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求道 : 슈뢰딩거의 길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19. 12. 13.

오늘은 파동양자역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있는 어윈 슈뢰딩거가 쓴 에세이, 길을 찾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해보겠습니다. 1925년에 쓰여진 이 에세이는 과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그 주제로 합니다. 그렇게 길게 나오지는 않지만 중간에 인도의 베단타철학이나 불교 이야기도 나옵니다. 과학적인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따지고 보면 그 몸통은 형이상학입니다. 




그런데 먼저 정리를 해 봅시다. 형이상학과 과학은 뭐가 다를까요? 과학과는 달리 형이상학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논리적으로 유도하고 사실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이상학은 과학을 포함해서 우리 사고의 기초가 되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겁니다. 마치 종교처럼 말입니다. 

아. 그런데 이쯤 되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에 흥미를 잃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이 확실한 사실들에만 가치를 둘 것을 교육받았습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은 모두 헛소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것이 슈뢰딩거가 과학적 물질주의라는 지금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말하는 첫번째 내용입니다. 이따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믿음이나 우리의 의지는 중요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이 중요하다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가진 형이상학의 결과입니다. 

일단 형이상학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말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는 뭐든지 맘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형이상학에 있어서도 논리나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슈뢰딩거가 에세이를 쓸 필요도 없었겠지요. 

형이상학은 말하자면 사고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일단 우리가 출발점을 가지게 되면 그 논리적 결과가 나오게 되죠. 마치 수학에서 공리가 있으면 거기에서 정리를 증명해 내듯이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뭔가를 믿거나 가정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어떤 논리적 결과들이 나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결과들이 만족스럽게 세상을 설명하는지, 말도 안되는 결과가 혹시 나오지는 않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을 바꿀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설명이나 분석이 어떤 형이상학을 완전히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많은 과학적 사실과 논리가 등장하는 이 에세이에서 논리는 그 본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슈뢰딩거는 논리는 문제의 일부라고까지 말합니다. 하나의 형이상학을 믿게 된다는 것은 사실과 논리를 총동원해도 결국은 어떤 비약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글의 거의 처음부분에서 철학적 경이라는 말을 꺼냅니다. 

중요한 것은 거대한 설산이나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서 가만히 앉아 있을 때 나와 이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나와 역사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고 믿게 되는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가 믿어왔던 어떤 생각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과학적 물질주의같은 것이 얼마나 터무니 없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논리적인 분석은 이를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합니다. 준비가 안되면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준비가 되었어도 뭔가를 느끼고 깨달아야 하는 거지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껴야 하는 겁니다. 슈뢰딩거는 그게 바로 철학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슈뢰딩거가 하는 말의 일부는 언뜻 들으면 황당하고 종교적이고 추상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당연하고 생생한 현실이라고 믿는 그 어떤 것은 그럼 황당하고 종교적이며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럼 과학적 물질주의라는게 뭐고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에 대해서는 지난 번 녹음에서 좀 더 길게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보다 짧게 말해보자면 과학적 물질주의는 우리가 모두 서로 갈라져 있는 존재라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물질이 있고, 여러 사람이 있으며 따라서 여러개의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죠. 이는 사실 오늘날에도 거의 상식으로 통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슈뢰딩거는 이 믿음은 철학적인 문제를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최소한 흄이나 버클리이래로 사람들은 우리가 보는 세상이라는게 사실 세상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꿈을 꾸면 어떤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면 그게 실제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생각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죠. 문제는 우리가 깨어있을 때는 상황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사실 우리가 인식한 것입니다. 즉 우리의 머리가 감각신호들을 해석한 결과들이죠. 그 신호들 자체는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것입니다. 뜨겁다는 감각이나 소리가 시끄럽다는 느낌은 우리가 그 감각신호들로부터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나옵니다. 만약 이 세계에 나 말고 수많은 의식을 가진 다른 존재들 그러니까 다른 인간들이 있다면 우리는 왜 세계를 똑같이 인식하냐는 것이죠. 이 세상에 객관성이라는 것이 있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이 잠을 자고 있는데 모두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이야기처럼 황당한 거 아닐까요?

게다가 슈뢰딩거는 왜 한 명의 인간만 의식을 가지냐고 묻습니다. 한 명의 인간 안에 몇 개의 의식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왜 우리 몸속의 세포들은 모두 각자의 의식을 가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으로 이뤄진 사회도 의식이 없고 인간 몸속의 세포들이나 장기들도 의식이 없는데 딱 인간 한명이라는 단위가 되면 의식 하나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냐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 그러니까 여러개의 의식이 존재한다는 믿음과 감각신호의 해석에 대한 관념론적인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우리가 세상을 의미있게 바라 볼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 보입니다. 하나는 신같은 이해불가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겁니다. 아니면 그냥 신도 없이 독단적으로 본래 우리는 똑같은 꿈을 꾼다고, 즉 객관적으로 똑같이 세상을 인식한다고 선언해 버리는 방법입니다. 독단에 독단을 계속 더하는 겁니다. 

