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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求道 2 : 슈뢰딩거, 화이트헤드 그리고 과학적 물질주의

by 격암(강국진) 2019. 12. 11.

안녕하십니까오늘의 질문 강국진입니다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슈뢰딩거의 길을 찾아서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슈뢰딩거에 대한 소개라던가 길을 찾아서라는 에세이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는 지난 번의 동영상을 참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먼저 한두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개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예를 들어 위라는 말은 아래라는 개념과 짝이 되어서 존재하고, 빠르다는 느리다와 짝이 되며, 뜨겁다는 차갑다와 짝이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해봅시다


여기 하나의 공간에 뜨겁다라는 개념만이 혼자 존재한다고 해보자


말은 뭔가 이상하죠. 왜냐면 뜨겁다라는 개념만이 홀로 존재하는 공간이나 세계란 있을 없기 때문입니다. 차가움을 모르는데 뜨거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그런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여기 하나의 공간에 하나의 생명만이 혼자 존재한다고 해보자


그렇습니다. 뜨겁다라는 개념은 홀로 존재할 없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나 살아있다는 개념은 홀로 존재할 있을까요? 답을 어떻게 이해하시던 간에 우리는 적어도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진정한 진공속에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 있다면 인간은 즉각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빈공간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이란 개념은 분명히 문제가 있지요생명은 사실 주변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면서 자기 형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바다 없는 파도란 이상하지요.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비슷한 문장을 생각해 있습니다. 다음의 문장은 어떻습니까?


여기 하나의 공간에 당신의 자아 하나만이 혼자 존재한다고 해보자


뜨거움은 홀로 존재할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인이나 자아라는 말은 과연 생명이나 뜨겁다같은 개념과는 다른 걸까요? 그것은 환경이나 세상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본래 그것들 없이 혼자서도 정의가 되는 것일까요바다없는 파도같은 이상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모든 질문들이 무거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우리는 오늘날도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현대 과학은 어떤 의미로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 하나의 공간에 질점이라고 불리는 물체가 혼자 있다고 해보자.


문장의 뒤에는 어떤 말이 나오는지 학창시절에 물리를 배운 사람은 알겁니다그것은 바로 


아무 힘도 받지않는 물체는 움직이던 속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움직인다


라는 말입니다. 바로 관성의 법칙이고 뉴턴의 1 운동법칙이죠


뉴턴시대에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현대과학은 이후로 눈부신 발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어느새 바로 고전물리학의 관점으로 세상을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과학적 물질주의라고 불러야 관점은 당연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형이상학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뜨거움같은 개념의 예에서 보여지듯이 잘못 적용되면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점차로 형이상학같은 것은 애초에 필요도 없다는 식의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왜냐면 과학기술의 시대에 과학적 물질주의는 너무나 당연해 보여서 이제 그것은 형이상학같은 관점이나 철학이 아니라 그저 자명하고 언제나 옳은 진리로 보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일단 홀로 존재할 있다고 믿곤 합니다. 뉴턴의 물리학처럼 사고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몸바깥에서는 세포가 혼자 없지만 일단 홀로 존재하는 세포를 상상하고 세포들의 합이 몸이라고 생각하죠.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개인을 상상하고 사회를 개인의 합으로 이해합니다. 마치 기계가 기계 부품의 합인 것처럼 말입니다


1925년에 길을 찾아서를 쓰면서 슈뢰딩거는 형이상학이 더이상 필요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로 에세이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과학만으로 세상을 수는 없으며 언제나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는 선입견이나 개인적 믿음이 없고 순수히 사실로만 세상을 보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믿음을 맹신하는 사람입니다. 슈뢰딩거는 현대가 망해버린 고대와 비슷해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맹신하던 과거처럼 오늘날 종교는 힘을 잃고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는 타락하며 믿을 있는 안전한 지식의 근거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견의 변화를 만들기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겁니다


슈뢰딩거는 에세이에서 무기체와 유기체의 구분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게 뭘까요? 그가 말하는 무기체는 물질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기체는 형상내지 질서에 주목합니다. 모든 물질은 형상을 가지고 형상을 가지려면 물질이 필요하지만 세상의 어느 쪽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무기체나 유기체라는 말을 쓴다는 겁니다. 


유기체의 좋은 예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먹고 마시면서 몸안의 물질이 교체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가르키면서 여전히 같은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슈뢰딩거는 이런 말을 합니다. 물리학과 화학은 유기체가 아닌 무기체를 대상으로 하지만 세상은 유기체로 가득 있지 않냐고. 이것은 우리가 과학적 물질주의에 중독된다면 과학의 발전에도 한계가 오게 된다는 뜻입니다보다 중요하고 관심이 있는 것이 유기적 성질 형상인데 무기적 성질 물질만을 논하는 과학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앞에서 말했던 문장들을 읽어봅시다


여기 공간에 뜨거움 하나만이 홀로 있다고 해보자.

여기 공간에 하나의 생명만이 홀로 있다고 해보자

여기 공간에 당신의 자아 하나만이 홀로 있다고 해보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십니까?



