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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와 허풍

by 격암(강국진) 2020. 1. 9.

2020.1.9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안다고 믿는다. 그뿐인가 때로는 다른 사람도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비슷한 종류의 허풍들에 빠져드는데 그것은 자신이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이러저러한 행동을 할 거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기반으로 남들을 비난하는 일도 많다.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이다. 

 

윤리학에서는 질문을 던지기 좋아한다. 백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죽여야한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백사람을 구한다고?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한 사람이 자신의 죄없는 부모님이라고 하자. 그럼 이제는 답이 달라지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어떤 이유로 해서 선택했건 간에, 또 스스로 얼마나 그 답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우리는 한가지를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그저 말이고 문답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모른다. 

 

입으로는 목숨바쳐 애국하고, 나쁜 놈들과 싸울 사람은 세상에 많다. 입으로는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도 관대할 사람은 아주 많다. 스스로 허풍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진심이라고 해도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질지는 모른다. 설사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이 실제로 훌룡하게, 약속한대로 행동한 경험이 있다고 해도 다음번에도 그럴지는 모른다. 어쩌면 이제까지는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윤리적 난제를 만들고 그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것은 지나쳐서 백해무익한 일이 되기 쉽다고 생각한다. 불륜드라마를 보면서 배우자의 불륜에 대해 관대하게 생각하고, 물론 그것은 나쁜 일이지만 이러저한 이유때문이니 이해해줄 구석도 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런 상황에서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불륜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연락도 없이 직장 이성동료와 외박을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꺼야라고 배우자에게 질문하는 일이 있다고 하자. 그런 질문에 대해 나는 당신을 믿어라던가, 그런 일은 애초에 만들어서는 안된다던가, 왜 나를 못믿냐던가하고 답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일어나지도 않은 가상현실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고 말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짓이다. 

 

결혼전에 상대에게 잘해주겠다고 많이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믿을만 하지 않다. 그런 말이 의미가 있다고 믿나? 배우자에게 이러저러하게 해주는 것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해준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건 내가 상대방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 아니라 해야할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어린 자식에게 내가 앞으로 잘해줄 거라고 허풍치는 부모는 별로 없다. 더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하는 부모는 많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알까? 우리는 대개 살면서 여러가지 판단과 목격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고 다른 사람도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우리가 유혹에 강한지 그렇지 못한지,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하는지 우리는 마치 아직 열어보지 못한 박스를 열어보듯 우리를 발견해 간다. 이런 방식자체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즉 시공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바위나 보석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즉 객관적으로 탐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적어도 거기에는 한계가 크다. 

 

어제 나는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잠깐 무시할까하는 유혹이 있었지만 나는 용케 그것을 이겨냈다. 그것은 나를 이정도는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도 여기에 있을까? 어제 내가 그랬다고 해서 내일도 반드시 저절로 그럴거라고 믿을 수는 없다. 내일도 유혹이 있을 것이고, 내일은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같은 선행을 계속한다고 해도 어쩌면 그것은 그저 습관과 무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느새 어떤 감정도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어떤 정보를 주기는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오히려 알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진심없이 습관으로 움직이는 것도 좋은 사람일까? 여성에게 차문을 열어주고 코트를 받아주고 의자를 빼주는 사람이 반드시 여성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다. 지키기가 불가능한 화려한 약속을 하는 남자가 반드시 가장 좋은 남편이 아니다. 심지어 그 약속을 지켜도 그럴 수 있다. 미래를 어떻게 알겠는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은 빚쟁이처럼 과거에 묶여서 약속에 연연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계약조건에 빠지는 것은 등한시하면서 말이다. 약속을 지키면서도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종종 악마는 약속을 지키는 존재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우리 스스로를 객관적 눈으로 보라는 말을 듣는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을 나왔고, 어떤 직장에서 어느 정도의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기부는 어느 정도했고, 가정생활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쓰고 있는가 같은 수치를 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수치도 무시할 수는 없고 토론회나 신문기사에서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이런 수치가 어떤 사람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수치는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 측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것이고 종종 진짜로 중요한 것은 거기 뭐가 있는가가 아니라 거기 뭐가 없는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뭘 망각했는가? 우리는 뭐가 없는가를 잘 모른다. 수치에 기반하여 자신을 객관화하고 이만하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겉보기만 완벽해 보이지 실제로는 자기기만이기 쉽다. 

 

고정된 것은 없다. 우리는 생각만큼 괜찮은 사람이 아닐 수 있고, 다른 사람도 그렇다. 내가 여지껏 완벽했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수 있다. 물론 최대한 겸손하고 확신을 멀리하려고 해도 유한한 우리는 종종 분노하고, 강한 주장을 펼치고, 절대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확신은 우리의 유한성에서 나온다. 여름에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는 계절의 변화를 알 수가 없기에 세상이 따뜻하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노자 15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옛날 훌룡한 선비는 미묘하고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느니라. 잘 알 수가 없음으로해서 억지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노라.

 

신중하기를 마치 겨울에 내를 건너는 것과 같고, 삼가하기를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것같고, 엄숙하기를 마치 손님과 같고, 부드럽기를 마치 녹아가는 얼음과 같고, 순박하기를 마치 통나무와 같고, 텅 비어있기를 마치 골짜기와 같고, 평범하기를 마치 흐린 물과 같도다.  

 

나는 이 말들이 이렇게 들린다. 

 

"허풍떨지 마라.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조심 조심, 천천히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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