슈뢰딩거는 그래서 사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일종의 일원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이 볼 수 있는 유일한 합리적 대안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과학적 물질주의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스스로가 대단한 과학자였지만 현대 과학의 기초가 되는 형이상학도 비판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지난 시간에 소개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이라는 형이상학도 그래서 이 다원성내지 분리되어 있음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안에서 우리는 모두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이 서로가 서로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슈뢰딩거의 입장에서건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안에 혼자 있는 존재같은 것은 결코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사회속의 사람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믿을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모두 서로 따로 떨어진 존재이지만 객관적 세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이제 그 객관적 세계라는 것에 억압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연결되어진 단 하나의 의식이라면 그 단하나의 의식이 가지는 역할은 큽니다. 여러분이 꿈을 꾸면 그게 좋은 꿈이건 나쁜 꿈이건 그 꿈을 꾸게 한 것은 여러분의 두뇌이고 생각이죠.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 하나의 의식이라면 이 세상이 지금 이런 것은 우리의 의지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독단적으로 선언하고 다수의 의식을 인정하면 이제 그 객관적 세계와 다른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그냥 무의미한 겁니다. 사실 의식따위가 세상에 하나도 없어도 그 객관적 세상은 관객없는 드라마처럼 계속될겁니다. 

사실 과학계 내부의 일이기는 합니다만 객관성을 가장 강조하는 과학은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입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과학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면서 병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나가 맞으면 다른 과학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래서 철학자 포퍼는 어떤 이론은 반증가능하지 않으면 과학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들이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이데올로기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극단적으로 싸우게 됩니다. 이 세상에 과학적 진실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게 현실일지도 모르죠. 과학적 물질주의가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원래 각자도생하도록 되어 있는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과학적 물질주의와 의식의 다원성에서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는 결과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기본적 믿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20세기에 사상전쟁으로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말입니다. 

슈뢰딩거는 의식과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무기체와 유기체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점차로 과거의 과학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뭔가 현실에서 뽑아낸 무기체라는 추상에 대해서 논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야기들을 풀어 냅니다. 

그가 말하는 유기체란 물질들이 가지는 형상과 질서에 더 주목하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생명이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물질들이 어떤 형상과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죠. 물위에 퍼져나가는 동심원을 보면 우리는 뭔가 둥근 것이 퍼져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점점 더 커져가면서 연속적으로 형상을 바꾸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거기에 뭔가가 계속해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있는 것은 물이 아닙니다. 어떤 형상이죠. 마치 어린 아이가 청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우리가 그것은 단 한명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 우리가 의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바다위의 파도들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하나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 돌과 저 돌은 서로 분리되어 있고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돌같은 물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의식이고 현상입니다. 

슈뢰딩거는 의식을 가진 우리는 이 우주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될 때 그것을 기록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기억내지 완전한 의식의 불완전한 복사들이고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완벽한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마치 잘라진 잘라진 플라나리아의 조각들이 각각 제대로 된 성체로 다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이 에세이에서 슈뢰딩거는 의식이나 생명 그리고 두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의식은 오늘날에도 과학적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 코흐의 의식의 연구라는 책은 뇌에서 의식현상을 일으키는 부분은 어디인가를 연구하는 오늘날의 뇌과학자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슈뢰딩거의 에세이를 읽으면 오히려 100년전에 슈뢰딩거가 쓴 에세이가 더 폭넓은 시야를 보여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어쩌면 의식의 연구 나아가 뇌과학 전반에 있어서 그 발전이 눈부신듯 하면서도 느린 것은 우리가 여전히 뉴튼의 물리학을 연상시키는 연구를 생명분야에서도 지속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슈뢰딩거는 이 에세이의 끝을 도덕적 법칙에 대해 논하며 끝을 냅니다. 바로 이 새롭지만 동시에 오래된 관점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떤 답을 주는 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의 녹음에서 따로 이야기 한 적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슈뢰딩거의 길이란 갈라져 있는 우리들을 합치는 길입니다. 우리의 의식을 합치고 우리의 생각을 합치는 길입니다. 그것을 믿을 지 말지는 물론 처음부터 슈뢰딩거가 말했듯이 철학적인 의문을 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뭔가를 단순히 믿거나 믿지 않는게 아닙니다. 어떤 말의 뜻이 뭔지 느끼게 되고 좀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거지요. 슈뢰딩거의 이 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슈뢰딩거의 에세이 길을 찾아서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