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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求道 1 : 슈뢰딩거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by 격암(강국진) 2019. 12. 7.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질문 강국진입니다. 오늘은 우리는 누구인가하는 정체성의 물음에 대해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윤리적 행동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 물리학자 어윈 슈뢰딩거가 한 생각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먼저 슈뢰딩거에 대해서 소개를 좀 드리면 이 분은 양자역학의 발전에 결정적 공헌을 한 과학자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의 상징과 같은 것이죠. 그래서 1933년에 슈뢰딩거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밖에도 이분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써서 유전자 나선구조를 밝혀낸 크릭과 왓슨에게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제가 지난번에 소개드린 적이 있기도 한데요, 마지막에 링크를 걸어 둘테니까 관심있으신 분들은 그것도 보시면 좋겠습니다. 





이 분이 1925년에 에세이를 하나 씁니다. 이것은 슈뢰딩거의 나이가 38세였을 때였고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준 업적인 파동역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에세이의 제목은 길을 찾아서라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구도라는 제목이 되겠습니다. 물리학자가 구도라는 제목을 가지고 글을 썼다는게 일단 굉장히 재미있죠.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이 글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의가 그렇듯 굉장히 깊은 감명을 줍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구도라는 글에 대해서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까 했었는데 저자가 말하는 순서대로 이 글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왠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같더군요. 그 이유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책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잘라서 슈뢰딩거의 구도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소개해 볼까 합니다. 그리고 앞의 이야기들도 앞으로 차차 소개하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구도의 마지막 장인 10장 윤리적 법칙이라는 장에서 슈뢰딩거는 요즘 세상에 윤리적 위기가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요즘 세상이란 1925년입니다. 약 100년전인 동시에 1차세계대전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유럽이죠. 그리고 슈뢰딩거는 그 요즘에 윤리적 태도가 공격당하는 아주 흔한 방식이 바로 이런 논리가 퍼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통제나 자기 부정이란 헛소리다. 나는 나일 뿐이고 자연과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타고난 본성대로 살겠다. 


진정한 내가 되겠다던가, 나를 찾는다던가, 지킨다던가 하는 말은 세상에 많습니다.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진정한 자기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심장이 시키는대로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나란 어떤 존재일까요? 나의 핵심은 뭘까요? 가지고 싶을 때는 도둑질이니 뭐니 신경쓰지 말고 자기의 타고난 욕망에 충실해서 남의 것을 마구 차지하는 것이 진정한 나로 사는 걸까요? 성적인 매력을 느끼면 법칙이니 결혼이니 신경쓰지 말고 마구 행동하는 것이 진정한 나로 사는 걸까요? 사실 오늘날도 아주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자기로 산다는 말을 단순히 자기 욕망을 숨기지 말고 그것에 따라서 사는 거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웃기까지 합니다. 


슈뢰딩거는 이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슈뢰딩거는 결코 도덕선생님처럼 규칙을 죽 늘어놓고 그걸 지키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차분히 생각해 보면 진정한 자기로 사는 것은 오히려 자기를 극복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기로 사는 것의 핵심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 있다는 말은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런 문장을 생각해 봅시다.  


진정한 과학하기의 핵심은 지금의 과학을 부정하는데에 있다.


앞의 말과 비슷한 말이죠. 하지만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현재의 과학적 설명들에 만족하고 그걸 줄줄 외우는 것이 과학을 하는거라면 과학이 발전할 리가 없지요. 지금 만큼의 과학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과학하기의 핵심은 너무나 확실하다고 알려져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회의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진해 나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과학하기의 핵심은 지금의 과학을 부정하는데에 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해 보이니까 더 생각하지 말자는 유혹을 참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슈뢰딩거는 인간의 본질이 진화에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인간이 진화할 필요가 없고 그저 정해진 일을 로보트처럼 반복할 뿐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나는 사라지고 맙니다. 다시 말해 의식이 없는 물체가 되는 것이죠. 