이제 저는 또다른 한권의 책을 잠깐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것은 바로 화이트헤드의 과학과 근대세계라는 책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전에 질문을 던져 봅시다. 도대체 과학적 물질주의를 믿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일까요 우리는 형이상학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걸까요? 우리가 그런 신경써야 할까요?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두가지를 말하자면 아무래도 하나는 과학적 발전이 형이상학의 제약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슈뢰딩거가 크게 기여한 양자역학은 그래서 만들어 지기가 어려웠습니다. 양자역학은 과학적 물질주의를 포기해야 만들어 있는 이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과 우리는 아직도 양자역학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양자역학에서 가장 유명한 말중의 하나가 하나의 전자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물리학자도 수학적으로 수식을 전개할 수는 있지만 뭔가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말이 뭔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사고와 형이상학은 여전히 고전역학적이기 때문입니다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물질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의 과정철학을 전개했습니다하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는 대부분 양자역학을 무시하고 과학적 물질주의에 따라 뉴턴이 세상을 보듯 세상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이트헤드는 실패했습니다.  20세기의 기술적 발전은 눈부셨습니다. 그리고 기술들은 대개 기계적인 사고 방식으로 만들어 것이었죠. 아마 그때문일 겁니다


과학적 물질주의가 주는 두번째 문제는 윤리와 가치의 문제입니다. 과학적 물질주의는 우리가 누구인지 자연과 우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착각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모두 각자 떨어져서 각자 존재할 있는 존재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자연이 없어도 우리가 있고, 사회가 없어도 개인이 있으며, 당신이 없어도 내가 있다고 생각할 있게 합니다. 슈뢰딩거는 자기 에세이의 마지막에서 자기가 새로운 관점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바로 윤리적 관점의 문제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분에 있어서는 지난 녹음에서 소개드렸습니다


이제 과학과 근대세계로 돌아가 봅시다슈뢰딩거가 길을 찾아서라는 에세이를 썼던 1925년에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영국의 수학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화이트 헤드입니다. 


버틀란트 러셀과 수학연구를 했던 화이트 헤드는 63세의 나이가 되자 철학교수로 변신합니다. 그리고 그가 미국의 하버드 대학으로 초빙되어 1925년에 했던 로웰강의를 정리한 것이 바로 과학과 근대세계라는 책입니다. 


당시에 화이트헤드는 미국에 있었고 슈뢰딩거는 스위스의 취리히에 있었으니까 화이트헤드의 연설을 슈뢰딩거가 들은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슈뢰딩거는 그의 에세이에서 화이트헤드를 언급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문제의식은 적어도 출발점에서는 정확히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17세기 이래의 현대과학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적 물질주의라는 하나의 형이상학을 지나치게 진리 자체인 것으로 믿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화이트헤드는 먼저 수학의 추상성을 강조해서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마리 있고 고양이가 마리 있다고 해봅시다. 모든 물고기는 서로 다릅니다. 모든 고양이도 서로 다르죠. 그런데도 우리는 1이라는 추상적인 성질을 현실에서 뽑아 냅니다. 그래서 물고기 한마리 더하기 물고기 한마리는 물고기 두마리라는 계산을 있을 아니라 1 더하기 1 때는 아예 물고기라는 구체적 대상을 잊어버릴 있습니다. 그러니까 1 물고기 한마리인지 고양이 한마리인지 계산을 때는 상관없는 겁니다


또다른 좋은 예는 유클리드 기하학입니다. 세상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나오는 삼각형이나 원이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선같은 것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에서 삼각형이나 원이나 직선같은 수학적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추상적 개념들을 가지고 수학을 전개합니다. 우리는 삼각형이 뭔지, 원이 뭔지 명확히 알고 있으니까요


화이트 헤드는 수학이란게 이렇게 지극히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서 변하지 않고 옳을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의 힘은 추상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수학의 힘이 없었더라면 현대 인류의 발전된 문명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수학의 추상성이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간이 만들어 내고 뽑아낸 관념이지 사실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화이트 헤드는 과학적 물질주의가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어떤 물질이 시간과 공간의 어떤 점에서 고립되어 존재할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는 수학의 추상적 성질을 현실 자체로 오해한 것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뉴턴의 방정식안에서 어떤 물체가 특정한 장소에서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속력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은 자명한 현실로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학의 눈으로 현실이고 현실 자체는 아니라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나오는 시대에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면서 자신의 과정철학을 전개합니다. 하지만 과학적 물질주의는 오늘날에도 확고합니다. 이유는 기계적 사고방식에 기반한 과학 기술은 화이트헤드나 슈뢰딩거의 시대 이후에도 계속 엄청나게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이 나온 것도 거의 100년이 되어가지만 일상생활에서 양자역학의 방식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전물리학적 언어를 쓰고 고전물리학적으로 생각합니다. 여전히 탁자는 저기 있고 모든 일은 정확히 기계적 인과론에 따라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슈뢰딩거의 길을 찾아서라는 에세이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슈뢰딩거는 1925년에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 파동역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서 세계 물리학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파동역학이라는게 물체를 파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동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죠. 바다 위에 있는 파도가 파도 파도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슈뢰딩거의 에세이는 그의 과학적 연구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과학적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은  화이트헤드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인문학과 과학의 결합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슈뢰딩거의 사고방식이 제공하는 윤리적 관점에 대해 말씀드렸고 이번에는 슈뢰딩거의 문제의식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런 조각들을에 기초해서 슈뢰딩거가 하는 말의 요지를 전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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