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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장자의 도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9. 5. 24.

19.5.14

제가 어릴 적에 도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말처럼 신비한 말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장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불교에서 문답을 나누는 것을 보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많았는데 도를 깨친 사람이 그걸 들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안다고 해서 나도 도를 깨쳤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럴 때 도란 저에게 있어서 매우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으며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어떤 슈퍼파워가 생기게 되는 마술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장자의 제물론을 중심으로 이 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장자에 도라는 말은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제물론을 생각해 봅시다.  제물론의 9번째 구절에 보면 '도가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긴 것일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제물론의 10번째 구절에는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라고 한다'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12번째 구절에도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는 말이 있고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라 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도란 뭘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도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아니 애초에 과학의 시대에 도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이거 비과학적인 미신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제물론의 주제가 뭔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장자 전체의 중심주제가 그러합니다만 제물론은 더욱 더 우물안 개구리식의 관점을 멀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물론은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 자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뒤에 말하는 자기란 이 사람의 이름입니다. 자기가 말하기를 사람이 피리를 불면 소리가 나고 세상에 바람이 불면 땅에서 소리가 나듯 만물의 움직임이란 하늘이 부는 퉁소소리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관점이 강조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마음이 슬픈 것은 당신의 문제고 내가 기쁜 것은 나의 문제이며 산에 꽃이 피는 것은 산에서 일어나는 분리된 현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기서 하늘로 말해지는 하나의 원인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다 연결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피리를 불 때 피리의 첫번째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나 두번째 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나 모두 한 사람이 불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을 제물론의 6번째 구절에서는 참주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전의 동영상에서 장자의 문제의식이 사람들이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자신들을 좁은 영역에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제물론에서 나오는 말도 만물이 이렇게 다 연결되어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임의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나누고 우물안 개구리 같은 눈으로 본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일단 우리가 어딘가에 테두리를 긋고 경계를 정하면 즉 우리가 우리의 우물을 정하고 나면 그 우물이 작으면 작을 수록 우리의 눈에는 시비가 더 분명히 보이게 되고 크고 작음을 더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큰게 뭔지 넓은게 뭔지 높은게 뭔지를 확실히 이야기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잘버는 남편이란 이웃집 남편보다 돈 잘버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달에 10억을 버는 남자라고 해도 그 이웃에 천억씩 버는 부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가난뱅이에 불과합니다.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원이 이백평이나 되는 단독주택에 사는 사람은 매우 부자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처럼 넓은 땅의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땅은 땅으로 쳐주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테두리와 영역에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런 테두리를 가지게 됩니다만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유한성을 논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작은 영역에서 많은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는 게으르고 그렇게 사는 게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금방 단순해 지고 우리 주변의 것들은 금방 원래 그런 것이 됩니다. 너무나 못난 사람이 잘났다고 생각하며 살기도 하고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살기도 합니다. 다 자기 주변만 보기 때문입니다. 

 

장자가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이런 경계에 갇히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고 설사 그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즉 우리 스스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경계안에 있는지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 어떤 경계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경계를 모두 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계를 봤다는 것은 이미 그 경계의 바깥도 느꼈다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그 경계를 넘어섰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그 경계안에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의 세계는 이미 새로운 경계를 가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작은 경계가 우리를 속박하지 못하게 해야 하지만 그런 노력을 열심히 해도 어딘가에는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경계가 존재하며 그것들이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눈에 크고 작은 것으로 보이는 것, 비싸고 귀한 것으로 보이거나 싸고 천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이 경계의 영향입니다. 인간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무한의 경지 즉 그런 경계를 전혀 가지지 않는 경지에서 보면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의는 암묵적으로 어떤 사회나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심코 개미를 밟아죽여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집단학살자로 처벌받지 않는 것입니다. 

 

장자는 제물론에서 조삼모사의 이야기로 이 시야의 문제를 논하기도 합니다. 좁은 시야를 가진 원숭이는 아침에 세개 저녁에 네개를 받는 것이 그 반대로 받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좀 더 넓은 시야로 보면 그건 그냥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제물론의 22번째 구절에 보면 사람의 입장, 미꾸라지의 입장, 원숭이의 입장, 순록의 입장이 모두 다 다르지 않냐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좋니 나쁘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이 모두 이 경계와 시야의 영향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 싸고 있지만 우리가 볼 수 없는 이 경계의 바깥에 있는 것, 우리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세계를 포함하는 세계전체를 말할 때 우리는 어떤 말을 쓸까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도입니다. 도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것, 세계 전체라고 말해도 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면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의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가 모든 것이라고 말하면 그걸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건 도가 아닙니다. 그건 우물안에 있는 모든 것이고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우리의 상상력 안에 있는 모든 것이며 우리가 개념이며 이름으로 이미 파악한 모든 것입니다. 

 

도는 진정한 모든 것이기 때문에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도를 깨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도를 깨친다는 것 혹은 득도를 한다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고의 경계가 넓어진 것을 득도한 것으로 말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는 이런 것입니다. 뉴튼의 고전역학만을 알고 있던 19세기의 사람들에 비하면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으로 그 한계를 넘어선 20세기의 과학자들은 도를 깨친 사람들입니다. 도를 논한다고 해서 그것에 비과학적이거나 시대에 뒤진 것은 없습니다. 19세기의 사람들에게 20세기 과학의 이야기는 허황된 허풍같겠지만 그것은 장자의 언어로 말하면 그들이 도를 깨치지 못해 진인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세기가 되면서 장자의 시각은 더 빛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저는 나심 탈렙의 책 블랙스완이나 안티 프래질을 소개하면서 그의 사고방식은 현대판 노장사상에 해당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카오스 이론이라던가 정보량의 폭발같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 예측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통계학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베이지안의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을 것입니다. 베이지안의 관점도 결국 우리의 무지를 적극적으로 인식하는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철학자 칼 포퍼도 그의 자서전에서 지혜는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을 기억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노장의 지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도를 논하지 않아도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겸손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같은 지혜를 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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