슈뢰딩거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먼저 짚고 넘어야 할 핵심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불러야 할 뭔가 다른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가지 현실적인 이유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잠이 들어서 의식이 없어져도 그 사람이 없어졌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몸이 살아있다면 대개 그 사람의 몸을 그 사람 자체로 취급하죠.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가 잠이 들어서 의식이 없어질 때마다 우리는 재산상속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의 몸이 영원히 살 수 있다던가, 자신의 몸이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해서 기꺼이 자신의 의식을 제거해 버릴 사람이 있을까요?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야 말로 우리 자신입니다. 팔이 없어지거나 심지어 온몸을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해도 의식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온몸이 멀쩡해도 의식이 영원히 없어진 식물인간이 되었다면 그건 우리가 없어진 것이죠. 여기에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을 그 몸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일단 우리가 사람의 본질이 육체라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그 의식이란게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슈뢰딩거는 우리가 뭔가를 반복적으로 경험할 때 우리의 의식은 그런 일들로 부터 떠나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걷는게 그렇죠. 늘상 걷던 길을 뭔가를 생각하면서 걸으면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걷습니다. 호흡도 그렇습니다. 심장이나 장운동을 하는 것은 더더욱 우리의 의식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우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의식적 결정과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실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리고 나서 이렇게 의식이라는 것이 언제 사라지고 나타나는가를 관찰하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본적 특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진화하고 배우고 변화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새로운 일, 의미있는 일이 있을 때만 의식이 필요합니다. 같은 일의 기계적 반복만 존재한다면 의식이 존재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나라는 것도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고깃덩어리같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진화 과정, 진화 현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안에, 우리의 몸안에 과거에 우리가 경험한 수없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래서 규칙적으로 숨을 쉬죠.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이 진화를 통해 축적한 과거의 경험이니까요. 그 과거의 경험이 우리를 규칙적으로 숨쉬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과거의 경험들의 누적을 우리 자신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슈뢰딩거에 따르면 우리의 본질은 그 숨쉰다는 본능내지 습관에 있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런 행동은 의식바깥에 있으니까요. 의식이 개입하는 것은 오히려 그런 습관을 벗어나야 할 때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물속에 빠졌거나 독성가스가 퍼져있어서 숨을 쉬면 죽을 때 의식은 우리의 습관적 호흡을 멈추게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본질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하는 데에 있다기 보다는 호흡에 대한 의식적 개입에 있습니다. 사소하지만 이것이 바로 슈뢰딩거가 말하는 자기 부정입니다. 


우리의 욕망이나 습관적 행동은 과거의 상황에서 적절한 것으로 판별되어 물려내려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진화한 오랜 세월동안 인간은 농사를 짓지 않았고, 법질서따위가 없고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소규모 집단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같은 상황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상황에 맞는 새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식적 개입이 필요합니다. 채집 수렵인은 도시 거주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화이며 배움입니다. 


자. 여기서 앞에서 나왔던 말들로 돌아가봅시다. 


자기 통제나 자기 부정이란 헛소리다. 나는 나일 뿐이고 자연과 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타고난 본성대로 살겠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최근에 많이 들었습니다. 제일 좋은 예는 전근대적 사회관습의 억압이라던가, 오래된 종교적 질서의 억압같은 것이죠. 그런 억압이 존재할 때 그 억압 혹은 그 시대의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그 억압과 싸워서 자유를 쟁취하는 것은 매우 매우 살아있는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우 의식있고 깨어있는 행동인 것이죠. 그리고 그런 행동들은 대개 매우 반관습적이고 반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런 억압들은 무섭기 때문입니다. 강한 권력앞에서 도망가는게 자연스러운 본능이죠. 싸우는게 아니라.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싸웠습니다. 바로 진실된 자기가 되기 위해서, 깨어나서 살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때로 여기서 말하는 바로 이 말들을 하면서 그렇게 싸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이 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교육시키기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낡은 관습을 바꾸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편하고 즐거운 길로만 가는 것이 자기를 찾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단기적으로 말하자면 그 반대였죠. 


어윈 슈뢰딩거에 따르면 우리의 본질은 성장하고 진화하고 배우는데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멈추는 순간이 살기를 멈추는 순간입니다. 그것이 왜 그런지, 우리는 여전히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을 우리의 몸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슈뢰딩거의 에세이 길을 찾아서는 2013년에 국내에 번역되어 나와 있습니다. 물리학자의 철학적 세계관이라는 책에 포함된 두 개의 에세이중 하나니까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의 질문 강국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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