니다. 


이야기가 있는 집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전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기 두개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하나는 프랑스에 있다는 아파트입니다. 저기에 실제로 살아본 적은 없으니 이 아파트가 좋다나쁘다를 말할 수는 없지만 저는 사실 이 사진을 처음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아파트를 보면 제가 옆에 보여 드린 여수의 산동네 사진과 비슷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파트인데도 집의 위치가 의미가 큽니다. 단순히 높이 뿐만 아니라 전망이나 크기가 다르니까요. 그래서 네모난 아파트보다 서로가 서로의 집을 궁금하게 여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다양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나름 댓가를 치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야기가 있는 집이란 이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집들이 위치가 서로 다릅니다. 역사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른 개성을 가졌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군대막사같은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조건으로 똑같이 생겨서 똑같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사는 사회가 멋지지 않습니까? 물론 이야기가 있는 집이란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성의 존중과 다양성이라는 문제를 빼고는 이야기가 있는 집은 만들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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